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0일 금요일

믿음이란?

기독교인에게 믿음 이란 단어는 정말 자주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고 막연한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믿음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저사람 믿음이 없어" "저사람은 참 믿음이 좋아" 라고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과연 믿음에 대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믿음에 대해 살펴 봄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써봅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 친구를 위해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린 친구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아들의 병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고 하시며 그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풍랑이 일어 흔들리는 뱃속에서 겁을 내며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고 하시며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해주십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고 예수께 묻자 "너희 믿음이 작은 연고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예수님이 믿음이란 단어를 쓰실 때 대부분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한 바를 행한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 를 표현했고, 때로는  '내가 간절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을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히브리서 11장1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이 구절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이 구절이 어럽습니다. 이 구절을 독특하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바라는 것' 과 '보이지 않는 것' 을 모두 천국이라고 해석하십니다. 그래서 '믿음' 이 천국에 가는 보증이고 증거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석하셔도 많은 분들에게 은혜를 끼치실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해석하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체로 만드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뤄내는 증거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믿으면 이루어진다." 라고요.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물론 제 독창적인 해석도 아니고, 정확히 해석할 능력도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보여주는 것' 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하늘나라라면 내 삶이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삶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죠. 또 '믿음은 내 안에 있어서 보여지지 않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 입니다. 내 안에 경건함이, 신실함이 있다면 내 삶을 보고 신실함과 경건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이뤄내는 도구가 아니라,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인가요? 아니면 그 밈음이 있으면 천국간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겠죠? 그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간 것,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것,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제단을 쌓은 것 등입니다.  그의 믿음은 지식이나 아는 것,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명령을 따르는 삶을 산 것' 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참 좋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예배 참석 잘하는 것, 기도 많이 하는 것, 봉사 많이 하는 것, 성경 지식이 많은 것,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 그리고 섬기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삶을 보는 것이죠. 그런데 저사람 믿음이 없어 라고 할 때, 그 믿음은 앞의 것과는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 새신자를 데려오면 묻곤 합니다. "저 분은 믿음이 있으신 분이신가요?"  이때의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았음을 믿는 분이신가요? 를 묻는 질문일 겁니다. 이는 기독교를 만들어 준 가장 근본적인 구별이니 묻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외에 교회에서는 믿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운영하시며, 나를 포함한 온 인류의 삶을 주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오류가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일체다.'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재림하신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 간다.' 등일 것입니다. 저는 진리와 교리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교파의 구별 없이 대부분의 기독교파가 이런 것들을 교리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어느 정도 나오신 분들은 이런 것들을 믿게 되면 "나는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으면,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주일 예배에만 나오다가 속회에 나가고, 수요예배와 찬양 모임에 나오고, 봉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게 되고, 중보기도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이 성장했다고 표현합니다. 모두가 거쳐야 할 과정이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해서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 받고, 교회와 기독교를 욕먹이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남의 믿음을 평가하고, 자신이 봉사를 안하면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믿음은 삶일진데, 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는 매일 무너지는 자신을 깨닫고 매일 회개하며, 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믿음에 대해 논의하면 꼭 우리는 흔히 "以信得義" 냐 ? "以行得義" 냐 ? 에 대한 논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 논쟁이 '믿음' 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음은 내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받았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대로 사는 것 까지가 믿음인 것입니다. 이신득의와 이행득의의 논쟁은 기독교에 뿌려놓은 사탄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받은 은혜와 행함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이 온갖 세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종교와 관계 없이도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가 내 삶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아니 최소한 갈등하게 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은혜 없이 사랑을 행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이도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착한 마음,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 마음이 큰 사람, 작은 사람 그리고 없는 사람들을 봅니다. 내가 가진 본성 만큼 베풀며 사는 것으로는 나도 변화시킬 수 없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힘으로 행하는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낮아져서 이웃을 섬기며,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 까지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잘 생각해 보고, 내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서 시작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변화해 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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