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9일 토요일

돈을 어떻게 써야 할까?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잘쓰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기만의 돈 쓰는 방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제 주변에서 돈을 잘 쓰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제 저희 둘째 누나입니다. 저희 가족 구성이 복잡해서 누님이 여럭 계시지만 저는 세 분의 누님과 같이 살았고 셋 중에 둘째 누님이 제가 보기에는 돈을 벌기도 열심히 버셨고, 쓰기도 잘쓰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도 했지만, 좋은 일에 돈 쓰는 것에 대해 망설임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본인이 남을 도운 일을 남들이 모르게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에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돈이 꽤 많은 사람 중에 가장 적은 원망을 듣고, 꽤 많은 감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일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에 대해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 일을 하셨습니다. 꽤 많은 돈을 벌고, 꽤 많은 돈을 남을 위해 쓰셨습니다. 장로셨던 어머니는 교회와 선교를 위해 쓰신 부분도 많았습니다. 바로 옆에서 지켜 보는 저는 "좀 더 많이 쓰시지!" 할 때가 자주 있었지만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상당히 많은 사람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신 아버님은 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돈을 버시지 못하셨는 데다가, 꽤 많은 품위유지비가 필요하셨습니다. 가까운 친척들이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동기간과 조카들에 대한 부담도 지고 계셨습니다. 친척을 위해 많은 돈을 쓰셨는데, 가끔은 좋지 않은 반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저에 대한 차별적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버신 모든 돈을  저를 위해 쓰셨습니다. 누님들에게 사주셨던 집까지도 팔아내라고 하실 만큼 제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일흔이 넘어서 리타이어 하실 때, 집 한 칸도 가지지 못하시고, 사위가 마련해 주신 집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 집은 좋은 위치에 있는 호화 빌라여서 자손들의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미국에 오셨을 때 어머니에게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평생 엄마에게 속만 썩이고,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딱 한가지 해드렸다면, 엄마의 돈을 내가 완전히 갖다 써서 엄마를 무일푼으로 만든 것, 그것 하나는 잘한 것 같아." 들으시면 황당할 지 모르지만, 저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재산을 가지고 리타이어 하셨다면, 자식들이나 조카들이 좀더 자주 찾아왔겠지만 시기와 분쟁이 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대다수가 그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돈이 한푼도 없으신 어머니에게 찾아오는 자식, 조카, 지인들은 정말 어머니를 보고 싶고, 감사해서 찾아오는 분들이셨을 겁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어머니는 돈을 잘못 쓰신 대표적인 분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돈으로 안좋은 관계에 처한 사람이 몇 명 밖에 안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께 감사하실 분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가장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친구 원중이는 성동소방서 부소장이신 아버지를 두고 있었고살림을 잘하시는 어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광희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공부도 잘했고, 학교에서 축구부 주장을 했습니다. 얼굴에 크게 수두 자국이 두세개 있었는데, 귀엽지만 절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 때는 과자나, 사탕, 빵, 딱지, 만화 등에 내가 돈을 거의 다 내는 편이었는데, 원중이는 주머니에 항상 잘 접은 오십환 짜리 지폐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자기가 내야 하는 부분 이상은 항상 냈고, 먼저 내는 편이었습니다. 원중이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6학년, 원중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가 전부입니다. 원중이가 6학년 때, 신설동 어린이 놀이터의 축구장에서 청계천 학고방에 사는 아이들과 돈내기 축구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1인당 20원 정도를 걸고 시합을 했는데, 한번 이기고 한번 지고 할 정도로 재미있게 하곤 했습니다. 당시 원중이는 축구를 잘하기도 했지만 경기 끝나고 돈을 모아주거나, 돈을 받아서 나눠주는 일을 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어른스러운 아이였습니다. 제가 대장 노릇을 했었는데, 저보다 작고 귀여웠지만 학교 축구부 주장도 할 정도로 단단하고, 어른스럽고, 리더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고방 아이들 중에서 항상 까만 독구리와 바지만 입고 다니며, 축구도 가장 잘하고, 돈도 꽤 가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이는 저보다 두살이 많았는데 얼굴도 까매서 우리는 그 아이를 흑진주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최고의 축구 스타였던 포르투칼의 유세비오와 닮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죠. . 사실 돈내기지만 모든 아이들이 돈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합쳐서 한 100원 정도 만들어 주고 다음에 다시 붙자고 하곤 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돈이 꽤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했는데, 원중이는 이 일을 다 맡아서 했습니다. 돈이 이것 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돈이 없다고 할 때는 적당히 딜도 하곤 했습니다.  흑진주는 항상 50원 정도의 자기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 아이들로는 상상하기 힘든 돈이어서 낯설게 보였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딱 이때까지가 내가 축구를 꽤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고방 동네 아이ㅐ들과의 게임은 별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게임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1:1로 비긴 상태에서 거의 끝나가던 게임에서 우리 편이 찬 공이 내 얼굴을 맞고 상대방 골대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꽤 아팠고, 코피가 날까 걱정되어 얼굴을 만지고 있는데 우리 편 아이들이 뛰어와서 껴앉고 축하를 해주었었습니다. 기억에 한 1~2년 정도 축구를 같이 했고, 돈 내기 시합은 대여섯번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집에서 누나를 때리고 도망나와 10분 거리에 있는 신설동 놀이터에 갔는데, 비가 많이 왔습니다. 미끄럼틀 밑에 비를 피할 공간이 조금 있었는데, 학고방 아이들 둘이 같이 있어주었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그 아이들과 두세시간 정도를 떠들고 같이 있었습니다. 용두동 쪽 아이들도 놀이터에 가끔 와서 공을 찼는데, 그래도 신설동 놀이터는 우리 동네와 학고방 동네 아이들의 주무대 였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에 고O빈과 김O경 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철빈이는 학년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였고, 반에서는 회장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습니다. 광희문에서 퇴계로가 시작되는 고가 바로 옆에 있는 5층 건물에 살았습니다. 거의 똑같이 생긴 5층 건물이 두채 있었는데, 그 중 한채에는 우리나라의 수출 실적을 알리는 대형 전광판이 있었습니다. 5학년 때 쯤 13억몇천만불을 수출했다고 쓰여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로서는 처음 본 전광판이었습니다. 1층부터 4층 까지는 세를 주고, 5층이 철O이네 살림집이었습니다. 철빈이 보다 세살 위의 누나가 있었는데, 피아노를 잘쳤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처음으로 여기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누나가 가끔 같이 놀아줘서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쳐봤던 기억입니다. 용경이는 키도 꽤 크고, 살이 조금 찐 편이었습니다. 학교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용O이의 집은 장충동의 대표적 부자집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당에 아주 멋들어진 소나무가 있었고, 집은 2층의 양옥집이었습니다. 베란다가 있었고, 용O이 방에서 베란다로 직접 나갈 수 있었습니다. 잔디 정원에 잘 손질된 정원수들이 있었습니다. 거실에는 대한제국의 관료복장을 한 할아버지의 반신 초상화가 있었고, 도자기와 그림들이 꽤 결려있었습니다. 넓은 도자기 수반에 각종 오래된 동전이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반장파와 회장파가 반의 헤게머니를 놓고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반장은 김O경이란 아이였고, 부회장은 신O현이란 아이였는데, 철O이와 용O이는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선심공세를 했습니다. 먹을 것도 사주고, 선물도 주고, 급기야는 유경이와 수현이를 양보해 준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장충국민학교는 공립이었지만 좀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이병철씨 집과 정주영씨 집이 가까이에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의 집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몽준 씨와 박근혜 씨가 동기동창일 수 있었겠죠?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돈을 많이 쓰고  살았지만, 아주 잘사는 집은 아니었고, 부자 애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이 네명의 아이들과는 조금 이질감을 느꼈었습니다. 그래도 철O이 누나에 끌려서 철O이의 편을 조금 더 들어줬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내색은 안했지만 수O이 보다는 유O이에게 더 마음이 끌렸지만 국민학교, 중학교 때는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전혀 내색을 하지 못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이후에는 이 아이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대학교에서 유O이를 한번 봤습니다. 아마 의대를 다녔던 것 같습니다. 예과 2학년 때까지는 본교에서 수업을 같이 들었기 때문에, 체육복을 입고 수업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는 척을 할까 했지만, 당시 제가 불만이 가득했던 시절이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용O이는 주머니에 돈을 안넣고 다니는 아이였고, 철O이는 돈을 아주 많이 가지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용O이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항상 계셨죠. 소풍 때나 먹는 바나나도 항상 간식으로 주셨습니다. 용O이와는 거의 용O이네 집에서 놀았습니다. 하지만 철O이와는 퇴계로부터 충무로까지 돌아다니며 놀았습니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친구는 5학년 때 같은 반인 박재완이란 친구입니다. 우리 반 반장인 재완이는 늘씬한 키에 웨이브가 굵게 진 머리카락, 항상 입과 눈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멋진 친구였습니다. 학교 바로 앞을 흐르는 개천 변의 깔끔한 단층 양옥집에 살있습니다. 아버님은 외교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재완이의 취미는 우표 주집, 프라모델 조립, 그리고 경주용 미니 자동차 경기 였습니다. 재완이를 떠올려보면 참 돈을 잘쓰는 친구였다는 겁니다. 특히 용돈을 잘 관리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돈을 써 없애는 곳에 쓰지 않고, 남기는 곳에 썼고, 친구들에게 많이 베풀었습니다. 재완이가 준 우표 덕에 저도 우표수집을 시작했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인 박철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눈썹이 길고, 눈과 피부색이 여자 같은 아이였습니다. 철호도 우리 반 반장이었는데, 집은 중부시장의 가장 중심에 있는 그릇 도소매점의 2층에 있었습니다. 철호의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철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6학년 때 저는 담임선생에게 일주일에 3일 과외를 하고, 철호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3일은 같이 놀지 못했지만, 나머지 3일은 거의 같이 돌아다니며 놀았습니다. 철호는 싸움도 잘했습니다. 잘할 뿐 아니라, 가끔은 싸우는 것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공부 잘하고, 얼굴 잘생기고, 운동도 싸움도 잘하고, 돈도 잘쓰는데, 여자 친구는 없었습니다. 하긴 저를 포함해서 저와 친한 친구들은 여자 아이들과 노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번도 보지 못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철호를 봤습니다. 청계천 7가에 있는 '팽고팽고' 인가 하는 유명한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려고 줄서 있는 아이들 중에 철호가 있었습니다. 철호는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저는 영동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전혀 만나지 않고 지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논다고 하는 애들이 양복 입고, 가발 쓰고 줄을 서있는 반면에 철호는 셔츠 차림에 짧은 머리로 줄을 서있다가, 기도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입장을 했습니다. 아주 당당해 보였습니다. 기도들에게 철호는 ROTC 로 통했습니다. 그 이후 철호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철호는 돈을 어떻게 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한가지 느껴지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일 것이라는 겁니다. 아쉽지만.

제 대학 동창 중에 임OO 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님은 내셔널 플라스틱 이라는 회사의 회장이셨습니다. 미원 그룹 창업자인 임대홍 회장의 동생으로, 내셔널 플라스틱은 한때 미원에 버금가는 회사였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그 친구는 온갖 명품을 걸치고 다녔고, 가끔은 레코드 로얄 이라는 중형차를 몰고 학교에 왔습니다. 농담도 잘하고 잘 놀고, 가끔은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나이가 꽤 차이 나는 형이 한명 있었는데, 그 형이 회사를 승계할 것이어서, 내 친구는 스스로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친구와 좀더 가까이 했다면, 아마도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사업을 했을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의 경험도 없이, 아버지 회사의 배경도 없는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될 리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마약을 하다가 수배가 되어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어떻게 했는 지는 모르지만, 몇년 후에 귀국해서 다시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아버지 회사와 조금 관련이 있었습니다다. 체육관이나 갇당에 플라스틱 벤치를 만들어 설치해 주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두번 만났습니다.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었었다. 이미 셋업이 되어 있는 상태라서 영업에 도움을 준다면 모를까 별로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 친구는 제게 자기가 대학에 와서 말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 저라고 말하며, 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이 친구에게 내 줄 시간이 없었죠. 이 친구는 스마트했고, 평범 이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친구였는데, 돈이 있어서 망가진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 친구의 학비를 한번 내준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친구가  돈 가지고 잘한  유일한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 친구는 돈을 잘못 쓴 대표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제 후배 하나는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많은 돈을 씁니다. 포장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일 겁니다. 이 포장은 가끔은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 계산은 뻔합니다.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과다하게 돈을 썼기 때문에, 제대로 써야 하는 곳에는 쓸 돈이 부족하겠죠! 자신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겁니다. 아니 손가락질 받을 확률이 크겠죠?

또다른 후배가 있는데,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서 저와 같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제가 거의 대부분 돈을 내는 편이었습니다. 이 후배는 자기가 용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이 생기면 항상 제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 오늘은 제가 얼만큼 있으니까, 보탤께요" 지금은 안본 지가 거의 20년이 되어 가지만, 이 후배가 30대 후반이 되었을 때도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특별히 이 후배는 삼성생명에 다녔는데, 가까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로 도와줬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신이 직접 보증까지 서주면서 말입니다. 돈이 풍족하지 않아도 돈에 대해 겁을 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여려서 자기 보다 남의 일에 더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잘못 쓴 또 한 예는 저의 매형입니다.  사돈 어른은 아주 소문나게 돈을 많이 버신 분입니다. 당시 강동, 송파에서 이 누구와 박 누구, 두 부자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데, 그 중에 이 누구 씨셨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신 사돈 어른은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아들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셨고, 결국 저희 매형은 재산을 엄청 많이 가진 목사가 되었습니다. 매형을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매형에게서 돈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매형의 돈을 보고 모여들었습니다. 대학교 때 친구과 함께 카드, 연하장을 만드는 인쇄업에 손을 대어 4천만원을 날렸습니다. 잠실 주공 아파트 열 채 값을 날린 겁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돈 관리를 안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 관리인도 두명 정도 있었고, 부동산 브로커도 두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로 성공할 수도 없고,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도 없는 여건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에게 베풀기도 많이 했고, 뺐기기도 많이 했습니다. 항상 최고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면 앗셀블러드로 찍어야 했고, 골프를 시작하면 최고급 혼마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최고급만을 선택하는 매형에게 묘한 특징이 있습니다. 식당에 가면 VIP 로 대접하려는 주인에게서 최대한으로 뺐어 냅니다. 돈 안내고 서비스로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뽑아냅니다. 쇼핑을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깍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형과 함께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 묘소에 간적이 있습니다. 어떤 골동품 상점에 들어갔는데 보통 사람들이 1~20불 자리 보고 있을 때, 몇백불 짜리를 골랐습니다. 백불 짜리 5개 정도를 2백불에 딜을 해서 포장해 놓고, 다시 백불 짜리 3개를 사면서 이것을 백불에 안주면 이전 것도 안살 것으로 하니, 또 깍아주고, 이렇게 해서 4번을 깍았습니다. 결국 그 상점에서 꽤 가치있어 보이는 백불 이상 자리 제품 스무개 가까이를 5백불에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두번째 다시 깎을 때 쯤 부터는 저는 그자리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 그 상점 주인의 표정은 정말 참담했습니다. 물론 손해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점에 돈을 벌어 줄 최고의  체품들을 다 털린 셈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힘들기에, 저는 매형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매형에게서 부자 소리를 뗄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습니다. 더구나 부자 목사 소리는 절대로 들어서 안될 것이기에. 그래서 매형은 포기하고 조카들을 가르쳤습니다. 조카들은 부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고, 그 많던 재산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오백억을 물려 받아서 이천억을 만들었다고 입버릇 처럼 말하던 그 많던 재산이 말입니다. 리타이어 하셨던 누님이 60대 중반의 나이로 다시 일을 시작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1980년에 신라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아주 돈을 잘못 쓰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정말 돈 많은 한량들이 로비의 커피숖에 자주 오곤 했는데, 해외 여행에 규제가 많던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맛있는 중국 요리 먹겠다고 홍콩에 당일로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주하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객기 부리느라 한 두번 했을 수 있겠죠? 룸살롱이나 클럽에서 돈을 뿌려 본 사람들도 꽤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남들에게 욕먹을 정도로 돈을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또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어떤 부분에서 이렇게 돈을 뿌리듯이 욕먹을 짓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명품 옷을 입는 데에 돈을 쓰는 것도 비숫한 예일 수 있습니다. 

신준철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이고, 어려서부터 아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친구입니다. 영동고등학교에 담을 접한 큰 집에 살았는데, 1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같이 했습니다. 제가 사업을 하다가 줄여서 갈 때, 이 친구의 건물로 가서 신세를 졌도, 삽십대 초반에 이 친구가 제안해서 동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 사업이 바빠졌을 때, 투자도 해주었고, IMF 를 맞아 제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이후에도 크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돌려받으려고 준 것이 아니라, 저의 힘든 상황을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준 것입니다. 드물게도 돈을 가지고 베풀기만 하고 살아온 친구입니다. 물려받은 돈이 많은 부자이면서 꾸준히 자기의 일을 하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진심어린 도움을 주는 삶을 사는 것으로 봅니다. 

안O민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민와서 시카고와 버지니아에 살면서 고생도 좀 하고, 공부도 좀 하고, 거칠게 살다가, 아버님이 한국의 좋은 자리로 가시면서 29살에 한국에 들어와서 한 5년간 사업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들어온 친구입니다. 제 절친과 절친이어서 한국에 와서 저희 회사에서 1년 정도 같이 일을 했습니다. 독립해서 자기의 일을 할 때도 자주 만났죠. 제가 미국에 와서 3년 쯤 되었을 때, 식당 주차장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뒷모습이 저 같은데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서 미국에 올 확률이 가장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설마 아니겠지 라고 있다보니 제가 손에 다이어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 저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항상 큼직한 검은색 가죽 다이어리를 들고 다녔거든요. 당시 이 친구는 한국과 중국에서 패션 악세서리를 수입해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서 이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렸들 때 이 친구는 금호동의 대장 이었습니다. 싸움도 잘했으니 대장 노릇을 했겠지만 집안도 넉넉해서 더 그랬을 겁니다. 이 또래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이 친구의 집에 가서 노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이니 흉을 좀 보겠습니다. 제가 어려워서 이 친구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하면, 이 친구는 항상 말합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과는 돈 거래 안해. 우리 어머니나 동생과도 마찬가지야." 빌려주지 않겠다는데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저는 화도 나고 웃음도 납니다. 한국에서 사업하면서 가까운 사람들 돈 빌려쓰고, 부모님 돈도 많이 가져다 썼던 것을 너무도 잘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참 묘한 것이 이 친구는 정말 자신이 가까운 사람과 돈거래를 안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속이야 알 수 없지만, 이 친구의 돈에 대한 생각이 좋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지신 분들이 꽤 많은 것이 현실이구요. 

미국에서 만난 분들 중에 예를 들고 싶은 분들이 많이 있지만, 가까이에 계셔서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줄이려 합니다. 그리고 위에 거명한 분들의 실제 생활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보고 느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을 쓴 것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돈을 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사실 남의 속사정을 모르고 그 사람이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겁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돈을 어떻게 쓴 사람, 아니 쓰는 사람일까? 아주 어려서부터 많은 용돈을 받아 썼습니다. 국민학교 1~2학년 때에도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매일 중국집에 들려서 짜장면 곱배기를 먹었습니다. 보통 애들은 1주일 용돈으로도 짜장면 먹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같이 과외하는 애들 7~8명에게 매일 떡볶이, 오뎅을 사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그 유명한 신당동 즉석 떡볶이의 1호 고객이었고, 3년 동안 최대의 고객이었습니다. 방송에도 나오시는 그 유명한 마OO 할니가 본인의 입으로 제가 없었으면 시작 못했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천호동에 있는 저희 집에서 청담동에 있는 학교까지 3일에 한번은 택시를 타고 등교했습니다. 요금이 1,500원 정도 였습니다. 제 기억에 짜장면이 3백원 정도였으니까, 꽤 큰 돈이었을 겁니다. 고 1 때 교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1백만원을 써냈습니다. 당시 잠실 시영 아파트 13평 짜리 싯가가  2~3백만원 정도 였으니까, 말도 안되는 금액을 써낸 것이죠. 이 헌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1년에 쓰는 용돈이 백만원 정도였다고 생각했고, 그 절반만 쓴다면 2년 동안 모아서 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왠만한 직장인의 초봉이 월 10만원이 채 안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많은 돈을 쓰고 살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서는 더 많이 썼습니다. 대학원 다닐 때, 전두환이 과외를 금지시켰는데, 이때 리스크를 안고 여의도에서 토요일과 주일에 애들을 가르쳐서 엄청 돈을 벌었습니다. 주에 이틀 일해서 한달에 버는 돈이 대졸 초봉의 2배가 넘었습니다. 집에서 용돈도 많이 받으면서 돈까지 쉽게 버니... 엄청 썼습니다. 

박사과정에 바로 진학하지 못해서 얼떨결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해운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 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네요. 제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회사에서 제 별명이 슈퍼맨 이었습니다. 얼마나 벌었냐 하면 제 월급이 40만원 인데, 한달에 제게 주어지는 커미션이 1천만원이 넘었구요, 거래처에 나눠줄 만큼 나눠주고도 제 월급의 열 배 이상을 용돈으로 썼습니다. 큰 돈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돈벌이가 거의 안되는 West Africa 쪽으로 취항하는 선박을 맡아서 세일즈를 했는데, 꽤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회사의 가장 요직인 중동지역을 취항하는 선박을 맡던 대리님이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1년간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자리로 제가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한달에 매출을 2억 정도 올려서 순이익을 5천만원 정도 벌어주는 자리였습니다. 주요 고객은 잘나가던 한국의 7대 종합상사였습니다. 매월 5천만원 순이익 중에서 10% 인 5백만원 정도를 리베이트로 받아서, 실제로는 (주)대우와 삼성물산 그리고 효성물산에만 리베이트를 지급하고 나머지 종합상사에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월에 2백만원 정도를 챙기고 있었던거죠. 이 자리를 제가 맡고보니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물동량이 대우, 현대, 효성, 나, 삼성 순이었는데, 삼성에는 운임도 제일 싸게 주고 리베이트 까지 주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회사에 주는 운임까지 알고 잘난 체를 하는데, 보고 있기가 싫었습니다. 당시 저는 삼성문산 직장 농구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직장인으로만 구성하면 경기 수준이 떨어질 수도 있어서,  당시 직장인 농구대회의 규정이 직장 외의 선수 2명 까지를 뛰게 했습니다. 저와 대학 후배 한명이 뛰어서 삼성물산 농구팀이 2년 연속 우승을 했었습니다. 동창들도 많고, 해서 삼성물산은 제게 가장 친숙한 회사였는데도 기분이 상해서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현대종합상사 운송부에 가서 당시 가장 주력 수출품이던 철강에 대해 운임을 1불 씩 깍아주면 물량이 좀더 늘지 않겠냐고 했더니, 얼마나 놀라고 반가워하는지? 당시 운송부 사람들이 가장 기분 나쁜 것이 수출부서 사람들의 무시였는데,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처음으로 수출부서에 가서 큰소리 칠수 있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물량도 엄청 늘어날 것이라구요. 저는 바로 회사로 돌아가서 저희 쪽 담당 상무님을 만나서 말했습니다. "상무님! 큰 일 났습니다. 현대에서 우리가 삼성에 50센트를 더싸게 준 것 을 알아버렸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와 거래 안하겠다고 하네요." 당황하시는 상무님께 또 말했습니다. "위로 차원에서 삼성 보다 50센트 더 낮게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현대종합상사의 중동향 물량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현대상선에도 물량 예측을 해주지 않았으니, 다른 해운회사들이 배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국적선사를 위한 묘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철강과 시멘트에 대해 해당 항구에 국적선사의 배가 취항하지 않는다는 증명을 발급받아야 수출면장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대상선과 조양상선이 취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당시 전세계 해운업계를 주름잡던 범양상선 만이 경쟁자로 남았습니다. 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희 부서 차장님이 범양에서 오신 분이라 더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당시 해운업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범양의 전OO 부장님을 만났습니다. 범양의 배는 전세계 어디에 취항해도 큰 수익을 올리는데, 마이너한 마켓인 중동에 배선을 하며 골치아프실 필요가 있겠냐고?  대신 저희 배가 들어올 때 마다 조건 없이 5백만원 씩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전 부장님은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일텐데, 제가 말을 끝내자 마자 "천만원으로 하지?" 하셨고, 결국 7백만원에 딜이 되었습니다. 제가 라인을 맡고 6개월 만에 대표 국적선들과 경쟁하던 외국 해운회사가 독점 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돈 쓴 이야기를 하는 중에 별관계 없는 잘난 척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렇다보니   월매출 6억 정도에 순이익 2억을 올리는 라인이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회사 전직원 250명의 월급을 주고도 남았습니다. 리베이트로 월에 3천만원을 받아서 세군데 회사에만 지급하고, 월에 천만원 되는 돈을 열심히 써없앴습니다. 제게는 잠시 다니고 말 회사였기 때문에, 병상에 있는 대리님에게 가끔 가서 용돈도 드리고, 완쾌되면 제가 회사를 떠날거니까, 그자리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큰 위안을 주었죠. 제 월급의 20배를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술도 안먹고, 도박도 안하고, 여자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한푼도 남기지 않고 잘썼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안마 받는데에 쓴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일주일에 두번 정도를 하이야트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갔습니다. 시내 중심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정말 명당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틈만나면 이곳에 가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싼 음료도 있었고, 칵테일도 있었지만 저는 제일 싼 1,500원 짜리 레귤러 커피만 마셨고, 팁 문화가 없었던 시절인데, 항상 팁으로 천원 짜리 한장을 놓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3~4년을 계속 다니다 보니, 저는 그곳에서 꽤 유명한 손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가면 직원들이 묻지도 않고 커피를 들고 나왔습니다. 로비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직원들이 호텔 어디서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당시 하이야트 호텔 커피숖은 신라호텔이나 롯데호텔이 따라오지 못하는 핫한 곳이었고, 유명인사들로 항상 붐비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1993년 쯤인가, 로비의 시스템이 바뀌어서 레귤러 커피를 팔지 읺고,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스페셜한 커피만 파는 것으로 바뀌었죠. 그런데도 저는 항상 레귤러 커피를 마셨고, 가격표에도 없는 요금인 1,500원을 냈습니다. 한번은 대우 김우중 회장님이 제 옆자리에 않았는데, 제가 마시는 커피를 보고, 자기도 커피를 한잔 달라고 앴습니다. 주문을 받는 여직원이 저희 메뉴에 레귤러 커피는 없다고 하니, 김 회장님은 제 커피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은 뭐냐고 했고, 직원은 당황했는지, 저 분은특별한 손님이시라고 ...  그말을 들은 김회장님은 직원과 저를 번갈아 보며 웃으시더군요. 대인배 답게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으시는 웃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덜 띠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저는 특별해 보이려고 팁을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좋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좋은 생각하며, 있으니까 너무 감사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감사의 표시를 했었는데... 어쨌든 당시 하이야트 호텔 로비에서 저는 누구보다도 대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서초동에서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다가, 무역업으로 바꾸면서 성수동에 있는 친구 건물의 작은 방 하나에서 직원 한명과 일을 하다가, 자리를 잡아서 송파구 방이동의 번화가에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작지 않은 건물의 두 층을 썼습니다. 어느 날 경찰 두명이 거들먹 거리면서 들어와 제 방 소파에 앉으면서 말으 건넸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경찰을 좋아하지만, 이런 행동은 도저히 참지 못하는 편입니다. "당신들 뭐하는 겁니까?" 로 시작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할 정도로 잘못을 지적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다시는 누구도 우리 회사에 얼씬도 말라!" 고 하고, 내가 파출소를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추석에 정말로 파출소를 찾아갔고, 그 이후로 몇년 동안 추석과 설에는 빠지지 않고, 떡 값 봉투 스물몇개 만들어서 인사를 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취급하는 제품 중에 선물로 적합한 것 포장해서 같이 선물 했습니다. 그 파출소를 떠나는 경찰들은 거의 다 저희 회사에 와서 인사를 하고 갈 정도로 좋은 관계로 지냈습니다. 큰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기에는 파출소장부터 말단까지 다 똑같이 만원 씩 넣어서 주었던 것 같습니다. 돈은 주되 빼앗기지는 않는다 라는 생각이 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절에 IMF 를 맞았고 그 후로는 돈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사에도 돈이 없고, 제 주머니에도 돈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뛰고, 사업을 새로 벌이고, 투자를 받고, 꽤 돈도 벌었지만, 회사가 손해본 금액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IMF  가 있은지 5년 후에 미국으로 왔습니다. 돈 없이 와이프와 딸, 아들 네 가족이 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쓸 돈이 당연히 없었죠? 저는 나름대로 돈을 쓰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 두가지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불법체류 상태이고, 돈도 없고, 잘 벌지도 못하는데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돕는 정도가 제가 물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5불 짜리 지폐가 생기면 따로 챙겼습니다. 오히려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은 길로 다녔습니다. 5불을 받는 그들의 표정은 정말 저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돈으로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 도운 사람입니다. 아마 수백명 이상 될 겁니다. 

두번째는 팁을 많이 주는 것입니다. 미국에 온지 몇년 되지 않았을 때,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야간에 콜택시 운전을 했습니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열 몇분 계셨는데, 모두 힘들게 사시고, 고객으로부터 받는 팁 몇불에 희비를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하나 같이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을 때 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생하시는데, 나누면 좋잖아요?" 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부터 저도 팁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2불 씩 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 기분이 좋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거의 가장 싼 것을 주문합니다. 12불 짜리 먹고 2불 주기 보다는 10불 짜리 먹고 4불 줍니다. 커피도 제일 싼 커피를 주문합니다. 그리고 1불이라도 팁을 줍니다. 작은 돈으로 세상이 조금은 밝아 집니다.  

이 두가지에 대해 가까운 분들이 반대 하십니다. 몸 멀쩡한데 일하게 해야지 구걸하는 데에 자꾸 돈을 주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거라고 하십니다. 잘 모르는 분들이 말씀하시면 그냥 웃고 말구요, 가까운 분들이 그렇게 말하시면 "저사람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아세요? 우리는 저사람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도와주던지? 말던지? 입니다. 제 작은 돈으로 저사람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죠!" 팁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자자신을 위해서 돈을 잘 안쓰는 편입니다. 식당에서도 비싼 음식 시키지 않습니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아까워서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팁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많이 줍니다. 자주 가는 집에서는 부담스러워서 많이 못주지만, 가끔 가는 곳에서는 기분 좋을 만큼 많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여러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많이 줘 본 사람입니다. 회사가 부도 난 후에 빚을 갚기 위해 정부 부처의 입찰에 꽤 관여했습니다. 한국 관광공사와 조달 본부에 저희 제품을 입찰하면서 리베이트를 준 적이 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제 돈은 받아도 된다더라고 했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입찰에 지원한 회사 중에 3군데는 괜찮은 회사이니 그중 한군데를 물색해서 도움을 주세요. 금액은 합리적이었습니다." 참 쉬웠습니다. 업체 명단과 담자아자 이름 받아서, 나름대로 조사해 보고 전회해서, 만나서 느낌이 좋으면 그 회사를 밀어주었습니다. 성사되면 5% 받아서 제가 1% 취하고, 4% 를 건네주었습니다. 주로 강남에 있는 비지니스 호텔 커피숖에서 만나서 선후배 사이인 것 처럼 보이게 이야기 하고, 빵 담은 쇼핑백에 현찰 넣어서 주었죠 몇번 했습니다. 그냥 모두가 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입찰을 받은 회사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것 같습니다. 관계부처의 분은 누구에게 받아도 받을 것을 받은 것이고, 저를 통해서 받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받았고, 저는 욕심부리지 않고 받아서, 저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갚는 데에 썼습니다. 요즘 같으면 난리 날 일이, 그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전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저는 한국에서도 팁을 많이 주었던 사람입니다. 잘난 척하고 주지 않았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밥을 살 때도, 샀다고 과시한 적 없었고, 상대방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썼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여러명이 식사를 하면 돈을 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항상 얻어먹었죠?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서 어느 날 하나님께 "제가 예전에 돈을 낼 때 과시한 적 없잖아요?" 하고 따지듯이 말했더니 "그래서 사람들이 네게 사면서 너를 불편하게 하지 않잖아!" 하시더군요. 지금도 가진 돈은 없지만, 사업을 하다 보니, 그다지 돈에 구애 받지 않고 밥을 사곤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가끔 돈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돈을 가지지 않지만 돈에 대해 항상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가 가장 먼저, 많이 강조한 말입니다. 이미 아이들이 장성해서 자기의 경제관을 가지고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고,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살 수 있는 것 보다, 쓸 수 있는 돈 보다 한단계만 낮춰서 소비하라." 는 것입니다.     백만불 짜리 집을 살 수 있을 때 80만불 짜리 집을 사고, 10만불 짜리 차를 살 수 있을 때, 7만불 짜리 차를 사고, 만불 짜리 가방을 살 수 있을 때, 5천불 짜리를 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한 계산입니다. 자기 능력과 여건 보다 한단계 높게 소비하면, 결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고 욕을 먹을 확률이 높게 될겁니다. 반대로 한단계 낮춰서 소비하면 여유있는 삶을 살고, 돈 가지고 베풀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계산으로 되지 않습니다. 천억원 이상되는 부동산과 동산을 가지고, 제가 판단하기에 도저희 돈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저희 매형이 일년 만에 파산하게 되는 것이 삶이고 돈 입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제가 가진 돈 범위의 80% 한도 내에서만 사업을 벌인다고 자신했지만 IMF 가 와서 12억원을 30억원으로 결제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한순간에 모든 것이 틀어졌습니다. 건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세상입니다. 

열심히 벌고 돈을 아껴서 그 돈을 남을 위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지만 많이 쓰느라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고, 이를 과시하면서 돈을 쓰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가졌지만 과시하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을 조용히 도와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없지만 따듯한 마음으로 작은 돈이라도 도와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없다고 항상 불평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직원에게 일당 5불을 올려주는데, 어떤 직원들은 감사하다고 두번 이상 말하며 기뻐하고, 어떤 직원은 5불 밖에 안올려주냐고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100을 도우며 이것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100 이나 도와주었다고 말하며 다닙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잘 쓰는 사람일까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잘쓰기 쉽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잘쓰기 어렵습니다. 저희 매형, 어머니 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쓴 사람이 좋은 평판을 듣기 어렵습니다. 기대한 것보다 조금 주었다고 불만을 들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나는 왜 적게 주냐고 따지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조금만 써도 칭찬을 들을 것이고, 심지어 통장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아니 전재산을 다 털어서  남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세상을 밝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것을 권합니다. 10만불을 가지고 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교회에 헌금할 수도 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10만불로 천명에게 백불 씩 주실 것을 권합니다. 뱍뷸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한달 이상의 생명 양식이 될 것이고, 우리 주변의 홈리스에게도 희망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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