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3일 일요일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

 독실한 신앙을 가진 어ㅁ니로부터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국민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육십살이 된 지금까지 회를 떠난 적도 없었고, 하나님을 멀리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 편은 아니지만 꽤 많은 기도를 했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에 대한 답을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묻는 저의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셨다고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쓰고자 하는 글은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제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것이고, 부끄러운 제 삶의 고백입니다. 

첫번째 음성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당시 굉장히 뜨겁던 한얼산 기도원의 여름 대 부흥성회에서 였습니다. 부흥강사의 설교를 듣는 중에 머릿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뭔가 이상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어둠 속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비를 맞으며 성전의 마이크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숲속으로 들어갔고, 바닥에 앉지 못하고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웅웅 거리던 그 음성이 확실히 들렸습니다. "모세와 같이 내 백성을 이끌어라." 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삶의 목표가 정치였던 제게 있어서 너무도 힘이 되는 음성이셨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던 걸까요? 

그로부터 1년 반 정도 후에 늘 기도하던 교회 1층 성전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내 양을 먹이라"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들었다고 하시고, 또 너무도 기다리는 음성이지만, 제게는 큰 혼란을 주는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 ! 분명히 제게 정치가가 되는 길을 걸으라고 음성을 주셨잖아요?" 저는 한달 정도를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그 음성을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서른일곱살 되는 해에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많이 벌려서 빚도 많고, 수입도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2차로 어디를 갈지 떠들고 있는 중에 갑자기 "참 많이 놀았지?"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 일행은 자주 가던 룸살롱에 가서 놀고 있었는데, 저는 그 음성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끄러운 그곳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너는 노력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얻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네가 간절히 노력해도 얻지 못하며 살 것이다." 충격적인 이 음성을 듣고 잠깐 사이에 제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저는 "아멘" 으로 답했습니다. 그날 부터 사업이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그  다음 해에 IMF 를 맞아 완전히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얼마차 철저하게 저를 주저앉게 하시는 지, 간단하게 설명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몇가지만 말슴드리면, 저는 사업을 하면서 은행 돈과 사채를 부담 없이 빌려썼는데, 그러면서 앙상 제가 하는 계산은 동산과 내 명의의 부동산을 처분하면, 아파트 전세 얻을 돈 정도는 남기는 선까지만 사업을 벌린다는 것이었습니다. IMF 가 터질 당시 9월 추석에 팔릴 물량을 수입하려고, 은행에 외환한도 백만불을 다 썼었습니다. 9월 말에 수입한 물건이 도착했을 대의 환률은 780~790원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결제를 해야 할 당시 제 기억에 12월21일 정도인데, 1달러가 2천원을 넘었습니다. 은행에 5억 정도의 담보를 제공하고, 8억 정도의 여신을 쓴 셈인데, 제가 결제할 금액이 20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 제가 이자를 내던 사채는 약 20억 정도 였습니다. 제품과 부동산을 처분해서 만들 수 있는 돈은 10억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단기간에 만들 수도 없었구요.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제게 3억을 빌려주고, 제가 발행한 유일한 당좌수표를 가지고 계시던 분이 제게 모라토리움 이란 것을 권하셨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저는 채권자들을 모아서, "제가 부도를 내고, 모든 것을 처분해서 10억을 만들면 여러분의 부채 중 절반을 드릴 수 있고, 여러분이 채권을 1년만 유예해 주시면, 10억으로 은행부채와 세금을 내고, 회사를 정상화시켜서 1년 뒤부터는 지금까지 드리던 이자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구동성으로 흔쾌히 응원하며 기다려 주시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을 처분해서 은행부채와 세금을 내고, 오히려 편안히 사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좌를 가지신 분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한달 쯤 지나서 다른 채무들은 다 연기가 됐으니 자기 당좌는 지급해줄 수 있지 않냐고 했습니다. 저는 전혀 여럭이 없었고, 맞지도 않다고 생각되어서 화를 냈는데, 우연히 이 통화를 듣고 있던 정말 고마운 친구가 3천만원을 줄테니 가서 잘 이야기 하고 약속대로 1년 기다려 달라고 하라고 했고, 저는 기분이 나뻤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달이 지났는데, 당좌를 가진 분은 또 당좌를 돌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그러라고 했고, 그 분은 설마했는데, 당좌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당좌로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당좌가 부도나면 형사입건이 되기 때문에, 그 처리 과정에 저희 가족이 3억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회사나 다른 채권자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잘나가는 벤쳐회사의 대표인 그분은 돈이 없어서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당좌를 돌린 것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저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꽤 가지가 있었던 회사도 잃었고, 더 중요한 것은 흔쾌히 지불유예를 해주신 분들에게 배신감을 안겨드린 것입니다. 제가 뭔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제 안위를 챙겼다고 생각하시게 된거죠. 제 삶의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멀어졌고, 그들과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좌수표로 인한 형사입건은 오히려 경찰과 검사의 위로를 들으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개인적으로 저를 사기죄로 고소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경찰과 검사 모두 오히려 저를 격려하며 혐의가 없는 것으로 종결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안산의 해결사 집단에게 채권 회수를 맡겼고, 저는 4년간 그 해결사들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는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1991년에 중국 개방 초기에 중국에 진출했습니다. 거창한 직함을 가지신 분과 동행하게 되면서 중국에 가면 성장과 시장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도시의 유력인사들이 나와 만찬을 베풀었구요. 30대 초반의 저는 잘나가는 한국의 사업가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도에 50만불을 투자해서 흑룡강성에 합자 봉제공장을 설립했습니다. 동업자는 중국에 백화점을 7개 운영하고 있던 여자 사업가였고, 저의 초청으로 한국에도 두번 방분을 해서 꽤 가까워진 사이였습니다. 중국내의 많은 사업가들로부터 수많은 좋은 합자 제안을 받았었지만, 양복이 없었던 당시의 중국에 제대로 된 양복 공장을 설립해서 동업자가 운영하는 백화점에서 팔고, 기술 수준이 좋아지면 한국으로 역수출할 수도 있는 유망한 사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공장을 오픈한 첫날부터 동업자는 공장을 자기들에게 넘기고 라고 실력행사를 해왔습니다. 자기들이 운영하고 이익이 남으면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3개월을 지속한 이 싸움은 저희 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도시는 일산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로, 시장은 매년 열리는 일산 세계 꽃박럄회에 귀빈으로 초대를 받아서 일주일간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두해에 걸쳐서 저는 유명한 문장가였던 이 시장님을 한국에서 대접했었고, 저보다 서른살이 많았지만 형과 동생이 되어서 호텔방에서 속옷 바람으로 컵라면 먹으며 지내는 막역한 시아가 되었었습니다. 저희의 마찰 소식을 들은 시장님은 저와 동업자를 불러서 그냥 일방적으로 통고를 하셨습니다. "합자란 것은 한방이 운영해야 합자다. 오 총경리에게는 시에서 다른 사업체를 하나 줄테니, 3년간 김 사장이 운영하고, 3년 뒤부터 이익금이 남으면 1/4을 지급해주라." 동업자는 한마디도 못하고 그러겠다고 했고, 양복공장은 그날로부터 작업복 공장으로 바뀌어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공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5년 동안 공장을 운영하고, 이외에 3곳의 공장을 더 임대해서 엄청난 물량의 작업복을 한국으로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한국에서 최대의 작업복 수입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iMF 를 맞았고, 수입원가가 2배를 넘게 되니, 공장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 4명의 직원이 나가 있었는데, 저는 문을 닫고 귀국하라고 했지만, 6개월을 더 지나서 귀국을 했습니다. 이 6개월간 그들은 사실 회사 일이 아닌, 자신들이 중국에서 뒤로 벌린 일 때문에 귀국을 미룬 것인데, 회사가 부도난 후에 이 네명의 6개월 간 미지급한 급여가 저를 괘 힘들게 했습니다. 중국 은행에 잔고가 꽤 있을 것으로 알았었는데, 이들이 뒤로 벌린 사업 때문에 오히려 마이너스 잔고가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의 비용까지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교묘하게 저를 완전히 주저앉히셨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힘들게 투자를 받아 재기를 모색하였고, 20억의 부채를 힘들게 힘들게 안고 4년 정도 보내던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내 양을 먹이라" 는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정치가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 음성은 저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음성은 시도 때도 없이 계속해서 들려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기도는 아예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항변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그 길을 걷겠냐구요.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당시 사업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음성에 시달린 지 4~5개월 쯤 지났을 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서원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제 머릿 속에서 잔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만일 2003년 한해 제 부채를 완전히 갚을 수 있게 해주시면 제가 주의 종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런데, 부채를 조금 못미치게 갚거나, 부채 갚은 돈 보다 더 많이 벌게 하시면 사업을 계속해서 성공해서 정치의 길을 걸으라는 싸인으로 알겠습니다." 저는 제가 대단한 잔머리를 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딱 부채 만큼만 돈을 벌 수가 있겠습니까 ? 이 서원기도가 끝나고 저를 괴롭히던 음성은 사라졌습니다. 

서원기도 후 3개월이 지날 때 쯤, 제게 가장 큰 후원자였던 가족 분의 제안으로 3개월 간 미국에 와야 했습니다. 출장 가방 하나 들고 미국에 왔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해외 도피를 한 것으로 소문이 돌면서 해결사와 사채업자, 또 개인 채무자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와이프와 이이들을 피하게 하고, 미국으로 들어오게 할 방법을 찾게 되었고, 힘들게 두달 뒤에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 준비 없는 우리 가족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뼛속까지 감리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저는 친구의 소개로 아주 인자한 목사님이 계시는 오래 된 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출장에 오르면서 회사를 후배 한명과 선배 한분께 맡기고 왔는데, 그 후배와 통화를 하면서도 겁이 나서 회사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을 생각햐면 너무 괴로웠지만 불볍체류자로 한푼도 없이 시작하는 미국 생활도 만만치 않아서 그저 기도만 할 뿐이었습니다. 미국 남북을 횡단하는 도로인 80번 도로를 따라 아주 평화롭게 운전을 하고 가던 어느 날,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차를 세우고 생각해 보니 그 소리는 "아직도냐?" 라는 소리였습니다. 아직도냐?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다음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빚이 어떻게 되었느냐?" 머릿 속이 복잡하고 뭔가 생각해 보려고 애쓰는 데 또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빚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놀라움 속에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무책임한 말로 들리시겠지만 미국에서 저는 부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까불고 한 서원을 하나님은 이루신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여건에서 어떻게 하여야 주님의 종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몇주일을 고민하다가 또 도망갈 길을 찾았습니다. 교회 담임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렸습니다. "제가 이러저러해서 이제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제 여건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담임 목사님은 당신이 방법을 간구해서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께 공을 넘기고 나자, 저는 다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봉사도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봉사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거의 5년이 흘렀는데, 목사님은 아무 말씀이 없어셨습니다.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지냈지만 어느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뵙고 다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기억을 잘못하시는 듯 "그랬었지! 내가 다시 알아봐줄께 !" 하셨고 저는 목사님께 "저도 알아보겠습니다. " 하고 말씀드리고 나왔습니다. 그후 2년 동안도 아무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목사님은 한국 감신대의 석좌교수로 초빙을 받아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이후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과 교인들 사이에 큰 마찰이 있었고, 저는 제가 교회를 떠나는 것이 파국을 늦추거나, 막는 길이라 생각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목회자의 길을 걸으라는 싸인이겠다 생각해서 궁리하다가, 감리교단의 평신도 목사의 길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묘하게 저와 같이 평신도로 있다가 목회자가 된 아주 스마트한 목사님의 이메일로 들어갔고, 그 목사님은 자신이 맨해튼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를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Drew 라는 대학에 등록하고 전도사로 시작하면 2년 내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너무도 성의껏 가이드를 해주셔서 거절하지 못하고 Drew 에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보내주는 졸업증명서가 분실이 되고, 학교의 수강신청도 입력이 안되었습니다. 몇달을 지체하며 생각을 해보니, 제가 몇만불을 내고 신학대학원을 다닐 상황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목사님의 사역방향도 저와는 맞지 않아서, 저는 말 없는 전도사 겸 간사로 3년을 봉사하고 이 사역을 마쳤습니다. 

그러는 중에 제가 사는 동네 인근에 있는 양로원에 봉사할 기외가 주어졌습니다. 육십세가 넘어서 목회를 시작하신 연로하신 목사님 부부가 9년째 하고 계시는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1년 정도 예배를 돕다가, 수요예배를 새로이 만들게 되었고, 수요 예배의 책임자가 되어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제가 전도사로 봉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기서도 전도사로 사역하라고 하셨습니다. 양로원에서 몇년을 전도사로 사역해도, 어르신들은 저를 목사님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목사님은 미국 침례교 방식으로 해서 제게 목사 안수를 해주시겠다고 하시고, 제 와이프는 지금이라도 신학을 제대로 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합니다. 저는 그냥 그대로 사역을 했습니다. 주일과 수요일 예배를 준비하는 것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양로원 봉사가 9년이 되었을 때에 코로나로 인해 옙배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내 양을 먹이라" 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일까? 저는 사업적으로 아주 바쁩니다. 남들은 슬슬 리타이어를 준비한다고 할 나이에 저는 오히려 점점 더 큰 사업계획을 세우고 있고, 항상 나를 바쁘게 했던 일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진행형이고, 갈길은 너무도 먼데도 불구하고 저는 한심하게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한두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고, 유투브에서 스포츠, 오락, 드라마 등을 보고 있습니다. 가끔은 눈이 피곤해서 도저히 볼 수 없을 때까지 유투브를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쉽게 안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만한 유혹이 아닙니다. 지난 일년 몇개월 동안 수십번을 다짐했는데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미국에 와서도 끊지 못했던 만화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끊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만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드라마나 유투브도 언젠가 끊을 수 있을거야 라고 하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2주 전에 "이제 그만하지"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직 2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는 감히 그  말씀을 거역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변화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2주일째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성을 듣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아마도 이 음성으로 제 삶은 또 조금 바뀌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꿔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 경고를 듣고 멈추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하나님의 음성은 외면하면서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요구하신 것은 아닌지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제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쓰고 있는 저도 이것 외에 여러번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 한들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경고인지 재촉인지 모를 2주 전의 말씀을 붙잡고 저는 사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내 가까이에 계시구나 라는 안도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우뢰와 같이, 때로는 알아 듣기 어렵게, 때로는 속삭이듯이, 때로는 야단치듯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의 눈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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