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일 목요일

병을 고치는 중보기도와 신유의 은사

십년이 지났을 것 같네요. 한국의 개그프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김경태장로님께서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기 전에 신문에 글을 쓰셨었습니다. 제목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였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기 전에 한 이야기였죠? "하나님이 구해주시려고 하면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경태장로님은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셨죠. 좀더 살아계셨더라면 주님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얼마전까지 다니던 교회에서 어떤 분의 병고침을 위해서 담임목사님이 발벗고 나서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의 대형교회 중에 하나였는데도 그 신자의 병을 고치는 데에 교회의 운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지만, 걱정이 앞섰습니다. 전교회적으로 수시로 모여 중보기도를 했고, 설교시간도 많이 할애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자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지금 한 삼십가정 쯤 나오는 저희 교회에 오랜 병으로 아주 위중한 분이 한분 계십니다. 오래 전에 간 이식을 받으셨는데, 이제 기능이 떨어졌고, 병원에서도 6개월이라고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 엊그제 응급실에 들어가셔서는 하루종일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교인들은 돌아가시나 싶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하나님이 어떤 분을 당신 곁으로 데려가기를 원하신다고 합시다. 갑자기 데려가시는 것과, 한 1년 정도 정리할 시간을 준 후에 데려가시는 것. 어느 것이 더 좋아보일까요? 저라면 1년 정도 정리를 하고 죽고 싶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죽고 싶습니다. 그리고 욕심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제 친구들 보다 조금 먼저 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죽음을 선택해서 죽고 싶습니다.

한 7~8년 전의 어느 날, 저는 저자신을 하나님게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마음으로 제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별로(?) 겁나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그렇게 바람직하게 살지는 못하기에 하나님이 보시고서 "에라! 너는 더 이상 세상에 둬도 가망이 없겠다!" 하고 거둬가시면, "에이! 그랬었죠! 그게 제 한계죠!" 하며 뒷머리 긁으며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기대를 가지고 지켜봐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생각을 수시로 하며 살아보겠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하시며 부르시는 응답을 따라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조금 더 할 수 있었을텐데? 헤어지기 섭섭하네! 하는 미련이 아주 쪼끔남게 간다해도 좋겠습니다.

저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만 말씀드리고 주제를 위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교인들이 중보기도하여 병을 고칠 가능성이 있을까요?" "교인들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정답은 '가능합니다.' 입니다. 하나님은 계획을 바꿔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 그리고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은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완벽한 법칙에 특별한 예외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새로운, 변화된 삶을 살수 있을 겁니다. 또, 비슷한 차원으로 중보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수도 있겠죠. 여기서 두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병고침으로 인한 감사와 변화가 과연 얼마나 갈까요?" "생명이 10년, 또는 20년 연장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제 질문의 뉘앙스에서 느끼시겠지만,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삶이 주어졌다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참 묘합니다.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것이 인생의 실패이고, 패배일까요?" 죽음의 순간은 이땅에서의 수고를 끝내고, 하나님 곁으로 떠나는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이땅에서의 헤어짐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만나서 반가운 사람들을 곧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가끔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분이 집회를 하고, 사람들에게 이쓔가 되는 것을 봅니다. 혹시 신유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신유의 은사를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더 바라는 것은 신유의 은사를 쓸 일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시게 하며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왠만해선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고 시도하지 맙시다! 만약 당신이 꼭 그 병을 고쳐야 한다면, 먼저 왜 고쳐야 하나를 생각하십시요. 그 다음에 어떻게 서원할 것인가를 결정하십시요.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순수하다면, 그 서원이 희생적이라면, 당신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 확률이 큽니다.

어떤 사람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왜 그사람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었을까요? 기독교의 부흥을 위해서?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높아지게 하기 위해?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부여받게 하시려고?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면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리는 방해자' 라고 생각됩니다. 원인과 결과에 관계 없이,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병이 치유를 받는다고 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겠지만 신유의 은사를 오랜 동안 가지고 계신 분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병이 위중한 우리 교회 교인은 왠지 지금 당장 우리를 떠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고 보내드릴 때에는 아름답고, 기쁘게 보내드렸으면 합니다. 헤어지는 마음이야 정말 아프고, 아쉽겠지만, 잘 돌아가시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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