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4일 화요일

욕망를 주신 하나님

머리 속에는 주제가 있는데, 막상 제목을 정하기가 어렵네요. 우선 제목을 잡아봤는데, 글 내용이 제목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 것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담배를 수십, 수백번 끊었다고 할 정도로 담배를 끊기 어려워 하시는데, 또 어떤 분들은 너무도 쉽게 마음 먹으니까 끊어졌다고 하십니다. 담배를 쉽게 끊으신 분들 중에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30년 피운 담배도 끊었는데 뭐는 못하겠어?" 마치 담배 하나 끊은 것 가지고, 자신의 모든 욕구를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면밀하게 관찰해보면 그렇게 큰소리 칠만한 상황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아킬레스 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크리스챤으로서 저의 최대의 갈등은 자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매주일 철야기도를 하면서 지내던 제가 자위를 끊지 못했던 겁니다. 제 기억에 가장 오래 참은 것이 두달 쯤 참은 것일 겁니다. 회개하고 자위하고, 어떤 날은 눈물로 회개기도를 하고 가서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 제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가끔은 회개 기도를 하는 중간에 '내가 이렇게 회개하지만 나는 다시 이 죄를 지을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괴감과 비참함에 사로잡혀  회개 조차 하지 않았던 기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다 보니, 당시 제 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저는 친구들에게 "자위를 끊느냐? 회개를 끊느냐? 자위를 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위를 끊지 못한다고 해서 회개를 끊어서는 안된다." 라고 늠름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왜 아이러니라는 말을 썼냐 하면, 제가 친구들 보다 더 힘들어 하고 있고, 더 좌절하면서도 막상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마치 나는 극복한 사람인냥 이야기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제가 느끼기에 분명히 제 이야기는 제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 회개를 끊지는 않았고, 결국은 그 시기가 지나면서 저를 절망에 이르게 했던 자위를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이기지 못할 욕망이 수시로 생겨납니다. 남의 흉을 보고, 남을 판단하는 욕구도 참지 못하는 욕구 중 하나입니다. 같은 교회 교인 중에서도 이상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도박을 참지 못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게임을 참지 못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운전하면서 템퍼를 참으려고 노력해도 안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TV 드라마를 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계속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가 드라마 끊는 이야기를 하면, "아니 왜 드라마를 끊어? 뭐가 나쁘다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끊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끊을 이유가 없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끝까지 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욕망과 싸우면서 깨닫게 되는 한가지는  나는 욕망을 이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이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욕구가 강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금으로서의 제 대답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욕구가 강해서 그것에 빠져서 허덕이고 괴로워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면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왜 욕구를 참느냐는 것입니다. 욕구를 참는 이유가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면 우리는 이미 축복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드라마를 끊으려는 이유가 시간을 아껴서 선한 일에 힘쓰려는 것이라면 저는 축복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욕구와 싸우다가 자주 쓰러지고 힘들어 하시는 분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죄인 임을 고백하게 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쉽고, 또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확률도 높아질 겁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 라고 자복하는 것은 아마도 날마다 지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오히려 사도 바울은 겸손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설 수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욕구 또는 욕망과 갈등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갈등한다는 것 자체가 육체가 가진 욕망과 욕구를 따라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머무르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갈등 자체가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살기 원하여 생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축복받는 삶에 발을 디디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 을 시작한 것이죠. 하루 만에 승리할 수 있는 싸움도 있고, 수년 간에 걸쳐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싸움도 있을 겁니다. 이상한 질문일 수 있지만, 어떤 싸움이 우리에게 더 은혜가 될까요?

사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 계속적으로 나를 치는 싸움터로 돌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욕구, 욕망은 어떤 상대보다도 더 이기기 어려운 상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욕구가 강해서 항상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 여러분의 괴로움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시고, 감사하면서 그 갈등을 진정한 싸움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싸움 자체가 축복이기에, 내가 이기기 어려운 욕망과 욕구를 가진 것이 오히려 나의 축복 임을 생각하시며...

** 욕구와 욕망이란 단어를 섞어서 썼는데, 둘 사이에 구별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냥 쓰기에 좀더 편안한 단어를 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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