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6일 수요일

구원의 아이러니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참으로 묘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구원은 세상 만민을 위해 베풀어주신 것인데, 사실 구원이란 것의 혜택은 '죄인' 에게만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그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원죄론 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딤이 지은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죄가 없는 사람은 없겠죠? 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기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양심을 속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죄로 인해 가책을 느낍니다. 

죄에 대한 인식에도 아이러니가 있는데, 이 죄책감이나나 양심의 가책도 딱 한번 저지른 사람이 더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시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무뎌져서 점점 더 깨닫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 더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구원은 가치를 발휘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거나, 죄를 더 짓거나 할 수는 없지만, 죄를 더 깨달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면죄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해주는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돕지 않고 있는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합니다. 나의 나태한 삶이 죄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으로 말씀을 들으며 명령을 준행하며 살게 해줍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죄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 임을 깨달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잘못 살아온 사람이나, 잘 살아온 사람 모두에게 구별 없이 주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내 여건이나 상황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깨달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내 삶을 돌아봐야 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에 거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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