김동호 목사님의 '잘 사는 것' 이란 주제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생각되는 것이 있어서 써봅니다. 대전제는 릭워렌 목사님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 이죠. 김동호목사님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께 쓸 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그 말은 '교회에서 쓸 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 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보내셨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분이 아니실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면 교회를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두번째 질문에 대해선 자신있게 "NO"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피조물이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과 창조주를 위해서 사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주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의 One and Only 요구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기독교에서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어떤 의도를 가진 거짓말장이 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이 아름다와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땅에 보내어진 모든 사람에게는 이땅을 아름답게 만들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요? 역시 답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내 몸 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해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양보합시다!" 양보는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하지만 중요한 수단입니다. 문제는 가지지 못한 것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가질 수 있는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중에 하나가 '어쩔 수 없어서 사랑하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에 선 사람이 아주 쎄게 당신의 발을 밟았습니다. 아프고 화가 나서 "어떤 놈이야!"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니 조폭 같아 보이는 덩치 크고, 험상 궂은 사람이 마주 보며 "뭘 쳐다봐 임마!" 그러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참을 것입니다. 혹시 그러면서 "나는 사랑을 베푸는 중이야!" 라고 합리화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조금 더 자주 있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전을 하는 중에 어떤 차가 무례하게 끼어듭니다. 조금은 화가 나서 끼워주지 않으려고 바짝 붙였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 차는 거의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제서야 브레이크를 밟으며, "에이 양보하고 말지!" 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당신은 양보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양보' 나 '사랑' 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험하게, 흉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를 사랑하라고 어드바이스 하시는 분들을 자주 봅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힘있는 자에게 양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힘있는 사람이 횡포를 부리는 데에도 오로지 그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양보하려면, 사랑하려면, 먼저 양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에게 오른 뺨을 맞았을 때, 충분히 대항하여 원수를 눕힐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왼 뺨을 돌려대는 것이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힘' 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을 한다고 할 때, 운전을 잘 못하는 사람은 함부로 양보해선 안됩니다. 양보해선 안되는 상황에 차를 급히 세우고 양보하다가는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운전 중에 하는 양보도 원칙을 알아야 하고, 운전을 잘 해야 하고, 표현도 잘 해야 합니다. 쉬워 보일 지 모르지만, 아주 나이스 하게 양보하는 운전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지니스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서서 사업을 할 경우, 어떤 상황이 와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평소에 잘 해서 신뢰를 쌓아 놓지 못했을 경우, 결정적일 때 양보할 수 없습니다. 작은 양보 하나가 부부관계를 파경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으니까요.
양보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아주 간단하고도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글에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언제라도 양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며 살자!'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실 때, 기쁨으로 양보하는 우리가 되자는 것입니다.
양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리고 왜 허락치 않으시겠습니까!
2010년 8월 21일 토요일
어떻게 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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