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3일 월요일

용서에 대하여

예수님은 '용서' 에 대해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하여야 할 용서는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용서' 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용서를 잘 살펴보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죠. "제발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답해 주십니다. "네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해주어라 !" 우리에게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그렇고, 가까운 친구, 직장 동료들이 그렇습니다. 한 교회의 형제들도 그렇구요. 우리의 용서를 위해서 우리는 아주 가까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많은 사람들을, 행위들을 반갑게 용서해야 겠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형제를 몇번까지 용서해야 하냐고? 예수님은 일곱번씩 일흔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끝이 없이 용서하라는 것이죠. 여기서 저는 형제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는 분명히 한 어머니나 한 아버지를 둔 육체적인 형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 5장22절부터 24절까지 네번이나 형제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 그리고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형제와 화목한 후에 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어떤 대상을 가리켜 형제 라고 표현했을까요? 특별하게 추론할 필요는 없지만, 나라를 잃고 4백년 동안 흩어져 살단 이스라엘 족속, 그 중에서 같은 지파 사람들 정도를 형제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여기서 형제 라는 표현을 이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둔, 하나님의 자녀가 된 크리스챤이라고. 그러니 가족이나 친구, 가까이에 있는 교인들은 우리의 용서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삶 전체를 구원받을 용서를 받았는데, 자기에게 사소한 피해를 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해 다시, 그것도 결산 때에 처벌을 받게 된 어리석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경계를 명하십니다. 혹시 내가 용서하지 못한 작은 것이 있는 지를 살펴보라 하십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면, 정말 감격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도 못갚을 빚이고, 가족과 자식에게 넘겨주게 될 빚일 것입니다. 그 빚을 탕감받았다면 평생을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탕감이 우리의 심판 날까지 유효하게 하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나와 이웃을 돌아보며 "혹시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나?"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귀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서는 이 용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겪는 반목과 대립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강단에서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용서하라고 설교하기 보다, 가서 용서를 빌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교회의 교인끼리 다툼이 있어서, 둘이서 반목하며 지내고 있다고 해보죠. 어느날 갑자기 한 교인이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내가 새벽기도 하는 중에 하나님이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내가 오늘부터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전화를 거신 분은 은혜 속에 큰 용기로 전화를 했지만, 이 전화를 받은 분은 기가 막힐 겁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적당히 대답을 하겠지만, 오히려 반목과 대립의 2라운드를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빌던, 용서해주던 간에 모든 용서의 결과는 화평이어야 합니다. 화평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용서는 제대로 된 용서가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지혜로워야 겠습니다. 영화 '밀양' 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용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 피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명확합니다.  잘못한 대로 그대로 보상해야 하고, 만약 보상할 수 없는 것이면 삶을 바쳐서 보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신 다는 용서와 세상에서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다가도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가서 풀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로서 우리는 내가 용서해줄 수 있는, 내가 탕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수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우리는 이 잘못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수시로 잘못을 저지르는 가족, 친척, 친구, 그리고 교인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져 있지만, 이 기회도 끝이 있습니다. 결산 때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한 치도 오차 없이 우리의 모든 행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은 용서받을 만한 때입니다. 용서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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