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0일 금요일

이제 다시 성경으로

저는 목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양로원 예배에서 설교를 6년 째 하고 있습니다. 대표기도 하는 것 보다 설교하는 것이 쉽다고 말할 정도로 설교하는 것이 부담이 없었는데, 작년 2019년은 설교가 너무 힘든 한해 였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설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를 너무 사랑해 주신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고, 새로운 젊은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이전 목사님에 대한 그리움이 새로 오신 목사님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져서 목사님의 설교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왜 저렇게 하시지? 나라면 더 잘할 수 있을텐데 하고 황당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특히 고 3 때에는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의 목회 방침에 대해 교인들 대부분이 불만이 있었고, 저도 그 중에 하나여서, 주일 예배 설교가 끝나면 목사님 방으로 쳐들어가서 설교 내용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며 논쟁을 했습니다. 3~4개월 쯤 거의 매주 논쟁을 하고 나니, 그 후로부터는 제가 찾아가면 거의 백기를 드셨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불편하셨을까요? 지금 만나뵙게 되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릴 일입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청년부를 맡아서 8년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준비를 전혀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시절이었는데, 준비 없이도 편안하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타고난 설교가야 하고 자만했던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제가 청년들과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젊었던 때였고, 또 조카 같고, 동생 같은 청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양로원 예배의 설교는 처음에는 꽤 힘들었었습니다. 아마 두가지 이유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첫째는 어느 수준에 타겟을 맞춰야 할까? 일 겁니다. 한 오십분 정도가 예배를 드리는데, 그 중에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시고, 치매로 고생하시는 분도 30~40% 정도는 되셨습니다. 또 은퇴하신 목사님도 계시고, 장로님들도 많이 계시고, 대부분이 권사님들이십니다. 처음 몇 주는 유치부나 아동부에서 설교하는 것 처럼 해보기도 했습니다.
둘째는 제 설교를 듣는 분들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일 것인데... 하는 마음에 설교 내용이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께 좋은 말씀이 무엇일까? 한 6개월 정도를 고민 가운데 설교를 했고, 그 이후부터는 편안해 졌습니다. 오히려 이분들이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분들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것이 많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와 환경에 제한되지 않는 도전적이고 강력한 메세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초의 어느 날, 설교를 하는 중에 예배 참여도가 가정 높으신 어느 권사님 한분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스탭분들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합병증이 생겨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신다고, 아마도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만 해도 그렇게 열심히 찬송 부르시고, 설교를 경청하셨는데 !! 그것이 그 권사님의 마지막 예배이셨구나?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분 들 중에 어떤 분은 내 설교가 생애 마지막 듣는 설교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라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분들을 그냥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분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설교가 어려워졌습니다. 원고를 준비하고, 또 고치고, 또 고치고...  혹시 하는 마음에 같은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교 듣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는 아마 어느 누구 보다 많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극동방송과 기독교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하루에 3편 이상은 항상 들었습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게 할 은혜로운 설교가 나올까 하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우명한 목사님인데 이정도 밖에 안된다니 하며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꽤 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한국에서 만큼은 아니지만 라디오에서 설교가 나오면 반가워하며 듣습니다. 설교를 즐겨 듣는 것과는 다르게 설교를 준비하면서는 인터넷을 별로 보지 않았습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구절이 어디에 있는 지를 검색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어려워지자 인터넷에 있는 설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설교하려고 하는 이 구절을 가지고 유명한 목사님들은 어떤 설교를 하실까?  이렇게 시작해서 인터넷에서 설교를 본 지 몇 개월 정도 지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 발전했구나.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은 설교를 준비하시기 무척 어렵겠구나? 설교나 찬양에 너무 멋있는 문구와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게 저런 문구를 저런 문장들을 만들어 낼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섰습니다.

저는 설교를 보통 두가지 방법으로 준비해왔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으면서 감동받고, 깨달아지는 말씀을 정리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교인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주제를 성경 말씀을 가지고 정리해서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두가지 방법의 중심에 모두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최근에 접한 많은 설교들에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메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보다 더 감동적이고 멋있는 말씀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깨우치기 보다는 만족을 주는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듣고 있으면 좋은 말씀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왜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캐치 프레이즈로 '오직 성경으로" 를 내세웠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마틴 루터는 이것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오직 성경으로 라고 했을까? 답은 교회가 성경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일 겁니다. 어떻게 성경에서 떨어져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스콜라 철학과 이탈리아식 인문주의가 당시 교회에 만연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발전시켰을 수도 있지만, 성경을 덜 중요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많은 교리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고, 많은 가르침을 쏟아냈을 겁니다. 교인들은 그 교리와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을 겁니다. 저는 서양 정치철학을 전공했고, 석사 논문을 플라톤에 대해 썼기 때문에 조금 알지만, 스콜라 철학은 제게 꽤 매력적인 철학이었습니다. 이 철학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있었을 것이고, 많은 유명한 설교자들을 배출했을 겁니다. 루터는 이런 교리나, 철학, 뛰어난 설교자들로부터 신도들을 성경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서 몇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유기체적 영감설' 을 받아들이지만 성경에 대한 단호한 입장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이는 우리에게 너무도 충분하다." 입니다. 경험하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의 눈 높이에서 말씀하십니다. 같은 성경 구절을 통해서 십 대에도 감동을 받았고, 삼십 대에도, 지금도 감동을 받습니다. 같은 성경구절을 통해서 각기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심지어는 애매한 번역으로 인해 잘못 이해하고 읽은 성경구절에서 받은 감동으로 오랜 동안 은혜로운 생활을 해온 적도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해석해도, 어떻게 비난해도 좋은 책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성경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성경을 오십독하고, 백독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 백독 이라는 포장이 그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행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힐 것이고, 한계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성경을 읽고, 또 그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또 행하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건하게 되어져 가야 합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들의 입장과 받은 말씀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신도들의 입장이 조금 다를 수는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주류에 서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가 가진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발전해서 문제라는 표현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과 1970년대의 한국 기독교 부흥기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뭔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너무 발전한 지금의 기독교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 많이 줄었어도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많지만, 그들을 크리스챤 이라고 할 수 있을지? 많은 목회자들이 부를 축적하고, 교회를 세습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방에서 개독교 라는 소리가 들려도 이제는 이상하지 않은 그런 세상, 그런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굉장히 추상적인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먼저 목회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성경적인가? 설교를 위해서 내가 성경을 얼마나 상고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내 설교가 성경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에 내가 성경을 읽으며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내 설교에 성경 보다 어떤 유명한 설교가의 글이 더 많이 인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평신도의 경우에 내가 성경을 읽고 있는가? 내가 읽은 성경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성경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내가 듣고, 하는 찬양이 성경적인가? 를 꼭 살펴봤으면 합니다. 

"어떤 은혜로운 책 보다 성경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은혜로운 말 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더 능력이 있습니다."
"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 길은 성경으로 시작하고, 성경으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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