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일 겁니다. 특히 아이들을 키우시는 부모님들은 좀더 신중히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실 읽으시는 분이 한, 두분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쓰니, 오히려 잘 안써지더라구요. 주제에 관계 없는 이야기도 괜히 장식으로 써넣기도 하구요. 오늘 이야기도 조금 황당하고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아주 특별한 제 후배 이야기를 많이 쓰려합니다. 너무 특별해서, 만화같기도 하지만, 그게 걱정이 되서 한치의 과장도 안하려고, 오히려 줄여서 씁니다. 제가 그 후배를 처음 본 것은 그 후배가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였습니다. 키가 167 센티미터 정도의 작고 다부진 몸집이었는데, 170 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같은 과 여자친구와 함께 다녀서 더 눈에 띠었습니다. 체육교육과에 다녔는데, 당시 꽤 들어오기 어려운 과였습니다. 학력고사도 꽤 잘봐야 하고, 체육실기도 정말 잘해야 입학이 가능했었습니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동선이 비슷해서 언제부터랄 것 없이 꽤 친한 선후배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무얼할까 하다가 82년도에 선배, 동기, 후배 몇명이 모여서 농구써클을 만들었고, 써클 생활이 대학생활의 전부인 것 처럼 써클에 몰두했었습니다. 그 후배도 우리 써클에 관심이 있어서 가끔 같이 농구를 하곤 했는데, 84년도에는 자기가 실기를 가르쳐서 입학시킨 신입생 중에서 괜찮은 친구들을 전부 우리 써클로 보내고, 이어서 자기도 3학년이지만 가입할 수 있겠냐고 의사를 표시했었습니다. 흔히 운동써클은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에 신입생을 위주로 가입을 받곤했기 때문이죠. 워낙 매너도 좋고, 믿음직한 친구여서, 흔쾌히 가입을 허락했었습니다.
그 후배는 고등학교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축구명문 중에 하나인 용문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공부도 꽤 잘해서, 축구부임에도 불구하고 반장을 했답니다. 후배의 부모님은 후배가 운동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하셔서 축구를 못하게 하셨답니다. 그래서 학교 측과 타협한 것이, 훈련은 하지 않고, 게임에만 참가하게 하는 것이었답니다. 훈련도 하지 않고 게임만 참가함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선발 상비군에 들어갈 정도로 특별한 친구였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응하지 않고,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은 원하던 대학의 체육교육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체육교육과에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축구선수로 들어왔으면 오히려 원하는 과를 갈 수 있었을텐데 손해를 본 셈이죠. 체육교육과에 들어와서부터 교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1학년 성적이 전부 A플러스인 경이적인 성적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길게 쓰는 이유는 평범한 길을 가지 않는 친구이고, 뭐든지 잘하는 친구이고,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럽게 봐주는 친구라는 것을 쓰고자 함입니다.
후배는 대학 4학년 때인 85년도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체육과 출신이고, 몸이 워낙 다부지게 생기다보니 당시 한창 생기기 시작한 특공여단이란 곳에 배속되어 충북 충주에서 근무했습니다. 한 6개월 안보인다 하더니만, 그 후로부터 과장 조금 보태면 1년에 1/3 이상을 휴가를 나와 학교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첫번째 휴가는 암기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나오더군요. 두번째 휴가는 웅변대회에서 1등해서 나오고, 사격에 1등해서 나오고, 체력측정 1등해서 나오고... 한번은 휴가를 나왔는데, 이번엔 뭐로 나왔냐고 했더니, 심심해서 조그만 돌을 철봉의 쇠파이프 구멍에 던져서 넣고 있었는데 하나가 들어가는 것을 부대장이 보았답니다. 부대장은 우연히 들어간 것이라고 하고, 후배는 또 넣을 수 있다고 하고, 내기를 걸었는데, 못넣으면 연병장 50바퀴 돌고, 넣으면 휴가나가고로 했답니다. 후배는 하나를 던져서 넣고, 내기에 이기고도 하나 더 보너스라고 하며 넣는 것을 보여주었답니다. 후배의 손 감각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남자들 흔히 하는 바닥에 사각형 하나 그려 놓고 멀리서 동전 던져서 가까이 던진 사람이 먹는 내기를 하면, 화투장 만한 사각형에 동전을 열번 던져서 아홉번 정도 넣습니다. 이 후배를 모르는 사람은 100%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어쨌든 돌 던져서 철봉 안에 집어넣고 휴가를 나와서 5일을 보내더니, 귀대하는 날, 들어가기 싫다고 하며, 부대장에게 전화를 해서, 휴가 하나 더 쓰고 다음 주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부대장이 승락을 하더라구요. 휴가 건수가 7개나 더 있답니다. 정말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하나 하죠. 저희 농구써클이 저희 학교 선수들과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40점을 접어 주고, 내기를 했었습니다. 저희들도 자존심이 있어서 이겨도 챙피하다고 하며 게임을 했는데, 게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서, 휴가 나와서 게임을 띠고 있던 후배가 콧뼈를 크게 다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제가 후배를 부축해서 택시를 타고 대학부속병원으로 가서 임시처치를 했죠. 끔찍하게 다쳤었는데, 다행히 당직 레지던트가 코에 대한 전문이어서 잘 처치가 되었습니다. 학교로 돌아와보니, 분위기가 망친 상태였지만, 40점을 접고도 10점 가까이 졌더라구요. 후배가 다음 번 휴가를 나왔는데, 학교 앞에서 술을 먹고 있다가, 자기가 다친 상태에서 게임에 진 것이 너무 억울하다며 복수전을 하자고 해서 말나온 김에 하자고, 학교 체육관으로 갔습니다. 감독만 없으면 게임을 할 수 있었기에 갔는데, 연습이 막 끝나고 있었고, 감독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술먹다가 그냥 딱 다섯명 있어서, 운동복, 운동화 하나도 없이 올라갔죠. 선수들 것을 빌려입고, 신고 준비를 하는데, 후배의 발싸이즈가 260 이었는데, 선수들 중에 가장 작은 싸이즈가 290 이었습니다. 선수들은 놀리느라고 또 점수를 접어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강력하게 맞상대하자고 했더니, 주전들은 빠지고, 1~2학년을 중심으로 뛰게 하더군요. 10분 정도를 뛰었을까요? 예상을 뒤업고 저희가 이기자 열받은 주전선수들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주전으로 나온 선수들은 이민형, 강을준, 강두수 등이었습니다. 그래도 대학농구나 한국 프로농구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선수들이었죠. 전반 20분을 뛴 결과 저희가 이겼습니다. 저희가 이긴 것이 아니라, 그 후배 혼자 다 넣었습니다. 제 기억에 48:44 로 이겼는데, 그 중에서 후배가 46점을 넣었습니다. 그것도 공격성공률 100% 였구요. 167센티미터의 축수선수 출신이 대학농구선수를 상대로 모든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혼자서 다섯명을 뚫고 들어가서 넣더라구요. 농구가 아니라 무협영화를 본다고 생각하시면 맞을 겁니다. 얼마나 날라다니냐 하면, 레이업을 하다가 링에 손등이 부딪혀서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오는 바람에 전반전 거의 끝난 상황에서 경기를 끝냈죠. 아무리 사실이라고 말해도 믿어지지 않으시죠?
인간의 몸으로 하기 힘든 것, 한두가지 말씀드리죠. 그 후배는 가끔 계단을 내려올 때, 두발로 제자리 멀리뛰기 하듯이 공중으로 붕 뛰었다가 두발로 계단으로 떨어지면서, 바로 다시 점프뛰고, 이렇게 연속으로 해서 계단을 내려오곤 합니다. 보통 계단을 한번에 열계단 정도씩 뛰어내려울 수 있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내려오면서 있는 한 20여개 짜리 철제계단 조차도 세번에 나눠서 뛰어내려 오더군요.
당구를 얼마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냥 300점을 놓고 칩니다. 88년도 쯤 인가요, 써클 후배들이랑 당구장에 갔다가 들어오는데, 다른 후배들이 말도 안된다며 투덜거리고 들어오더라구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쓰리쿠션을 한큐에 82개를 쳤답니다. 물론 선수들이 치는 大대가 아니고 일반인들이 치는 中대에서 친 것이지만, 오히려 그 조건에서는 아마 쿠르몽 아니라 쿠르몽 할아버지가 와도 쿠션을 80개 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도 한때 500점 정도를 놓고 쳤기 때문에 당구에 문외한은 아니구요. 당시 같이 당구를 치던 후배 중에는 한국대표로 아시아당구 선수권대회에 나가사 3위를 한 사람도 있었거든요. 물론 그 후배도 기복이 있긴 하지만, 잘 맞을 때 보면, 이건 사람이 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번은 한국당구계의 원로인 양기문씨가 운영하는 당구장에 그 후배가 가서 당구를 치는데, 하도 당구를 이상하게 치니까, 보다가 뭔가를 느낀 양기문씨가 후배가 치는 당구공을 세우더니, 모양을 갖추어놓고, 이것 한번 쳐봐라! 또 모양을 갖추고 이것 한번 쳐봐라! 너댓번을 문제를 내더니만, 자기가 책임질테니, 일본으로 가서 당구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했었습니다. 300점 치는 일반인에게 말이죠.
그 후배가 저를 많이 좋아하고 따랐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도 같이 했습니다. 사업적으로도 대단한 능력을 가졌죠. 얼마나 능력이 있냐하면, 어떤 가전회사가 어린이대공원에서 행사를 하는데, 저희 회사가 맡아서 기획하고 진행을 하기로 계약을 따냈었습니다. 예산이 2억원 정도였는데, 대기업인 그 회사의 임원들도 그 후배를 얼마나 믿느냐하면, 그 후배가 연예인들 출연료는 현금으로 줘야 한다고 하니, 인보이스나, 입금표도 없이 현찰로 1억원을 줄 정도였습니다. 한참 술값 외상으로 몰리던 후배는 그 일억원으로 술값의 일부를 갚고 잠적을 했었죠. 그 이후로 더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집니다. 잠적한 중에, 도박하는 하우스에서 기도를 봐주다가 사람을 한대 쳤는데, 그만 맞은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과실치사로 감옥게 갔고, 또 감옥에서는 당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사형수가된 지존파의 두목 김현양이라는 친구를 사형집행전까지 지키는 감방동기가 됐구요. 대학 1학년때부터 사귀다가 결혼을 한 키큰 부인은 경기도 용문에 있는 고등학교의 체육교사였는데, 방학 중에 혼자 설악산에 갔다가 실족사를 하고 맙니다.
그 후배는 마음을 잡고, 경동시장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종일 일하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가게는 경동시장에서 요지에 있었고, 가장 큰 가게라고 할 수 있었는데, 짐나르고 심부름하는 막일로부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년 만에, 가게의 구매를 총괄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런 가게에서 구매란 정말 중요한 것이더군요. 그 후배가 한번에 쓱보고 결정하는 물량이 보통 수천만원대에서 억대에 이르는 정도였습니다. 경동시장에서 일하면서부터 청량리 인근에 있는 조기축구회에 나가 축구를 이십년 만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금새 1부리그에 올라가게 되었죠. 2000년 쯤인가요? 그 후배의 나이가 39살이었는데, 효창운동장에서 조기축구 1부리그 결승전을 하는 모습을 프로축구팀 감독들이 와서 보는데, 그중에서 그 후배를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이차만이라는 프로팀 감독이 게임을 끝내고 들어오는 후배에게 자기 팀에서 축구 다시 시작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할 정도였습니다. 39살임에도 불구하고 100미터를 빠른 11초 대에 뛰고 있었으니까요. 그 후배가 어느날 와서 제게 이야기하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내가 한국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그때 양하(박양하선수)가 만만치 않았었다고. 조긍연이, 함현기, 김준현이 이런 애들은 그때도 상대가 안된다고 생각했었다구요. 그런데 얼마전에 양하랑 뛰어보니까, 걔네들은 축구계에 계속있었고, 자기는 운동 거의 안하고, 노가다 뛰며 몸이 완전히 삭아있는데도, 상대가 안되더라는군요. 결국 자기 또래에서는 한국에서 자기가 축구를 제일 잘하는거라고 하더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거론한 선수들은 63년생 선수로는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죠. 물론 다들 국가대표에서도 한가닥 했었구요.
마지막으로 그 후배의 재능의 끝이 어딘지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골프입니다. 경동시장에서 돈을 꽤 받기 시작하면서, 골프에 손을 대더군요. 제게 와서 "저는 모든 운동에 싫증을 느껴서 그만두었는데, 골프는 싫증을 안느낄 수도 있는 운동인 것 같아요. 그래서 골프를 한번 열심히 해보려구요." 저는 만약에 그 후배가 싫증을 느끼지 않고, 한 3년만 열심히 한다면, 어쩌면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또래로 꽤 잘나가던 세미프로에게 골프를 배웠습니다. 3개월을 배우고 필드에 나갔답니다. 머리 얹으러 나간 날, 싱글인지? 거의 싱글인지? 를 쳤습니다.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아마추어 대회인 SBS 골프대회에서 3번 연속으로 우승을 했습니다. 스코아가 -4, -3, -4 이었습니다. 뭔가 되겠다 싶었는데, 또 안좋은 일이 터져서, 한국을 떠났습니다. 중국으로 갔다가, 캐나다로 갔다가... 신분도 없이, 골프 티칭 프로를 하며 지낸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른 후배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 후배는 그냥 천재라고 할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라고 해야 할 정도죠. 하지만 슬퍼지는 것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이 후배를 제 생전에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이 후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겠죠. 물론 제가 먼저 죽을 확률이 많겠지만요. 제가 후배에 대해서 장황하게 쓴 것은 후배에 대한 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상상치도 못할 재능을 가진 어떤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일수도 있겠죠. 이 후배에게 아직 어떤 기회가 남아있을까요? 부정적입니다. 무엇이 이 후배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재능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이 후배의 이야기는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 삶의 회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후배에 비교하면 훨씬 못하지만, 저도 꽤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거의 거의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재능과 노력은 반대되는 말이죠. 국민학교, 중학교의 경우에는 IQ 가 아주 높은 아이들은 수업시간에만 집중하고도 시험에 100점을 맞습니다. 집에서 공부라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겠죠. 저희가 학생 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머리가지고 버티는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다. 그 이후는 노력한 사람에게 당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도 맞는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현상들이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죠.
저도 노력 없이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한가지를 특별하게 얻었다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아마 그래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고 봅니다. 재능은 노력의 적(敵)입니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얼마나 노력했나?' 로 평가받습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는 말이죠.
재능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포기한다면 실패한 것이겠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재능을 믿고 노력하지 않고 산다면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깨달을 날이 올것입니다. 재능이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남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했다면, 살아가면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아주 드물게, 거의 확률이 없지만,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 부분에 더욱 노력을 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겠죠.
전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안스러웠습니다. 재능이 많은 아이들을 보면 흐뭇했구요.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들도 깨닫기 쉽지 않은 하나님의 섭리와 평가를 말이죠. 그래도 어른이, 부모가 알아서 아이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부모님들께 당부드립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축복받은 아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봐주세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게, 기쁜 마음으로 계속 격려해 주세요. 거꾸로 공부는 별로 안하는 것 같은데도, 성적이 좋고, 운동도 잘하는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노력을 할 방법을 찾아 주세요. 잘 못하는 분야를 시키셔도 좋고, 목표를 높게 잡아서, 부담을 주어도 좋구요.
모든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이들이 노력하며 세상을 살 수 있게 부모들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재능 없음이 축복임을 생각하며...
2012년 8월 3일 금요일
재능 ! 과연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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