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면죄부와 십일조

면죄부는 중세 종교개혁의 촉발제가 되었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면죄부를 말도 안되는 황당한 것이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지성과 이성이 있었고, 신앙에 대한 판단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이 면죄부를 살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면죄부를 비난할 때, 여지 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끌어올린다." 라는 말이죠. 저는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믿고 면죄부를 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헌금과 십일조를 강조하는 어떤 목사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또 철저하게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헌금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면죄부에 대한 말들과 행위들도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면죄부는 고해성사의 일종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사제가 싸인해서 주었던 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번 사서 천국가는 표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은 죄를, 고해하는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로만 하는 회개보다 더 적극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행위이고, 구원을 위한 행위라고 강조했던 것이죠. 그 물질이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을 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면죄부를 샀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십일조는 과연 면죄부와 얼마나 다를까요? 모르긴 몰라도 십일조를 하는 신도들의 마음 속의 바램은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들의 마음도 면죄부 제도를 강조했던 로마교회의 마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구요.

오히려 면죄부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만 사는 것이었죠. 하지만 현대 기독교는 십일조를 강제하고 있습니다. 교회 직분을 맡으려면 반드시 십일조를 하는 지 체크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반대하는 교회는 이단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십일조를 반대하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종교개혁 주일을 지나면서 현재 우리 교회와 기독교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우리가 쉽게 비난하는 면죄부, 사제와 교회는 무오류하다는 주장...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서, 우리를 새롭게 하자는 마음에서 써봅니다. 이왕이면 남을 쉽게 비난하는 마음도 자제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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