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일 화요일

성령에 대하여

 '성령' 참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하시는 분도 그다지 많지 않으십니다. 방언 기도 하시는 분들이 자신 있게 답하실 것이고, 목회자들이나 평신도 리더 들 중에서 어느 정도 확신있는 대답들이 나올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쓰고 싶은 것은 많은데, 잘써보려 하니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썼다가 지우고, 여기에 붙였다가 저기에 붙이고 하면서 안되겠다 싶어서 덮어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결론내렸습니다. 그냥 짜집기 하듯이, 순서 없이 생각나는 것을 편하게써보기로요.  

이 글을 쓰면서 "내게 있어서 성령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나?" 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국민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오금중앙교회의 겨울성경학교의 저녁 부흥회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저를 뜨겁게 하시고, 움직이셔서,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 3년간 저는 매일 교회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교회에 가서 뭔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중학생이지만 성인들의 모든 공예배에 다 참석했고, 속회 예배도 드렸습니다. 특별한 일만 없으면 매일 교회에 들려서 기도하고, 청소하고, 고장난 것 고치고...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부터는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성경공부 인도하고, 기도회 인도하고, 교회 행사 만들어 진행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속한 속회의 성경공부도 제가 인도했습니다. 고등부 헌신예배로 드린 주일 저녁 예배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제가 인도하는 금요철야기도회에는 어른들도 자주 참석하셔서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고등부 졸업하자 마자 고등부를 주관하시는 장로님이 고등부 교사를 하라고 하셨는데, 같이 고등,부 생활을 하던 후배들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고사하고 아동부 교사를 1년 했습니다. 다음 해에 다시 강력하게 권유하셔서, 제 뜻을 꺽고 고등부 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고등부 활동을 하던 후배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하지만 아동부에서 1년, 고등부에서 6년, 청년부에서 10년, 총 17년 간 교사를 했습니다. 특히 청년부 교사는 혼자였습니다. 교역자도 없이 혼자서 매주 집회 인도하고, 절기 마다 수련회 가고, 행사 하고, 기도원 가고를 모두 혼자서 진행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10년 가까이 중고등부 교사를 했습니다. 교사 뿐 아니라, 주차 봉사, 차량 봉사, 주방 봉사를 동시에 하면서 봉사에 미친 사람처럼 10년, 정확히 하면 9년을 지냈습니다. 이후에는 맨해튼에 있는 청년들의 교회에서 3년간 간사를 했는데, 동시에 뉴저지 노우드에 있는 양로원에서 봉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10년 째 연세드신 목사님을 도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봉사가 아니라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주일에 두번 주일과 수요일 예배를 드리며 예배 인도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든 성령을 체험하고 지난 49년간 제 삶이 변화된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위의 글을 보면 제 삶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신앙생활에 국한된 것이고, 저의 일상생활은 어찌 보면 크리스챤으로 보이는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했기 때문에 중학교 1~2학년 때, 불량끼 있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술, 담배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술 담배가 크리스챤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게 된 날부터는 전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요.  싸움도 조금은 했고, 아주 가끔은 남을 윽박지르기도 했습니다. 싸움을 하긴 했지만 사람을 때려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두려움에 떨고있는 상대를 때려 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 제 눈앞에서는 약한 아이들에 대한 집단적인 괴롭힘이나, 구타, 따돌림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때는 아마 누구 보다도 더 많이 놀러다녔을 겁니다. 나이트 클럽도 수백번 갔을 겁니다. 나이트 클럽에서도 술, 담배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여자와 블루스를 추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러니 하지만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렇듯 교회 밖에서의 제 삶은  온전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성령의 인도를 느끼고 따르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고,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천성' 을 가지고 변명을 해보기도 합니다. 천성적으로 신실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시골에서 전학와서 우리 교회에 온 승근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한살이 더 많은 제 또래였는데, 항상 겸손한 미소를 짓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다녔습니다. 교회 어른들을 보면 45도 이상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했습니다. 모든 어른들이 "승근이 처럼 좀 해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맨날 괴롭혔습니다. "너 성경책 가슴에 안고 다니면 죽여버린다." 그래도 승근이는 웃기만 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을 나와서 섬에 들어가서 목회를 한다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고등부와 청년부 시절 그의 미소는 성령으로 인한 것이었을텐데, 저는 천성이라고 우기며 그렇지 못한 제 행위를 변명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변명도 해봅니다. 성령의 체험을 너무 어렸을 때 해서 내세울만한 삶의 변화가 없었다고요. 하지만 국민학교 6학년, 그때가 하나님의 때였었고, 제 삶의 분수령이 그때 였어야 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제가 체험한 성령에 대해 말한다면, 분명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었고, 온 몸에 열이 올라서 뭔가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잠도 오지 않아 새벽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 삶은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나 많은 사람들이 겪은 체험에 대한 이야기 말고,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무엇인가요? 모두가 아시듯 성령은 하나님의 영 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영과 혼을 가집니다. 이 영은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가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지만 이것을 성령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 영은 나의 혼과 같이 붙어있어서 보통은 영혼이라고 함께 부릅니다. 이 영은 '신의 소리' 라고 불리기도 하고, 중세에는 이성 이라는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도록 지도하죠. 이와는 달리 성령은 각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시려는 의도 아래 주어지는 개인적이고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이 성령은 기도하는 중에도 주어지고, 찬양을 부르는 중에도, 그리고 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도 주어집니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원치 않는 중에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성령은 인류사회를 컨트롤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 성령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성령은 어떤 형태로 주어질까요?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뜨거운 성령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임한 성령은 빛과 말씀이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두번에 걸쳐 확실하게 음성으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따듯하고 포근한 위로의 성령도 있고, 봄비 처럼 우리를 적셔주는 성령도, 가뭄에 단비와 같은 성령도 있습니다. 또 죄를 회개하게 하는 성령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와 고난, 시련 역시 성령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하기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형태로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은 언제 임하실까요? 기도의 응답처럼 우리가 원할 때에 임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때에 임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왜 원할까요? 제 생각에 많은 분들이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또는 '나만 못받은 것 같아서' ' 내가 그래도 권사이고 장로인데'  이런 생각을 하신다고 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믿어왔던 신앙과 믿음이 흔들릴 때 더 그럴 수 있겠죠? 또 다른 경우는 내 삶의 변화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해서 일 겁니다. 막연한 변화를 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어떤 시험에 빠져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세상과의 싸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령은 임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을 바라신다면, 아마도 당신은 이미 성령의 체험 속에 있을 것입니다. 

넷째, 왜 성령을 주실까요?  온전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변화하라는 요구이신 것입니다. 잘못 나가고 있는 길을 돌이키거나, 지금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저앉지 않도록 힘을 주시려는 것일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니다가 성령을 체험했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에게는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울왕에게도 지도자가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임했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고 명하십니다. 

다섯째,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성령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꼭 불가능 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요엘서 2장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꿀 것입니다. 보통은 자녀들이 꿈을 꾸고, 아비들이 예언을 하는 것이 맞겠죠? 하나님의 영은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비들이 꿈을 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령은 이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노력으로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일이면, 성령이 하신 것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 같죠? 그러니 성령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십니다. 

여섯째,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찬양을 하면서 눈물이 나고, 기도를 하는데 몸이 뜨거워지고, 떨리고,  기도하면서 음성이 들리는 것 같고, 기도에 응답이 오고... 내가 경험한 것이 과연 성령일까? 저ㅇ말 성령이 오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인가? 도 판단하기 어려운데, 거기에다가 이건 혹시 사탄의 음성, 사탄의 역사가 아닐까 ? 하는 의심까지 더해지면 장말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복잡해 집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고 사이비 종교 교주가 되기도 하니까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소문난 사람,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보인다고 소문난 사람들 대부분이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함을 봅니다.  또 한가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흔히  회의를 하면서 목사님들이 "기도해 봤더니 성령님이 이렇게 인도하시더라." 고 하는 겁니다. 물론 성령님이 그렇게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나오면 평신도가 "나는 기도했더니 이렇게 응답하시던데요." 라고 말하기 어렵겠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들끼리 외의하면 의견 대립이 없겠구나. '내게 들린 음성이 성령의 인도하심인가?' 우선 기도해 봐야 합니다. 내게 들린 이 음성이 세상적인 것이냐? 내 옥심과 관계가 있는가? 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판단이 될 것이라 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는 일이 잘 안되는데, 목사가 되어 볼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이 "내 양을 먹이라!" 라는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이 만들어 낸 음성일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전문인으로, 사업가로 잘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양을 먹이라!" 라는 음성이 들리고, 이 음성이 계속해서 괴롭힌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영으 ㅣ음성을 듣고자 하면, 그 영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하십니다. 

 결론으로 가기 전에 지난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합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 그리고 그 뜨거웠던 성령의 역사를 보고 느낀 것을 간단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여의도 집회를 기억합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강권에 밀려 갔었겠지만, 저는 그 자리의 뜨거움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서로 사랑하라" 고 반복적으로 외치는 음성을 기억합니다. 물론 통역하신 김장환 목사님의 음성이었지만요. 75년 봄부터 기도원 이란 곳에 갔습니다. 오산리 기도원, 수원 칠보산 기도원, 삼각산 기도원, 가평의 한얼산 기도원, 경기도 광주 기도원 등에 끊임 없이 갔습니다. 보통 기도원에 가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금식에 실패한 기억도 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인데도, 힘들지 않게 금식을 마쳤습니다. 물도 안먹는 3박4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곱배기를 세 그릇 먹은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도원에서 방언이 터지는 것을 보고, 진동하고, 입신하는 것을 봤습니다. 가끔은 귀신도 보고, 견디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가끔 말씀드렸지만 고등학교 때 철야기도를 인도하면서 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하는 사람의 숫자를 세어 본 적이 있습니다. 스물두명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스무명이 방언 기도를 했습니다. 워낙 뜨겁게 기도했기 때문에 어른들도 꽤 참석하셨습니다. 네 시간 이상을 스트레이트로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이후에 고등부 교사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기도원에 갔고, 청년부 교사 때는 매달 한번 씩 정기적으로 가까운 광주 기도원에 청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기도하면서 뜨거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방언을 받은 아이들은 얼마간 은혜로움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그 체험은 한 때의 기억으로 남았을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때의 스물두명 중에 절반 이상이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신앙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한 교회에 방언 기도를 하시는 분이 몇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하시는 분도 계시겠죠?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눈치 보여서 사용하지 않는, 그런 은사라면 그것이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실제로 방언 기도 하시는 분들이 교회에 얼마나 은혜를 미치고 있는 지를 둘러보시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에 대해 정리해 보면서 저도 판단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겠죠? 경험에 의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제가 고3 때, 방학 때는 매주 금요일에 철야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보통 스물 몇명이 모여서 저녁 11시30분에 기도를 시작하면 새벽 4시 까지 스트레이트로 했습니다.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냐 하면, 한번은 강대상을 손바닥으로 계속 두드렸는데, 손바닥에 피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져서 강대상 위와 제 옷과 앞에 앉은 사람에게 까지 피가 분무 되듯이 뿌려졌습니다. 제 손바닥은 피부가 넓게 벗겨졌는데도 전혀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이 당시 저는 몇몇 아이들에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기도회에 세번만 들어오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구요. 저희 중고등부 백 여명 중에 아마도 30명 이상은 방언기도를 했고, 몇몇은 방언으로 찬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방언을 받아가는 과정을 많이 보고 알기에, 오늘 누가 방언 받을 것 같다고 에측하기도 했습니다. 방언을 받으며, 겁이 나고, 어리둥절 하고, 감격하는 모습들을 보며 저도 기뻤죠. 심지어 어른들도 참석해서 방언을 받으셨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당시 저희는 중학교 때부터 교사나 어른들 없이 기도원에 가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것이 교사나 교역자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 또래는 자발적으로 성령을 체험했고, 그것을 저희 후배들에게는 체계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해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뜨거운 기도회가 점차 줄었습니다. 뜨겁게 성령을 체험한 아이들이 쉽게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힘도 빠졌고, 대학을 가서 노느라 , 기도에 시간을 많이 쓰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 보다도 이게 맞느냐 하는 판단이 안선 것이 이유가 될 겁니다.   미국에 와서도 영어가 잘 안되지만 중고등부 교사를 했는데,  아이들과 함께 수련회도 가고, 부흥회도 가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두 명의 전도사가 있습니다. 한 전도사는 한국의 부흥강사 처럼 아이들을 기도시키는 전도사였는데,  아이들에게 성령을 체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뜨겁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또 한명의 전도사는 우리 교회에서 자라고, 우리 교회 전도사를 하는 아주 뛰어난 친구였는데, 수련회를 가서 아이들을 기도시키는데, 아이들이 성령을 체험할 분위기인데, 경험이 없어서 이를 알지 못하니까, 자꾸 기도를 끊어서 아이들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뜨거움을 이어가지 못하더군요. 아이들에게 성령을 체험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전도사를 보면서, 어드바이스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참았죠. 우리 교회 전도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기도회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  70년대에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던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중에 절반 이상이 다시금 그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말씀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1980년에 우리 교회 예배를 마치고, 가끔 여의도 순복음교회 5부 예배에 참석했었습니다. 예배 중에 많은 사람을 고치시는 그 기적의 현장은 지금도 저를 전률하게 합니다. 저는 가끔 조용기 목사님의 손에서 광선이 뻗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신비한 체험 보다는 말씀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결론은 '성령은 변화를 위한 것' 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령을 체험하면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도 변화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쌓여,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셨고그들은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 지 천년 만에 세상은 기독교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 저는  두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고둘째는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모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요.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성령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마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 모두에게 성령이 임했는데, 그 중의 일부만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삶에 바빠서 복음을 전파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 중 일부는 성령의 체험이 그냥 기억의 한 부분으로 끝날 수 있을 겁니다. 

성령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늘 근심 걱정으로 살아가고, 남과 대립하고, 욕하고 불평을 일삼으며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공격적인 것과 수비적인 것으로 나누어 봅니다. 물론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사랑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기뻐하는 등읭 것은 보통 내가 가끔이라도 마음 먹고 행하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온유, 오래 참음, 절제 같은 것은 내가 힘든 상황에서도 남에게 양보해야 하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도 대응하지 말아야 하고, 화가 나고, 억울해도 참고 불평하지 말아야 하고, 온갖 욕심이나, 본능을 계속적으로 참아 내야 하기에 수비적인 것이라 봅니다. 아무리 수비를 잘하더라도 실점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공격하시라고 권합니다. 우리에게 돈과 시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이 돈을 좋은 일에 다 써버리면, 우리는 돈 가지고 절제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시간이 많으면 걱정과 근심이 많아지고,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봉사하러 열심히 다니면, 기도해야 할 것도 많아지고,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나는 어떤 공격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생각하면 되겠죠? 대개는 나는 어떤 은사를 받았나? 에 대해 촛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은사를 받았나 하는 것보다, 받은 은사를 어떻게  쓰고 있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가정해 봅니다. 내가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이 교회와 사회에 무슨 은혜가 될까요? 오히려 통성기도 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크게 내서,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방해할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기도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교회에 기도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일을 맡은거죠. '교회에 가면 항상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권사님이 계시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있어서 은혜롭다.' 는 소리가 나오게 해야 하는 것이 방언 받은 분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은사가 있는 것 같다.' 는 생각이 들면, 교사를 하겠다고 자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을 맡아보면, 만족감도 있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노력하게 됩니다. 찬양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가대던, 찬양팀이던 자원해서 해봐야, 노력을 하게 되고, 힘든 일들이 생기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려고 하는 과저어에 생기는 어려움과 갈등은 참으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잘먹고 잘살기 위해 살다가 겪게되는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련 속에서 반드시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남들 다하는 것처럼 쉽게 보이는 이것 하나도 잘하려고 하면,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구나를 느끼셔야 합니다. 이러면서 내 은사를 키워나가고, 은혜를 베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네요. 그래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의 기본에는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는구나.' 라는 놀라움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셨구나.' 라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체험의 시작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됨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를 이렇게 맺으려 합니다. 서두에도 양해를 구했지만, 또 이렇게 사족을 다는 것은 글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능력이 안되는 탓이겠죠. 하지만,   쓰는 저는 쓰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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