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4일 토요일

우리에게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지 !

작년 쯤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가, 경험 없이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이 우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청소년시절을 보낸 천호동이란 동네는 워낙 드센 곳이었고, 저는 자존심에 목숨을 걸고 살았기에, 대립각을 세우고 지내던 敵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고3을 거의 마친 겨울의 어느 토요일 밤, 제 친구 한명과 동네에서 가장 번화한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느라, 제 친구가 저보다 한참을 앞서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저를 의도한 저의 적들에게 제 친구가 몇대 맞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뛰어갈 수도 있었지만, 국면이 너무 불리했습니다. 저는 모른 척하고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더 하고 있었고, 저의 적들은 그런 저의 마음을 아는 냥, 제 친구를 따귀 몇대 때리고 보내고는 제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음을 추스리고 제 친구의 일을 못본척하며, 마주 걸어갔죠. 조소를 띠우며 저를 향해 오더니, "비영신!" 이라고 제가 살짝들릴 정도로 말하며 지나갔습니다. 물론 제게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명확히 들렸죠. 그렇지만 저는 아무 반응도 취하지 못했고, 맞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제 친구에게 가서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라고 모르는 척하며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친구는 "모르겠어. 저 깡패 새끼들이 부딪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지랄을 하더라고..." 라고 말했습니다.그날 밤에 화가 나고, 열이 뻗쳐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저는 칼을 품고, 그들이 있을 만한 곳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사고를 칠 용기도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저의 의도를 직감한 그들이 저를 피했고, 저는 그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그날의 비겁했던 경험이 저를 용감한, 아니 어쩌면 무모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다시는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때, 농구 써클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동기 9명, 선배 2명, 후배 4명으로 시작했죠. 저는 1982년부터 10년간 '독제' 소리를 들을 만큼 주도적으로 써클을 운영했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써클로 잘 성장했습니다. 1993년 경부터 주도권을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띠엄띠엄 나가다가, 사업이 힘들어진 96년부터는 아예 발길을 끊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제 동기 몇몇과 한 선배가 저를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워낙 주도적으로 운영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군림하다시피 했고, 가끔은 다른 멤버들을 윽박질러서 일을 처리한 적도 있었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에게는 감정을 샀을 수도 있겠구나! 어느 정도 후유증은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보아 넘겼습니다. 2년 쯤 지난 어느날, 제 바로 밑 후배 한명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 아무리 바빠도 서너달에 한번 씩은 써클 모임에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이유를 물었더니, 후배는 저를 중상모략하는 제 동기와 선배들의 말이 너무 빈번하고, 심해져서, 어제 모임에서는 급기야 저를 욕하는 제 동기들과 후배들 간에 다툼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보니, 당시 한국에 있던 모든 동기와 선배가 저를 욕하고 비난하고 있었더군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써클모임에 가서 들러엎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방 답이 나오더군요. 오히려 제 동기와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지난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큰소리 치는 만큼 써클에 열심도 내고, 지원도 할 것이니, 저만 나쁜 놈이 되면, 다른 것은 다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제 젊은 날의 열과 성이 깃들어 있는 써클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16년간 한번도 가지 않았고, 홈페이지에도 단 한자의 글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경험이 저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으로 남을 윽박지르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가능하면 모임이나 단체에서 주도하기 보다는 뒤에서 써포트하려고 노력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남의 앞에 서는 것을 겁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빛이 나는 자리보다는, 꾸준히 소금의 역할을 하는 자리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른살이 되기까지 아파서 드러누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물네살 때 쯤인가? 대학원을 다닐 때인데, 써클 후배들의 기강이 헤이해졌다고 판단하여, 아침 6시까지 전원 운동장에 집합하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나올 것으로 생각한 후배 한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화가 났죠. 오후 1시 쯤 되어서 그 후배가 부시시한 모습으로 제게 왔습니다. 몸살이 걸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두들겨 팼습니다. 그 후배와 다른 후배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저를 말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7~8년 정도가 흘렀을 때, 제가 처음으로 몸살이 걸려서 아주 중요한 아침 미팅을 참석하지 못한 일이 생겼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바로 그 후배에게 전화했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며 사과를 했죠. 워낙 사람 좋은 후배는 그 당시 맞으면서 참 황당했었지만, 제게 한올의 나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후로는 몸살이 걸려서, 독감에 걸려서, 어디어디가 아파서, 라고 하는 남의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경험해보지 않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십사년 간 사업을 운영했었습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 십사년 간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내가 어떤 잘못을 했나? 를 찾아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상황들이, 내가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결정을, 같은 행위를 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두가지의 확실한 잘못이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한가지는 1992년에 중국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의도가 좋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투자 초기였고, 제가 중국을 몇년간 드나들었기 때문에 비교적 용이하게 외부자금을 투자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저희 자체 투자금은 공장설비와 초기 원재료 구입 과정에서 전액 회수할 수 있도록 사업이 기획되어 있었고, 중국 측의 합의까지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기에 저희 회사의 거의 모든 멤버들이 다 반대한 중국 공장설립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투자 초기에 삐걱거림이 있었으나, 잘 조정이 되었고, 이제 앉아서 돈만 세면 된다고 해도 좋을 시점에 IMF 가 와서 공장 문을 닫고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의도가 불손한 사업은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잘못은 저의 한국에서의 거의 마지막 사업이라 할 수 있는 택배회사를 운영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제가 만든 택배회사의 최대투자자인 한 선배와 저희 회사 분류쎈터를 맡고 있던 제 친구가 손을 잡고, 저를 kick-out 했습니다. 모든 지분과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부채, 채무, 각종 인적보증을 면하는 것으로 하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이때 같이 임원으로 있던 후배 한명이 저를 따라 회사를 나오면서, 본인이 투자를 유치할테니 동종의 회사를 다시 설립하여 경쟁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후배와 함께 새로이 회사를 셋업하여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이전 회사를 추월했습니다. 하지만 두 회사가 경쟁을 하기에는, 시장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두 회사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내몰은 선배로부터 제의가 있었습니다. 두 회사를 하나로 합치면 상당한 씨너지가 생겨서 모두가 충분히 향유하고도 남을 것이니, 50대50으로 합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답니다. 저의 트레이드 마크가 포용력이라고들 해왔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그 선배에게 밝히기도 챙피할 정도의 폭언과 욕설을 퍼붓고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는 악의적인 경쟁으로 이어졌고, 두 회사 모두의 도산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을 위해서 그 선배가 힘들게 꺼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저의 지나친 자신감과 앵거 컨트롤의 실패가 저 뿐아니라, 수십명, 아니 수백명에게 큰 피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 두가지 잘못의 경험을 통해서 저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저의 의도' 를 되짚어 봅니다. '나쁜 의도' 를 가지고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제 감정 때문에, 단체나 모임 또 어떤 개인에게 피해가 갈 행위를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합니다. 다수를 위해서 제 감정을 컨트롤 합니다.

왠만해선 시기 질투하는 성격이 아닌데, 미국에 와서 정말 시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람에게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몇번을 반성하고 마음을 새롭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그 사람에 관해서는  시기심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군가 그 사람을 욕하고, 안좋게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자신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고, 급기야 괴로워졌습니다. 몇년 간을 그렇게 지내다가, 한 2년 전 쯤에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거의 남을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와 동업을 하셔서, 최근 몇년간 동거동락하시는 분께서 얼마 전에 "김권사는 시기심은 전혀 없는 사람인 것 같아." 라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경험이 저를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 것입니다.

제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받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런 후에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맞습니다! 저는. 제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정죄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죄의 짐이 다시 저를 억눌렀겠죠? 힘이 들고, 괴로워하다가, 예수님의 그 비유가 생각이 나서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도 변화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고로, 다시 감옥에 갇히고 나면, 그 경험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실 이글을 쓰면서 의도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것입니다. 교인들 간에, 또 파벌 간에 꽤 큰 갈등과 골이, 상처가 있습니다. 기도로, 용서로 풀어보려 해지만,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서인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즐겁지 못하고, 상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험을 껴앉자!" 

과거의 좋았던 관계에서 양립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현재의 괴로운 상황까지를 잘 되짚어 보고, 이를 하나로 묶어서,

"내 생긴 모습, 내 의지대로 이렇게 했더니, 결국 이런 상황이 되고, 이런 상황이 되고 나니, 회복할 수 없게 되더라."

 "하나님이 이 일에 직접 관계된 우리 모두와, 이 일을 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제 잠시 후면, 2년 동안 전심으로 연기한 우리의 퍼포먼스가 막을 내릴 것이다. 막이 내리고 나면, 모든 연기자들이 모여서 서로의 수고에 대해 격려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이 퍼포먼스를 통해 각자가 깊이 깨달은 경험이 우리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서로가 가까이에서 지켜봐주고, 격려해주자!"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와 우리 교회 교인들이 과연 이 퍼포먼스를 끝낼 수 있을까요? 기도해 주세요!

저도 지난 2년 간을 돌아 봅니다. 나는 어떤 연기자였는가? 혹 겉과 속이 다른 연기자 였을까?

경험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지난 모든 경험들이, 특히 아프고 괴로운 경험들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큰 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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