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8일 일요일

봉사에 대하여

봉사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봉사란 한마디로 남을 섬기는 일입니다. 봉사라는 단어를 보면서 저는 우리 선조의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받들 奉 자와 일 事 자로 구성된 봉사는 글자 그대로 그 대상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영어의 Service 에도 serve 는 분명히 섬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들이 봉사에서 주로 쓰는 volunteer service 나 social service 에서 저는 섬긴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다행히 아주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봉사하며 살았기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겨울성경학교에서의 체험 이후로 매일 교회에 가지 않으면 이상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사찰 권사님이 하시는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만 가면 잠시도 편안하게 앉아있지 못하고,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병이 생긴 지, 40년이 넘은 셈입니다. '내 교회' 에서 참으로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일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와서 2003년 봄부터 뉴저지연합교회라는 곳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봉사를 해야겠는데, 여간 남의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이 하시는 봉사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튀지 않게 하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주차, 수송 그리고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조금 마음 놓고 봉사를 하게 되기까지 4~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후로는 또 내 교회 처럼 되었고, 교회에서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Tres Dias 라는 수련회에서 봉사를 했던 일에 대해서는 전에 언급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봉사란 무엇인지를 제게 가르쳐준 참으로 의미있는 봉사였습니다. 12번에 걸쳐 봉사하면서 수백명의 봉사자들을 접하게 되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섬기는 양로원에서 두주에 걸쳐서 봉사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만 먹고 있던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 을 만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봉사하실 분들을 위해 봉사에 관해 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이 그 정립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봉사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대상자를 받들어 섬기는 일' 이라 하겠습니다. 섬기는 마음과 자세가 핵심입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섬기는 마음, 이것이 없으면 그 행위는 자기 과시가 되거나 노동이 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이렇게 완전히 준비된 봉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봉사를 한다고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봉사를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몇가지 답을 제시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챤으로서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챤으로서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어떤사람들은 남을 돕는 마음이 많게 태어나서 할 수 밖에 없어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를 만족시키고, 적당히 드러내기 위해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체생활에 대한 매너로 이정도는 해야지 하는 도리나 의무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이 봐주기를 바라고 남이 볼 때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 칭찬받고, 상급받기 위해 합니다.

더 다양한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중에서 몇가지의 이유가 조합이 되어서 봉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 봉사를 하시고 계신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봉사의 이유도 변하고, 봉사의 모습도 변합니다. 모든 것을 단정하시고 평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본인의 봉사하는 이유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제가 의도하는 '어떻게?' 는 봉사의 의미에서 언급했던 사랑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과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습으로' 라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까울 수 있겠습니다. 봉사의 이유에 따른 봉사의 모습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은 뭐라고 꼬집을 것이 없을 만큼 잘하실 겁니다. 하지만 좋은 마음일 때, 즉 마음이 일어날 때만 봉사할 확률이 높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봉사하시는 분들도 첫째 이유와 비슷할 것으로 봅니다. 봉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명령 중에 하나일 뿐으로 마음은 먹지만 그다지 봉사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못할 확률이 큽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남까지 평가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성적으로 남을 돕는 마음이 많게 태어나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봉사하시는 분들은 참으로 복되게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이렇게 태어나신 분이 봉사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마음만 가지고 큰 실천을 행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가 의도한 어떤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봉사하시는 분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쌓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세상에서 봉사의 댓가를 이미 받았을 경우에는 더 그렇겠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이 소망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해, 주차봉사인가를 몇년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봉사를 했는지? 그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를 했는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요. 이렇게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당연히 봉사를 중단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아마 무척 화를 낼 겁니다.

자기 의를 만족시키고, 적당히 드러내기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 단체생활에 대한 매너로 이정도는 해야지 하는 분들은 거의 비슷한 한계에 빠질 것입니다. 대개는 자기의 봉사는 보이고, 남의 봉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지 못하시고 불평 속에 봉사를 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남이 봐주기를 바라고 남이 볼 때만 봉사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자신에게나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같이 봉사하시는 분을 힘들게, 시험에 빠지게 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남을 깍아내리고, 비방할 확률도 클 것입니다. 교회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께서 남의 뒷얘기를 많이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너무도 많이 봐왔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칭찬받고, 상급받기 위해 봉사하시는 분들. 이것이 바로 제가 권하려고 하는 봉사의 이유 입니다. 저는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바로 이런 목적으로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께서 바로 제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봉사하고 싶지는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우리에게 섬김의 이유를 확실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크고,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크고, 어디에서 으뜸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을 위해 이땅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달음박질 한다고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달음박질하는 목적, 방향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다른 어떤 이유 보다 하늘나라에서 칭찬받고, 상급받기 위해 봉사하자고 하는 것은 이 이유, 이 목표가 가장 큰 힘으로 우리로 봉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시간을 더하면 한시간 만큼 상급을 받고, 하루를 더하면 하루 만큼 더 칭찬을 받습니다. 그 상급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봉사를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제가 봉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항상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봉사는 의무가 아니고 권리이다." 입니다. 제가 3년 전에 썼던 글을 카피해 봅니다.

1998년의 어느 여름에 저는 당시 한국교회에서 붐이 일던 'Tres Dias' 라는 수련회 프로그램에 참가했었습니다. 한 이년 동안 제 친구가, 끊질기게 제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권했습니다. 꽤 많은 수련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저였기에, 제 친구의 권유에 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습니다. 너무 많은 거절을 했다고 느꼈던 어느 날, 저는 결국 참가를 약속하였고, 몇번을 미루다가 참가하였습니다.

강원도 화천, 산골짝에 있는 수양관으로 들어갔습니다. 3박4일의 프로그램이었지만, 저는 사실 3일째 되는 날에 미국출장을 가기로 계획했고,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저를 픽업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참가한다는 약속은 지키고, 도중에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한 것이었죠. 그런데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완벽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봉사자들의 헌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힘들게 미국출장을 이틀 미루면서 프로그램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내가 받은 봉사자들의 섬김의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봉사자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그해 겨울에 봉사자로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겁도 없이, "어떤 자리가 가장 힘든 자리냐!" 고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설겆이가 가장 힘들지!"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설겆이를 맡았습니다. 그것도 혼자서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경험 많은 봉사자들께서 처음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만류하셨지만, 결국은 제게 맡기셨습니다.

프로그램 참가자 120명, 봉사자 80명, 총 200명 분의 설겆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도 모르는 체 말입니다. 첫 설겆이는 먼저 와서 준비하는 봉사자 오십분 정도로 시작했습니다. 할만했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서 2백인 분의 그릇을 꺼내어 공급하는데, 여태까지 치루어보지 않았던 최대규모의 행사가 된 관계로 그릇이 부족했습니다. 총 1백오십명 정도를 치룰 수 있느 그릇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녁을 먹는 중간부터 최대 속도로 설겆이를 해서 오십명 분을 더 만들어 내야했습니다. 7시도 못되어서 시작한 저녁 설겆이를 자정을 넘어서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데, 봉사자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봉사자들 밤참 먹게 그릇을 꺼내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1시부터 2시까지 평가를 하며 전체 봉사자 중에 약 오십분 정도가 밤참을 드셨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이 밤참을 드시는 순간에도 저는 설겆이를 해야 했습니다. 밤참 드신 설겆이까지 마쳤을 때, 시간을 새벽 4시를 넘었습니다. 다른 봉사자들도 3시간 정도를 자고 새벽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이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한시간도 못자고 새벽기도회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7시부터 다시 시작된 설겆이는 거의 밥먹을 시간도 갖지 못한 체,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설겆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화 속의 양말에서 물이 찌꺽거릴 정도로 땀이 났습니다. 손과 발이 물에 불어 감각이 없어졌고, 손가락 마디 마디에 힘이 빠져서 그릇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지쳤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저도 오기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써도 될 것 같은 그릇을 쓰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속에서는 화가 끓어 넘치는데,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둘째 날은 그래도 전날 보다 1시간 일찍 끝난 관계로 2시간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만, 과장 없는 실제이고, 저는 이 정도까지는 버틸 정도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날 아침에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몸이 뇌의 명령을 잘 안듣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온 몸 마디마디가 다 아팠습니다. 점심 먹은 설겆이를 할 때 쯤에는, 앉아있는 것도 힘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더군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가 일었습니다. 저녁 먹은 설겆이가 나왔습니다. 제 마음 속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나요?" 하나님은 아주 쉽게 대답하시더군요. "누가 너 더러 그일 해달라고 했느냐? 하기 싫으면 하지 말렴!" 저는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거 안하면 어떻게 하라구요? 내일 아침에 전부 굶으라구요!" 하나님께선 또 쉽게 대답하였습니다. "너 안해도 할 사람 많아! 못믿겠으면 시험해 보던지?" 저는 "그래요. 그럼 한번 시험해보죠!" 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밤참 먹을 때, 사용할 그릇 만을 설겆이해 놓고, 모든 설겆이 거리를 몇개의 다라이에 넣고 잘 덮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습니다. 밤참 먹은 설겆이까지 얹어놓은 후, 다른 봉사자들이 모두 취침하기를 기다려서 설겆이 거리들을 다시 확인한 후, 잠을 청했습니다. 결과가 궁금해서 당연히 잠을 이루지 못할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들었는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기상시간까지 조금 넘겨서 일어났습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얼른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생각하며 도착했을 때, 여자 집사님 네분이 거의 설겆이를 마무리해 놓고 계셨습니다. 네 분 모두 저를 향해 정말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셨습니다. "김 권사님! 너무 피곤하셨죠? 저희들이 좀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 상상치 못한 장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시며 웃으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당연한 결말이겠지만, 저는 하나님께 완전히 KO 당했습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내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

그 순간부터 그 분노의 설겆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세요? 그릇 하나 더 달라고 오시는 분이 너무 반가왔습니다. 오히려 접시나 공기를 들고 식사를 하는 Hall 로 나가서 덜어서 드시라고 하고, 새그릇으로 바꿔서 드시라고 하며... 설겆이 꺼리를 더 만들었습니다. 봉사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였고, 상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제게 일거리가 주어지는 것이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Tres Dias 봉사를 열두번을 계속했습니다. 그 중에 주방장을 맡았던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설겆이 파트에서 봉사했습니다. 혼자해도 즐거웠고, 다른 분과 같이 해도 즐거웠습니다. 주로 혼자서 했지만 백오십명 이하의 설겆이는 웃으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설겆이 하면서도 틈틈이 다른 봉사자들의 봉사현장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힘들어 하는 봉사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끔은 제가 전에 느꼈던 것과 유사한 분노를 느끼고 계시는 봉사자도 눈에 띱니다. 저는 얼른 그분에게 다가가 정말 힘든 일을 맡으셨군요 하고 치하하며 잠시라도 돕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풀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봅니다. 당시 제 안에 분노가 넘치는 것을 경험 많은 봉사자들은 다 느낄 수 있었을텐데, 왜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스스로 답을 냅니다. "그것은 내게 정말 큰 선물이었다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봉사가 몸에 밴 사람이지만, 이후로 봉사가 더욱 즐거워졌습니다. 주변에 봉사를 하시면서 힘들어 하시는 분이나, 자기만 힘들게 봉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자기 의' 로 봉사하시는 분들이라고 하죠.  또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봉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기 의로 하시는 봉사나, 성격 때문에 하시는 봉사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 한계로 밀어넣으실 때, 그 순간을, 그 기회를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봉사하면서 깨달음을 갖게 된 봉사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일화의 주제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봉사하지는 못한다." 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Englewood 라는 흑인과 스패니쉬들이 꽤 많이 사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던 아이들은 9학년 아이들이었는데, 한국 아이들 치고는 꽤 농구를 잘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코트에서 농구를 열심히 하다가도, 흑인 아이들이 농구를 하러 오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코트를 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를 내보았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체육관이 있었는데, 이 체육관으로 동네 흑인아이들을 불러들이면 눌려지내는 우리 아이들이 조금은 대등하게 함께 농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지역사회를 위한 Outreach 로 금요일 저녁에 교회에 있는 체육관을 개방했습니다. 한명 두명 모여 든 아이들이 몇개월 지나지 않아, 한국 아이들 10명 정도에 동네 흑인과 스패니쉬 아이들 2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의도한 바대로 우리 아이들이 잘해주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꽤 친밀해지기도 했구요. 한 2년 쯤 지나자 주축이었던 한국 아이들은 대학준비로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게 되고, 한국 후배 아이들 중에 농구를 잘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지자, 농구 코트는 동네 아이들 만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3년 가까이 농구를 했습니다. 게중에 위험한 아이들도 있어서 체육관에는 항상 3명 정도의 경찰들이 씨큐리티를 맡아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잘지냈고, 아이들은 저를 코치라고 부르며 잘따라주었습니다. 어느새 커뮤니티를 위한 진정한 아웃리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걷어차도, 꼴밤을 때려도 다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까불기만 하는 아이들이 가끔은 경찰들에게도 살벌하게 대들어 경찰들을 긴장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더 사랑하자! 더 섬기자! 하고 다짐해보곤 했습니다. 저의 삐뚜른 의도 조차도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 진정한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의 의미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일화도 우리에게 봉사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큰 뜻을 품은 마더 테레사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수녀로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성마리아 학교라는 곳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고, 교장이 됩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일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정을 가는 기차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도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2년간의 준비를 한 후에, 수녀복을 벗고 캘커타 외곽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갑니다. 수녀로서 존경받는 교육자로서 편안하게 마칠 수 있었던 삶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삶으로, 빈민들을 위한 기초간호학을 배우고 떠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마더' 가 됩니다.

하지만, 그녀 자신으로서는 안타까울 수 있는 것이 그녀가 노벨평화상을 포함해서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큰 상들을 거의 다 받았고, 또 어디서나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이 받으면 하늘나라에 쌓이는 것이 없는 하나님의 원칙에 비추어 보면 그녀의 상은 그다지 쌓이지 않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들어 쓰셔서 세상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봉사하게 했지만, 정작 그녀의 상급은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논리라면 한가지 가능성이 더 있긴 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대접을 받길 정말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경우이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이 '자기 희생' 이었다면 그녀는 정말 영생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봉사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가 마르다 입니다. 누가복음 10장40~42절을 써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동생이 나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 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저는 함께 봉사하시는 분들과 이야기하곤 합니다. "우린 마르다 과라서..." 저는 마리아 처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남들이 보면 수고가 많다고 하지만, 저는 더 편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으신 후에 마르다는 변화했을 것이라 봅니다. 마르다의 깨달음, 마르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의 봉사는 많은 봉사자들의 본이 됩니다. 우리는 좋은 편을 택하면 되고,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을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놔두면 됩니다.

가정에서의 봉사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잘섬기는 경우, 남편은 복을 받겠지만, 섬김을 받기만 하는 부인은 어떻게 될까요 ? 세상적으로 볼 때, 좋은 부인을 만났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섬김을 받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이 나옵니다. 양처는 나에게 해가 되고, 악처가 도리어 나에게 복이 되는 아이러니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관계가 어느 한사람만 복을 받을 수 있는 Zero-Sum Game 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서로 섬길 수도 있고, 또 밖에서 봉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의 바램은 이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복을 받는 것이죠. 많은 설교자들이 이렇게 두가지 복을 다 받으시라고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이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파악하고, 계량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땅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안하게 살다가고 싶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고려할 때, 이것은 헛된 바램일 뿐아니라, 큰일 날 바램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을 맞게 됩니다. 이것이 공평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강조하는 깨달아야 할 것, 즉 내게 다가올 괴로운 고통의 시간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힘이 들고, 괴로운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힘든 봉사일 수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쌓입니다. 힘들게 봉사하는 사람에게 괴로움과 시련의 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남는 장사입니까? 깨닫지 못하고 그냥 살다보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우리에게 당연히 다가옵니다. 이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그 시기를 잘 넘기면 그나마 인생에 있어 큰 성장이 있겠지만, 대부분 힘들다가 시간이 해결해 주기 때문에, 힘만 들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쌓이는 것은 당연히 없겠지요. 그런데 깨달아서 미리 힘들게 봉사하면 내 개인적인 삶에 시련과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지도 않을 뿐더러, 하늘나라에 큰 복을 쌓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봉사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봉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아니,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강제적으로라도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봉사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끔 이슈가 되는 것이 하기 쉬운 봉사를 하느냐? 하기 힘든 봉사를 하느냐? 입니다. 힘든 봉사가 더 많은 상을 쌓을 것이니 힘든 봉사를 하면 좋겠지요. 하지만, 자기의 달란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와 맞지 않기 때문에 힘든 일을 찾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전제를 하나 드립니다. 봉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든 봉사를 하면서 기쁨으로 할 수 없으면, 웃으면서 기쁘게 할 수 있는 봉사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받으며 더 힘든 봉사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자기와 맞는 봉사가 무엇일까? 에 대해서는 쉬운 봉사와 힘든 봉사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재능과 나의 시간과 나의 재물로 섬긴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으로,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그리고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재물로 섬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쉬운 섬김일 경우에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은, 즉 하늘 나라에 상을 많이 쌓는 섬김은 이 세가지를 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억만장자가 돈만으로 섬길 때, 그다지 은혜롭지 못합니다. 시간이 정말 없는 사람이 그 시간을 쪼개서 섬기며 짓는 미소가, 몸이 허약한 사람이 육체노동으로 섬기며 땀을 뻘뻘흘리는 가운데 짓는 미소가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혼자하기 어려운 것이 힘든 봉사입니다. 서로 알아주고, 위로가 되는 동역자는 우리의 섬김의 삶에서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혼자 잘되는 꿈 보다, 함께 잘되는 꿈을 꾸었으면 합니다. 함께하므로 우리는 더 큰 꿈을 꿀 수 있을 것입니다. 내 한시간의 도움, 아니 내 한마디의 말이 위대한 섬김의 사역의 결정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여건이 빨리 마련되기를 기대하며 노력하고자 합니다.

*** 봉사에 대해 생각해 온 것이 많은 데다가, 이 글이 제가 만드는 봉사단체의 기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중력이 떨어져서 정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선 게재하지만, 몇차례 수정과 보충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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