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5일 월요일

(교)예지예정론과 자유의지론

자유의지론과 예지예정론? 어려서부터 감리교에서 자란 저는 무조건 자유의지론이 맞다고 쇄뇌되어 왔습니다. 많은 수의 감리교인들이 예정론을 아주 한심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 수많은 장로교인들은 다 바보인가요? 그렇게 쉽게 반박할 수 있는, 틀린 내용을 가지고, 예지예정론을 주장할까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의 시작과 끝은 이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 당연히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얘기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관계 없이 미래가 결정되어지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요나의 예를 들던지, 바울의 예를 들던지, 대부분의 성서상의 위인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인생이 변화되고, 전개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대로 같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 이야기나, 몇몇 성경상의 예언들이 예정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하나 같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또 그 많은 예언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성서상의 예언들이 예정론을 반박하는 증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 중에 누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정해져 있다면, 좋으시겠어요? 우리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노력이 인생의 결과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좋으시겠냐구요? 저는 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인간의 미래가 정해져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판 유다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파는 것을 전제로 태어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말대로, 유다야 말로 정말 힘들게 태어난 목적을 잘 이루고 죽은 것 아닌가요? 욕을 먹을 것을 뻔히 알고도, 순종했으니 참 고귀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고, 당연히 천국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에게 “수고해라! 아버지 뜻을 이루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유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분명히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도구로 사용되던, 나쁜 도구로 사용되던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본인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 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 질 사람은 바로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모두가 미리 예정된 것이라면, 아무도 자신의 인생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 질 필요가 없겠지요! 혹시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오로지 기도만 하고 있겠지요!

‘예지’ 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선택과 그 선택을 하게된 동기를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가끔 개입하시기도 하지만, 이 개입 역시 우리에게 힘과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법칙으로 할 수 없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법칙은 완전무결합니다. 더이상 어떤 초자연적인 개입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원칙을 알려주시길 원하시지만,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 맞추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정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정하실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모르신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미래도 모르냐? 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 결과는 그분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의 삶을 ‘해피엔딩’ 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주 드물게는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다. 아니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태어나자 마자 죽는 아이의 경우가 이렇겠지요? 그 아이는 육체적으로 선택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 아이의 영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전생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지? 여기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예지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논쟁을 통해서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논쟁을 무한하게 끌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글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의 여러분을 위한 글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자리에 포지셔닝 되어있던 간에, 하나님께 칭찬 받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지금의 그 자리에서, 예정되어 있는 것보다 조금 이라도 나은 선택을 하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논쟁을 끌어낸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조금이라도 더…

댓글 2개:

Ike :

사랑의 실천을 위한 여러 상황들과 조건들을 만들어 주신 것, 또는 그러한 상황을 경험하도록 예정된 육체를 선택하게 하신 것을 예지나 예정이라고 한다면 그 예정된 각각의 상황에서 주에 영광을 돌리는 사랑의 결정을 내릴 지 아니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악의 결정을 내릴 지 결정할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길을 예비해주신 것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결국 우리에 대한 주의 사랑일테구요...

SYK :

귀한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공감하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