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가 성령강림주일 이었기도 했지만, 성령에 대해 양로원에 계신 분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져서,, 지금까지 와는 다른 논조로 성령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 머리 속에 있었던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에 있던 성령에 대한 문구에 의거해서 성령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으며" 1930년에 만들어진 교리적 선언의 세번째 문항인데, 정확한 문구를 찾아서 쓰지 않고, 제 오래 된 기억을 떠올리며 써봤습니다.
혹시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성령이란 뜨겁게 역사하고, 초이성적인 현상도 보이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아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뜨거운 성령이었고, 제자들은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강림은 엄청난 위력으로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양로원 노인 분들에게 이제 이 성령의 역사를 잊어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변하고, 만병통치약 처럼 몸 안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 줄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양심 또는 이성 으로 자리잡아서 우리의 삶을 지도해 왔습니다. 내 안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회개하고, 성령의 힘으로 위안을 받고, 성력의 힘으로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맞다고 말입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몇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모태신앙을 가졌지만 국민학교 때까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기억이 없습니다. 교회 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더 생생합니다. 국민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과외 선생님의 권유로 간 오금중앙교회의 부흥회에서 뜨거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마루로 된 예배당의 맨 뒷쪽에서 조용히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데, 뒷쪽에서 바람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가슴 속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움이 느껴졌습니다. 한참 동안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로부터 제 삶이 교회와 함께 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 삼일 기도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서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1년 정도 혼자서 이 교회에 다니다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가족들과 함께 천호제일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 신앙의 밑바탕은 이곳에서 쌓았다고 할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중고등부 생활 5년 동안 토요 학생예배는 물론이고,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 뿐 아니라, 어른들의 금요 속회에도 참석했습니다. 봄방학을 포함해서 모든 방학에는 기도원에 갔고, 금요일 저녁에는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성령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73년에 있었던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여의도 광장 부흥회죠. 국민학교 6학년 여름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어머니가 강권하셔서 저와 한 누나가 여의도에 갔습니다. 서둘러 갔는데도 광장의 거의 끝부분에 앉을 수 밖에 없었고, 저는 광장 바깥쪽 경계에 세워진 철제 바리케이드 위에 앉아서 멀리 연단을 바라 봤습니다. 연단의 목사님들은 잘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였지만, 스피커가 저의 바로 뒤에 있었어서 아주 생생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영어로 한마디 하시면 김장환 목사님이 바로 통역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 때는 그 목사님이 김장환 목사님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침례교세계대회' 라는 큰 행사의 진행을 돕게 되었는데, 이때 김 목사님과 몇번의 미팅을 했는데, 뵙는 순간에 이분이 그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한국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고,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억나는 것은 그때의 분위기와 딱 한마디" Love each other !" "t서로 사랑하라 !" 라는말씀입니다. 제 기억에 한 3번 쯤 반복하셔서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한마디는 아직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그 시절에는 다른 교회들도 그랬겠지만, 제가 다닌 천호제일감리교회는 정말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 만큼 뜨거운 교회는 없었을 겁니다. 고등학교 때 저와 저희 학교 기독 써클 친구들 몇명이 천호지역 기독학생회를 만들어서 10개 교회 정도가 모임을 가졌고, 학교에서도 특활반을 기독학생회에 참여했습니다. 또 서머나회 라는 써클을 만들어서 5~6 교회의 아이들이 가 모였는데, 이들 중 어느 교회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희 교회는 뜨거웠습니다. 어른들도 뜨거웠지만, 저희 학생들이 훨씬 더 뜨거웠습니다. 특히 저보다 3년 선배부터 제 2년 후배까지가 아주 특별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생 끼리 기도원에 갔습니다. 저희들이 가던 기도원은 삼각산 기도원, 수원의 칠보산 기도원, 경기도 광주기도원, 가평의 한얼산 기도원, 그리고 오산리 순복음 금식기도원이었고, 1년에 최소 3군데의 기도원에 갔습니다. 보통 2박3일이나, 3박4일로 가서 대부분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중고등부 행사로도 1년에 2번은 갔지만, 이 때도 학생들이 준비하고, 기도회도 인도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뜨거움의 중심에는 제 1년 선배인 이성진 목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디ㅏ. 성진이 형은 중 3 때부터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또래에서 4명의 목사를 배출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후부터는 제가 주로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방학 때는 매주 금요일마다 철야기도회를 모였습니다. 보통 학생들 20여명에 어른들 서너분 정도가 함께 기도를 했는데, 11시30분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했습니다. 보통은 중간에 한번 쉬는 시간을 갖지만, 어떤 날은 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성진 목사가 불을 붙였고, 저의 때에 꽃을 피웠습니다. 제 2년 후배 때 까지는 뜨겁게 유지되었지만, 그 후로는 후배들 중에 기도회 인도자가 나오지 않아서 인지, 불꽃이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뜨거웠고, 얼마나 은사들이 쏟아졌나를 말씀드리면, 제가 어느 날 철야기도를 인도하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방언기도 하는 사람의 숫자를 세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를 제외하고 21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제 1년 후배 영석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방언기도를 하더군요. 당시 제가 철없이 얼마나 큰소리를 치고 다녔냐 하면. "내가 인도하는 철야기도회에 세번만 들어오면 다 방언의 은사를 받는다." 고 할 정도였습니다. 기도회를 많이 인도하다 보니,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느껴졌습니다. 은혜가 임박한 때가 느껴졌습니다. 그러면 등이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몸의 떨림이 제 손에 전달되고, 점차 진동하게 되고, 방언이 터지는 시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방언이 시작될 때, 혀가 굳어지면서 자기 의지 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놀라서 기도를 멈추기도 합니다. 저는 "겁내지 말고, 조금만 더 기도하면 돼! " 라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놀라울 정도로 몸이 뜨겁고,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니, 침도 쏟아집니다. 국적 불명의 방언들이 많지만, 가끔은 중국어 방언, 일본어 방언 처럼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하기도 합니다. 중국 방언을 하는 친구가 같이 기도할 때는 기도 도중에 웃음이 터져서 기도가 중단되기도 합니다. 방언으로 찬양을 하기도 합니다. 저희 동기나 일년 후배 여자 아이들 중에는 정말 기도의 포스가 대단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보통 한 교회에 한 두분 계시는 교회의 기도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권사님들 못지 않는 포스를 보이곤 했습니다. 방언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헬라어 방언을 자유자재로 하니 두세시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저희 학년의 어떤 여자 아이는 정말 드물게 방언을 통역하는 소위 통변의 은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은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제가 보는 앞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들리는 말로는 많은 아이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통역해주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몇번에 걸쳐서 하지 말 것을 권했었습니다. 당시 저는 통역의 은사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번 은혜롭다가도 한번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큰 문제라고 생각해서 말렸던 것 같습니다. 꽤 신중한 친구였기 때문에 안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 저는 조금은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어른들도 꽤 참석을 하시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속회에 참석하면 고등학생인 제가 인도를 했습니다. 당시 저희 교회 여자 집사님들은 물론이고, 저희 어머니 연배의 권사님들도 제게 반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목회자 대하듯이 하셨다고 할까요?
당시 저희 교회에는 대단한 권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강 희 권사님이신데, 귀신을 쫒아내는 데에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귀신과 대화하시는 등의 장면을 저는 강 권사님을 통해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널리 소문이 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강 권사님을 만나기만 해도 귀신들은 반응을 합니다. 위협도 하고, 제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원도 합니다. 가끔은 귀신을 쫓아내시고도 우울해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냥 놔둘걸 ! 금방 다른 귀신이 다시 들어올텐데, 더 나쁜 귀신이 들어오면 큰일인데..." 강 권사님도 저를 아주 각별하게 대하셨습니다. 저와 만나면 항상 다가와서 환하게 웃으시며 두 손을 잡으셨고, 가끔은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때도 제가 워낙 바쁜 척 하고 다녀서 제대로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딱 한번,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토요일에 옥상의 기도실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차가 많이 막혀서 시간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기도실 바로 밑이 청년부실 이었는데, 거기 있던 친구 병철이가 제 대신 권사님께 끌려 올라가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늦게 와서 청년부실에서 안절부절하며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머리며, 옷이 땀에 흠뻑 젖은 병철이가 먼저 내려왔습니다. 곧 이어서 권사님과 몇몇 분이 귀신들린 사람과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강 권사님은 제게 실패했다고 말씀하시고는 내려가셨습니다. 병철이 말에 의하면, 귀신 들린 분을 가운데 앉게하고 네 귀퉁이에 기도할 사람들에게 앉으라고 하셔서, 자기도 한 귀퉁이에 앉았는데, 권사님이 "다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말씀하셔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입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더랍니다. 소리를 내려고 하는데, 혀가 움직이지 않더랍니다. 갑자기 겁이 나는데, 눈물과 땀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정신이 없었답니다. 심지어 강 권사님도 한마디도 소리를 내지 못하시더랍니다. 엄청난 공포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 한 상태로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강 권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도하면 됩니다. " 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자기도 말을 할 수 있었답니다. 한참을 열심히 기도했는데, 귀신들린 사람은 아무 반응 없이 정신을 잃었답니다. 권사님 말씀 대로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 한번 더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제에 집중해야 하는데, 남기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 한국에서 고응부를 5~6년, 청년부를 7~8년 가르쳤습니다. 자료를 가지고 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기간을 따지다 보니, 정확치는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안되는 영어지만 담임 목사님이 강권하셔서 중고등부 교사를 7~8년 했습니다. 한 3년 쯤 되었을 때, 고응부 전도사로 아주 뛰어난 정 전도사가 부임했습니다. 본 교회 출신이고, 장로님의 아들이었는데, 이렇게 뛰어난 친구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기분 좋을 만큼 뛰어났습니다. 펜실배니아의 포코노에 있는 감리교 수양관으로 여름 수년회를 갔습니다. 3박4일의 수련회 기간 중에 저녁 예배 후에 기도회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을 주고, 아울러 성령을 체험하게 하려는 의도로 준비된 시간이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 저는 아이들의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20여년 만에 느껴보는 기운이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눈물 흘리며, 손을 들고, 소리 높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망설이다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고 있는 한 아이의 등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곧 뜨거운 체험을 할 수 있겠다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전도사에게 조금만 더 기도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려고 전도사를 쳐다봤는데, 전도사는 본인이 경험해 보지 못한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의사를 전달할 시간도 없이, 통성기도를 마치겠다고 하며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많이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하기에는 많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당시에 뉴저지에 한국에서 온 30대 후반의 전도사가 아이들에게 기도를 많이 시키고 몇명이 방언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들렸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를 채용할 때, 인터뷰를 하기도 해서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죠. 당시 제가 중고등부 부장을 몇년 간 맡으면서, 임원회에서 열심히 주장해서, 풀로 베니핏을 주는 풀 타임 중고등부 목회자 자리를 만들었었습니다. 미국 각지에서 꽤 많은 유쓰 그룹 목회자들이 지원을 했고, 먼 곳에 있는 분들에게는 항공료를 부담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때 인터뷰를 해 본 폴 전도사는 꽤 열정적으로 아이들에게 성령을 체험하게 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Pentecostal Church 를 중심으로 해서 1960~70년대에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뜨거움이 한국 교회에 전해졌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 교회에서 뜨거움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뜨거움 보다, 안정이 더 필요한 시기라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장황하게 성령에 대한 저의 체험을 이야기한 목적은, 이렇듯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좀더 나아가 교회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가장 열심을 냈던 1979년에, 우리 교회는 중고등부 출석인원 100명, 청년부 30명, 성인 출석인원 350명 정도의 꽤 오래 된 감리교회 였습니다. 당시 고등부와 청년부에서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은 40 여명 이었고, 성인들 중에 방언기도를 하시는 분은 10명 미만이었습니다. 그후 10년 정도 지난 1990년에 우리 교회에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십여 명에 불과했고, 교회 어디에서도 뜨거운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방언 기도를 하는 분들도, 방언 기도를 했던 분이라고 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 2~3년 후배들 중에 방언기도를 하던 아이들 중에 거의 80%가 아예 기독교를 등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시기가 한국교회의 전성기 였습니다. 통계 마다 다르지만 줄잡아 전체 인구 중 개신교가 18%, 천주교가 5% 를 차지 했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러 왔고,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룬 사람들은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당시 한국 교계를 이끌던 초대형 교회들은 뜨거운 성령으로 타오르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광림교회와 충현교회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변모되었고, 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여의도 침례교회, 강남중앙교회, 지구촌 교회 등을 가보면 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부흥집회 같은 예배에서 벗어나서, 말씀과 시스템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뜨거운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해서 오늘날의 세게를 만들었는데, 1970년대에 뜨거운 성령을 체험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당시 저보다 1년 선배 중에서 4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던 이성진 목사는 기도 인도에는 탁월한 달란트가 있었지만, 교회 운영과 말씀 선포에는 그다지 은사가 없었는지, 신학대학을 나오고 경기도의 작은 도시에서 작은 교회의 목사로 은퇴한 것 같고, 뜨겁게 기도하던 김영호 목사는 감신대를 나오고 미국에 유학 와서, 조지아에서 목회를 했는데, 활성화되지 못하고, 최근에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조용히 신앙생활하던 김종걸 목사는 침례교 신학대학 교수로 정년을 앞두고 있는데, 총장 선거에도 나가고, 책도 몇권 쓴 비교적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고, 뜨거운 기도와는 담을 쌓았다고 해도 좋을 이후천 목사는 감신대를 나오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협성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성공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 실명으로 이름을 대고, 제 나름대로 평가를 해도 될 만큼 친한 사이였어서 이해하실 것으로...)
뜨거운 성령과 기적의 체험.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바램이지만, 막상 겅험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 지는 의문입니다. 그렇게 뜨거웠던 저희 교회 학생회 중에서 저를 기준으로 3년 선배부터 2년 후배까지 약 150명, 그 중에서 방언기도를 했던 50명을 살펴 보면, 이 중에서 위에 언급한 네명의 목사 외에, 선배 중에 황의건 목사, 정병국 목사, 정웅진 목사, 그리고 동기 이승근 목사, 후배 중에 강원필 목사와 유충일 목사를 배출했습니다. 그 중 절반은 당시에 방언기도를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방언기도를 했던 40명 중에 절반 이상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니 기독교와 관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방언기도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더 교회에 남아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서는 어떠신가요?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방언 기도를 하시는 분들은 어떠신가요? 뜨거운 성령을 페험했다고 하시는 분, 아니면 여러분이 보시기에 뜨거운 성령을 체험했다고 여겨지시는 분들의 삶은 어떤가요? 성별되고, 본이 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혹시 여러분 중에도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갈구하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께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만져보고야 믿는 도마를 책망하신 에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본인이 체험한 성령의 뜨거운 체험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신가요? 그것은 여러분의 훈장이나, 상장이 아닙니다. 그 체험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변화되었는 지를 돌아보시고, 선물을 받고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아오고 있는 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몇년 간 밤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겼었습니다. 한번은 교어떤 분이 힘든 병에 걸리셔서 그 분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두 가지를 물으시더라구요. "네가 왜?" "내가 왜?" 저는 열심히 대답했습니다. 제가 왜 그 분의 삶에 관여하냐 하면, 저는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지금 너무 힘들어 보이고, 지금은 그분을 데려가실 때가 아니고...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하게 되더군요. 그 분을 낫게 하기 위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낫게 된다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한달 쯤 뒤에 그 분은 정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는 제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에 이와 유사한 일이 한번 더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신유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은사를 가지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능력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 은사 말고 다른 은사를 달라고 간구했었습니다. 다른 은사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유의 은사는 피한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받은 은사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함을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영주권과 비교해보죠. 영주권 가신 분들이 늘 하는 말들이 있죠? 없을 때는 그거 받으면 참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사아 받고나면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신분이 없는 사람에게 영주권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주권 믿지 말고, 나를 의지해라 고 말입니다. 신분이 없었을 때, 더 건실하게 살고, 더 하나님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영주권 받았다고 자랑하고 십지만, 그러고 다니면 우스운 사람이 되겠죠? 성령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저는 이글 서두에 언급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에 나온 성령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으며"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이 영혼을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혼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느끼고, 어떤 사람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줄째로 성령은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겁니다. 목적지를 알려주실 뿐 아니라, 순간 순간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의 위안이 되시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지키시기도 하십니다.
한번 더 부연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 안에 계신 하나님!" 하고 불러보세요. 반복해서 천천히 하나님을 불러보세요. 혹시 대답이 들리시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뜻에 부응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답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잡념, 걱정, 두려움... 그래도 오래지 않아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어디서 들리시나요? 하늘에서? 저는 수시로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어디서 들리는 지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더군요. 잠시 생각해 보니, 내 안에 있는 성령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처럼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명하십겁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져라. 기쁘고 즐겁게 살아라. 주위와 반목하지 말고, 화평하며 살아라.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라. 항상 선한 마음으로 살아라. 하나님과 부모에게 충성하며 살아라. 온우한 사람이 되거라. 오래도록, 아니 끝까지 참거라. 그리고 자제하며, 절제하며 살거라.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받으면 따라오는 선물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힘들지만 충실히 따를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성령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런 기적 같은 은사를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의 은사를 깨닫고, 이 받은 달란트를 잘 개발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울리 모두에게 달란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달란트는 평생 살아가는 데에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더 벌어들이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될 것이고, 또 그것을 과신해서도 안됩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달란트를 사용해서 크게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고, 뭔가를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두러움과 염려를 없애주고 큰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저는 이를 '보혜사 성령' 이라고 하려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적용되는 성령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중에 내 중심에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 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이땅에 오면서 부터 우리 모두에게 이 영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부디하루에 수십번 씩 대하를 시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이견이 많은 주제인데다가, 제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쓰여져서 계속 갈등을 하며 썼습니다. 성령강림 후 첫주일에 시작해서 21주간을 썼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이롭게만 각용하시글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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