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예배에 '참회의 기도' 를 합니다. 적당히 위장 또는 포장을 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집단 고해성사' 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진리에
어긋난다고 비난을 해왔습니다. 제 생각에도 당연히 고해성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위배됩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에 어긋나는 것이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서 제 와이프가 다니는 교회의 온라인 주일 예배를 몇달 째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 시작 부분에 '참회의 기도' 순서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거룩한 의식을 치르는 듯한 말투로 "지난 한주간 여러분이 지은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요" 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잠시 주고는,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요."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참회기도를 듣고 용서하신다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읽어 줍니다. 천주교의 신부가 고해성사를 한 신도에게 사죄경을 읽어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참회의 기도를 하라는 목사님의 말을 통해 보면, 한주간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죄인의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고 합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참회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시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참회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인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인가요? 회개한 이후에 한가지라도 죄를 지으면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인가요 ?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 즉 죄의 용서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기독교의 관점에서 '죄' 란 단어와 '죄인' 이란 단어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죄란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죄인 이란 계명을 어긴 사람입니다.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을 바꾸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제2의 창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세상 삶이, 그 기준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한 계명이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전의 계명을 완성시키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계명을 못지킨 것으로 인해서 죄인으로 전락하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한 것을 가지고 상을 받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의 전제는 '정죄함이 없다' 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손에 쥐었던 돌을 내려놓고 모두 그 현장을 떠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를 기억하게 하신 겁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죄가 있는 자는 당연히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누구도 누구를 정죄하지 말라. 이것이 새로운 계명의 전제입니다.
새로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온맘과 온몸과 온 정성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죄 인가요? 하나님도 전혀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주 조금씩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데, 이웃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서 '죄' 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회개란 죄를 고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죄' 란 단어는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당연히 '죄인' 이란 단어도 사라져야 하구요.
따라서 죄를 고백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어긋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알고 계신 분들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참회기도를 합니다. 왠지 용서받은 것 같고, 평안해 짐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교인들을 계속 죄인으로 만들고, 계속 구원의 은혜를 주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목회자도 신도들도 참회의 기도를 통해 죄를 용서해 주어서도 안되고, 용서 받아서도 안됩니다. 단 한번의 기도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고해성사의 기도는 있을 수도 없겠지만,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주일 예배 때 마다 똑같이 "회개 합시다."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그 가르침에 비춰보니 내가 잘못 했었구나를 깨닫게 하여 회개 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잘사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가르치고, 깨닫게 해주고, 훈련 까지 시키는 것이 기독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수시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되, 20~30 초 동안 어떤 죄를 용서받아야 하나 하고 돌아보지 마시고, 가능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주변 사람을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내가 사랑을 행해야 할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죄' 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죄인' 도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 잘못한 일을 회개 하시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저도 수시로 같은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회개 합니다. 끊임 없는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돌이키게 된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포기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기독교의 관점에서 '죄' 란 단어와 '죄인' 이란 단어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죄란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죄인 이란 계명을 어긴 사람입니다.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세상을 바꾸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제2의 창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세상 삶이, 그 기준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한 계명이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전의 계명을 완성시키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계명을 못지킨 것으로 인해서 죄인으로 전락하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한 것을 가지고 상을 받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의 전제는 '정죄함이 없다' 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손에 쥐었던 돌을 내려놓고 모두 그 현장을 떠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를 기억하게 하신 겁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죄가 있는 자는 당연히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누구도 누구를 정죄하지 말라. 이것이 새로운 계명의 전제입니다.
새로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온맘과 온몸과 온 정성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죄 인가요? 하나님도 전혀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주 조금씩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데, 이웃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서 '죄' 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회개란 죄를 고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죄' 란 단어는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당연히 '죄인' 이란 단어도 사라져야 하구요.
따라서 죄를 고백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어긋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알고 계신 분들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참회기도를 합니다. 왠지 용서받은 것 같고, 평안해 짐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교인들을 계속 죄인으로 만들고, 계속 구원의 은혜를 주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목회자도 신도들도 참회의 기도를 통해 죄를 용서해 주어서도 안되고, 용서 받아서도 안됩니다. 단 한번의 기도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고해성사의 기도는 있을 수도 없겠지만,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주일 예배 때 마다 똑같이 "회개 합시다."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그 가르침에 비춰보니 내가 잘못 했었구나를 깨닫게 하여 회개 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잘사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가르치고, 깨닫게 해주고, 훈련 까지 시키는 것이 기독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수시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되, 20~30 초 동안 어떤 죄를 용서받아야 하나 하고 돌아보지 마시고, 가능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주변 사람을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내가 사랑을 행해야 할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죄' 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죄인' 도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 잘못한 일을 회개 하시고,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저도 수시로 같은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회개 합니다. 끊임 없는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돌이키게 된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포기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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