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7일 일요일

교회에 대한 기억들

 갑자기 내가 다녔던 교회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왠지 그냥 편안하게 지난 추억들, 느낌들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정말 즐거운 추억이 많았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처음 다닌 교회는 왕십리에 있는 '꽃재 교회' 였습니다. 여기서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태어나자 마자 받은 것이 아니고, 돐이 한참 지나서 받았습니다. 유아세례가 늦었던 이유는 아버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안되는 일이지만, 어머니가 권사셨고,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아마 아버님이 미국에 계실 때 세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교회에서의 어린시절의 제 기억은 딱 두가지 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을 때, 많이 울었던 기억과 어머니가 예배들릴 때, 교회 뒷마당에서 놀던 기억. 당시 목사님은 이문복 목사님이셨는데 부드럽고 인자하신 모습이셨습니다. 

7살 이후에 저희 가족은 이사를 가면서 꽃재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꽃재교회만 떠난 것이 아니고, 저는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어떤 교회도 가지 않았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지금은 올림픽 공원이 있는 오금동 이란 철거민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에는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치면서 전도를 하시는 손상철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신성학원 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꽤 많이 다녀서 그냥 놀러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보았는데, 촌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꽤 나 똑똑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공부도, 노력하는 것도 싫어했지만, 그래도 성적은 시내 명문 국민학교에서 5% 안에 들어가는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변두리라고 우습게 봤다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살던 동네의 아이들과는 아무도 연락이 안되니 , 이때 만난 친구들이 제 부랄친구인 셈입니다. 이 아이들 거의 모두가 오금중앙장로교홰에 나갔습니다. 학원에 다니려면 반강제로 이 교회에 다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갔죠. 백영승 이란 아이는 아버지가  상이군인들의 자활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백용하) 이셔서 예외를 인정해 주었죠. 그래서 저와 친구들은 모두 오금중앙교회에 다녔습니다. 사실 저는 예배를 무척 싫어해서 어떤 조건이 붙더라도 드릴 확률이 전무했는데, 재미로 참석한 겨울 성경학교 예배에서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이날로부터 중학교 2학년 봄까지 1년 반동안 토요일, 주일 예배를 한주도 빠지지 않고 드렸습니다. 원주민 50 가구, 철거민 400 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이 동네에는 장로교 한곳과 침례교 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지은 전도사란 분이 개척한 은천교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은천교회에 다니셨고, 제가 다닌 오금중앙장로교회는 박종무 목사님이 시무하셨는데, 부흥강사 타입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설교하시는 작고 단단해 보이는 목사님 이셨습니다. 같은 성에 돌림 자까지 같다고 저희 어머니를 전도하려고 애쓰셨지만,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감리교 출신이시고,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은천교회를 다니셨습니다. 오금중앙교회나 침례교회는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마룻바닥이 깔린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지만, 은천교회나 자활촌교회는 논 한가운데에 창고 가건물 같은 블록 건물에 장판을 깔고 예배를 드릴 정도로 취약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가울에 천호동으로 이사를 했고, 우리 가족은 천호동 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천호제일감리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가장 오래 됐다고 해야 1950년에 만들어진 것이니 당시로는 24년 째가 되는 셈이었죠. 같은 해에 만들어진 천호동 성결교회는 우리 교회 보다 많이 발전해서 1,500 멍 정도의 교인이 있었고, 우리 교회는 300 여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사 와서 10개월 가까이 저는 주일 저녁 예배, 수요일 예배는 천호제일감리교회에서 드렸고, 토요일 예배와 주일 아침 예배는 오금동에서 드렸습니다. 학생부에 등록은 중학교 2학년 5월에 한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체험한 성령의 뜨거움으로 뭔가 해야 했지만, 뚜렷이 하지 못했던 저에게 뭔가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것이 바로 천호제일감리교회 입니다. 천호동은 서울에서 가장 거칠고, 험악하고 지저분한 동네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색다른 동네였습니다. 

성결교회와 우리 교회 이외에 광성교회가 있었는데, 김창인 목사님이 개척하셔서 10년 정도 되었을텐데 이미 2천명 가까운 교인이 출석할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 삼광교회와 천호중앙교회, 이렇게 다섯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천성교회, 동광교회, 길리 교회 등 총 20 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누가 주동이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1970년 부터 광성교회에서는 축구대회를, 우리교회에서는 배구대회를, 삼광교회에서는 탁구대회를 성결교회에서는 성가경연대회를, 그리고 천호중앙교회에서는 성경퀴즈대회를 각교회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했습니다. 교회에서 지원을 하긴 했지만, 순수하게 학생들에 의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천호동 지역의 학생들은 매년 다섯번 씩 모여 축제를 했던 것입니다. 특히 5월5일에 열리는 축구대회와 7월17일에 열리는 배구대회가 있을 때에는 두달 전부터 각 교회 끼리 연습경기들을 가지며, 인근의 학교 운동장은 교회 학생들로 북적였습니다. 얼마나 제대로 했냐하면, 현역 선수들은 참가할 수 없게 했고, 그만 둔 선수들은 참가할 수 있었는데, 그만 둔 선수 한두명 스카웃 해서는 승ㅇ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꽤 수준 높은 대회들 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근에서 교회를 안다니는 아이들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서 교회를 나가게 되고, 또 온동 잘하는 아이들을 자기 교회에서 뛰게 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는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축구대회가 있는 5월5일에 동신중학교에는 참가한 열다섯 교회의 텐트가 쳐지고, 선수들만 해도 250명이 넘고, 응원하는 아이들, 그경하는 아이들로 1~2천명의 아이들이 모이고, 각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 교사, 도움을 주시는 학부모들로 아주 큰 축제가 벌어졌었습니다. 교회에 관계 없이 많은 아이들이 친교를 나누는 정말 좋은 장을 천호동 지역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회는 어쩔 수 없이 광성교회, 성결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의 삼파전 이었죠. 두 교회에 비해서 교인 수는 1/4 정도, 학생 수는 1/2 정도였지만, 제가 관여했던 5년 동안 우리 교회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모임이 왜 없어졌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광성교회의 김창인 목사님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의 결정에 제가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아픕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천호지역 학생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천호지역 각 교회의 학생회장과 총무가 참석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스물두개 교회에서 참석했습니다. 광성교회에서 적극적이어서 모임의 장소를 광성교회로 정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준비 위원 네 명이 김창인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네 명중 두 명이 광성교회 학생이었죠. 김 목사님은 좋은 일 하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하시면서 차도 주시고, 기도도 해주셨습니다. 첫모임을 가졌고, 교회 차원에서 간식도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가 회장이 되었는데, 그것이 조금 무ㅜㄴ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몇번의 모임을 가졌는데, 어느 날 광성교회 아이들이 난색을 표하며 담임 목사님이 연합회에 참가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제 광성교회는 자체 사역만 한다고... 몇일 후에 광성교회의 한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교인도 만명이 넘고, 학생부도 5백명이 넘는데, 연합회 같은 것을 만들면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고 뒤에서 돕고만 있냐고...  주일 저녁에 김창인 목사님 댁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만나는 주시더군요. 겁 없이 30분 동안 따지고 논쟁을 했습니다. 사실 화가 나서 따지러 갔지만, 목사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성교회 주최 축구대회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모든 행사가 없어졌죠. 그 유명한 명성교회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쯤 저희 지역 개척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교회 학생회가 자체적으로 문학의 밤을 진행하지 못해서 도와주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천호제일감리교회에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감리교회는 7개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저희가 속한 성동지방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897 년에 설립된 광희문 교회가 수장교회 였고, 이경제 목사님이 감리사셨습니다. 80년대 초에 감독이 되셨죠. 제가 태어난 꽃재교회는 이 때는 왕십리감리교회 라는 이름이었고, 만나교회를 개척하신 김우영 목사님이 시무하셨습니다. 이 교회도 1905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화양리에 현대식으로 건물을 가진 동부감리교회, 그리고 천호동의 우리 교회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 지방은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 주일 씩 '사경회' 를 개최했습니다. 1주일 간 하루에 4시간 씩 성경을 배우고, 저녁에는 부흥회를 합니다. 한국교회의 1차 부흥을 이끌어 낸, 개성과 평양의 그 사경회를 계속해서 해나온 것입니다. 저는 학생 시절 5년간 빠지지 않고, 사경회에 참석했고, 졸업 후에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몇번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개론, 신약개론, 창세기, 모세오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요한계시록 등 각 성경의 강의가 주를 이루었고, 조직신학의 주요주제들을 강의했습니다. 각 과목을 들으면 시험을 치루고 패스해야 이수증을 주었습니다. 6년 이상 참석하여 24과목 이상을 패스하면 장로 고시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어른들도 직장에 휴가를 내시고 참석하시기도 했습니다. 한 사경회 마다 대략 20 개 정도의 과목이 개설되었고, 저는 30개 과목을 이수했습니다. 우리 교회 학생부에서는 매년 30명 정도가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한시간 버스를 타고 나가서 오전 내내 강의를 듣고, 대개는 근처에서 점심 먹고 놀다가 돌아왔고, 가끔은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과 멀지 않아서 똑볶이 먹으러 가는 것이 즐거움 이었습니다. 광희문교회나 신당동이 제가 다닌 장충국민학교와 가까이 있어서 제게는 아주 익숙한 지역이어서 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녔었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천호지역의 5개 행사에만 참가해도 한해가 바쁩니다. 여름방학에는 수련회가 있고, 가을에는 문학의 밤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학생회지 '밀알'을 만듭니다. 봄방학에는 산상기도회에 갑니다. 겨울방학에도 개별적으로 한번씩은 기도원에 갑니다. 부활절 칸타타와 크리스마스 준비, 새벽송, 송구영신 올나잇 준비 등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목회자나 교사의 도움 없이 자치적으로 했습니다. 특히 고등부 3년 간은 방학이면 항상 금요일은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통금이 있었던 시절이라 11시30분에 시작하면 새벽 4시까지 쉬지 않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매주 화요일에 교회에 모여 신학을 연구하는 모임을 모였습니다.  당시 만연했던 해방신학과 토착화신학이 주요 논제였습니다. 우리 교회 일만 가지고도 정신이 없는데, 인근에 작은 교회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문학의 밤에 가서 음향, 조명 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감리교 성동지방은 공부만 한 것이 아니고, 매년 가을에 지금은 세종대학교인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40여개 교회가 모여서 여러가지 종목의 시합을 하는데, 훨씬 큰 교회들을 제치고 우리 교회가 항상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의 효시라고 할 정동교회를 참 좋아했습니다. 저쁜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좋아했지만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도 좋았고, 다동에 있는 영락교회도 좋았고, 명동 성당도 좋았지만, 정동교회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덕수궁 돌담을 돌아서 정동교회로 걸어내려가면 벌써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낮은 나무들이 정겹습니다. 항상  라일락 향기가 풍겨날 것 같은 교회입니다. 본당에 들어가면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할 정도로 많은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보고 지낸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충현교회 앞을 자주 지나다녔는데,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드나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쌍림동인가 정확치 않지만 광림교회 앞을 지날 때에도 느낌이 그랬었습니다. 나중에 광림교회가 유명해 지고 나서야 그곳이 광림교회 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저희 학교 근처에 김충기 목사님의 강남중앙침례교회와 강달희 목사님의 강남교회(?)가 이전해 왔습니다. 특히 강달히 목사님 교회에는 TFC(Teenager for Christ)b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고등학생들에게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강사들을 구성하고, 교재도 무료로 주고, 매일 간식도 주면서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했었습니다. 한달 정도 다녔던 것 같은데, 취지와는 조금 다르게 잘살고, 공부 아주 잘하는 애들이 서울대를 목표로 와서 공부하는 것이 되어서  이질감이 느껴져서 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공부하기 싫고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어서 그만둔 것이지만요. 저의 학생시절은 이렇게 좋은 교회, 은혜로운 교회, 그 기운 속에서 지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그 교회들을 떠올리면 왠지 유유히 흐르는 성령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그 기운들은 분명히 제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기독교반에 들었습니다. 수학선생님이신 김 철중 장로님이 만드시고 지도하셨는데, 불교신자인 교장선생님은 학교 내에서 포교활동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1년 동안 회의하고, 오락하다가 마쳤씁니다. 김 선생님은 안타깝지만 그만하는 것이 맞겠다고 하셨고, 저희도 동의했습니다. 2학년이 되었는데, 몇몇 친구들이 모여서 '서머나회' 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모임이 만들어진 지 3~4개월 뒤에 알게 되어 조인했습니다. 7~8명 정도가 모였는데, 청계천의 유서픽은 수표교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두명 있어서 수표교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정감있는 교회였는데, 청담동에서 매주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논현동에 있는 영동교회로 모임의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존경심이 나올 전도로 신실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고 3이 되면서 모임을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모임을 만들고, 또 교회들은 이런 모임을 지원했습니다. 개교회 중심이 된 현재 교회, 안전을 중시하는 지금의 교회들과는 왠지 다른 뭔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교회에서 MYF(감리교청소년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큰 감리교회들의 자문을 얻기 위해, 광림교회와 금란교회에 연락을 하고 방문 했었습니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압구정동의 광림교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교회 문도 열려있었고, 준비를 해서 저희를 맞아주었습니다. 참 기분이 좋았는데, 밈홍도 목사님의 금란교회에서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철옹성 같은 교회에서 30분 넘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분이 나오셔서, 줄 자료가 없다고 하셨고, 저희는 그냥 돌아와야 했습니다. 고3 때인지, 대학교 1학년 때인지 정확치 않은데, 삼성동을 걷다가 건물 지하에 큰 교회 간판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보리교회 였습니다. 영락교회와 박조준  목사님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기에, 한번 안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상업용 건물 지하에 생각 보다 아주 넓은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는 모두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생소했지만, 미국에는 이런 일이 많은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지났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여의도 순복음교회 5부(?) 예배를 가끔 드리러 갔습니다. 순복음교회를 싫어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저는 중학교 때 가끔 갔던 최자실 전도사님이 운영하시던 오산리 순복음 금식기도원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순복음교회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기도원 식당에 들어가면 큰 국통 두 개에 미음과 죽이 항상 데워져 있었습니다. "나도 빨리 금식을 끝내고 저 죽을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금식이 즐거웠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신유집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디 계신 분 일어서시라고 하고, 그분을 위해 손을 뻗어 기도하시면 정말 환한 광선 같은 것이 쏘아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지 버스의 승객 거의 모두가 순복음교회에 내렸었죠. 줄서서 들어가고, 줄서서 나오고... 제게는 참 기분 좋은 추억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문제가 좀 있어서 주일 예배를 다른 교회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대학에서 친한 후배들과 함께 교회 탐방을 했습니다. 연대 채플,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충현 교회, 정동 교회, 새문안 교회 등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은준관 목사님, 옥한음 목사님, 하영조 목사님, 믹창인 목사님  등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차를 마시며 설교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교회에서 안좋은 일이 있어서 외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히려 저와 후배들에게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고, 기분 좋은 추억입니다. 

1989년에 한국에서 침례교 세계대회 라는 것이 열렸습니다. 150개국에서 2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기독교 최대의 행사였습니다. 특별히 처음으로 소련에서 3천명이 참가를 하기로 해서 국가적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행사였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이벤트 회사가 기획을 맡았습니다. 잠실 주경기장과 학생체육관, 올림픽 공원 내의 모든 경기장들이 행사의 장소였습니다. 행사는 잘 치루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행사 기념품 중에 메인인 티셔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보통 저렴한 티셔츠를 선정했어야 했는데, 몇몇 목사님들이 주장하셔서 당시 소비자 가격이 1만원이나 되는 프로스펙스의 티셔츠로 하게 된 것입니다. 20만장을 주문했는데도 4천원 밑으로 내릴 수가 없어서 7천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사기간에 20% 도 체 판매하지 못했고, 결국은 주요 교회에서 행사판매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충기 목사님의 강남중앙침례교회, 한기만 목사님의 여의도 임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수원중앙침례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지구촌교회에서 주일 예배가 끝나고 아르바이트 생들을 동원해서 티셔츠를 판매했습니다. 결국 전체 물량 중에 절반도 판매하지 못했고, 농촌교회에 도네이션 했습니다. 국제상사 특판부에 결젷야 할 대금 8억 중에 5억 조금 못미치게 결제했는데, 국제상사에서 3억이 넘는 돈을 감면해 주었습니다. 특판부의 부장님은 이후에 회사를 그만두고 연예기획사를 차려서 저와 ㅙ 오랜 시간 관계를 가졌고, 그 부서에 대학 2년 선배 대리님이 계셔서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선배의 말대로 '국제상사 역사에 기억되는 호의' 를 받았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참석했던 교회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 그 네 교회들이 워낙 분위기가 좋은 교회여서 그런지, 눈부신 햇살 아래서 파릇파릇한 대학생 후배들이  색색가지의 예쁜 티셔츠를 열심히 팔던 장면들은 행복한 한 때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침례교 세계대회를진행하면서 운영을 맡았던 이세붕 복사님을 만났는데, 회현동의 성도교회를 다녔던 분이셨습니다. 이랜드를 만든 박성수 사장님과 운영본부장인 김영수 본부장, 그리고 다른 본부장과, 사목인 방선기 목사님이 모두 성도교회 청년부 출신이라고 햐셨습니다. 정확치는 앉지만 박성수 사장님이 대학 4학년 일 때, 김영수 본부장이 대학 1학년 이었고, 이세붕 목사님이 대학 2학년, 그리고 방선기 목사님이 청년부 전도사셨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너무 부러워서 성도교회에 가봤습니다. 회현동 언덕 중간에 있었는데 교회는 기대와는 달리 크지도 않고, 뭔가 있어보이지도ㅗ 않는 평범한 서민들의 중간 규모의 교회였습니다.  그래도 꿈이 있었고, 꿈을 이룬 교회라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1991년 경인지? 감리교 선교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침례교세계대회를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감리교선교사세계대회 라는 것을 주최한다고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님이 감독 회장 이셔서 광림교회에서 진행을 했습니다. 진행을 맡은 윤형주 집사님과 둘이서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회 고등부 시절에 조영남 씨와 함께 같이 성가대를 했다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용두동에 있는 동산교회라고 들었는데, 아마 꽤 오래 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주 정감이 넘치는 교회였고, 고등부 시절의 추억들을 나이가 들어서도 가지고 있는 기분 좋은 교회였습니다. 

온누리교회와도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1990년 정도인 것 같은데, 온누리교회 경배와 찬양이라는 모임이 한국교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병현 집사님 이란 분이 전화하셔서, 경배와 찬양 모임에 기획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이벤트 외사는 기독교  이벤트 전문 부서가 있어서, 반갑게 온누리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대학교 땨 몇번 예배를 드렸었고, 1987년에 처음 열린 예배부부를 위한 세미나에 몇 주간 참석했었기 때문에 친근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경배와 찬양을 맡아 사역하던 하 스데반 목사를 만났습니다. 하영조 목사님의 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주 소탈했습니다. 서로 간에 민증을 까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동갑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편안했습니다. 저는 이 경배와 찬양에서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너무도 많은 청년들이 찬양 사역에 삶을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기쁘게,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이. 사실 저는 온누리교회에 대해 돈으로 만든 교회다 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배와 찬양 팀과 일을 하면서 돈이 어떻게 쓰여지면 좋은 열매를 맺는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쯤에 한국기독교부흥사 협의회 '횃불 성회' 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갖고, 평양 까지 가서 집회를 갖는 계획을 세워놓고, 기획과 진행을 맡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안준배 목사님이 사무총장으로 계셨는데, 관리능력이 뛰어나나 보이셨습니다.  교단의 쟁쟁한 원로들이 거의 다 고문으로 참가하셨고, 운영은 화광교회 최이식 목사님과 임마누엘교회 김국도 목사님이 주로 하셨습니다. 최이식 목사님은 정말 날렌트를 가지신 신세대 부흥강사 셨습니다. 잠실에 있다가 문정동에 교회를 건축하셨는데, 주일 저녁 예배가 아주 뜨거운 부흥회 였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저의 느낌으로는 한없이 성장할 교회 처럼 보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렇게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임마누엘 교회는 저와 같은 감리교회였고, 같은 지방에 소속되어 있어서 사경회도 같이 했었기에 친숙했습니다. 단지 김국도 목사님의 성향이 너무 독단적이라고 알려져서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지방에 후발교회인데, 우리 교회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회의를 할 때도 김 목사님을 의도적으로 존중하지 않게 되더군요. 

1990년대 후반에 세계성가합창제 라는 이벤트 관계로 명성교회와 접촉했었습니다. 천호동 지역에서 부흥한 교회여서 가끔 예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개척해서 거의 실패한 듯한 기억이 있었는데, 8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부흥한 교회여서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가면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분들을 꽤 보게 되고, 머쓱해 하시며 얼른 피하시곤 합니다.  명성교회 대성가대 지휘자께서 제게 연락을 해오셨고 저는 도와 드릴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삼환 목사님과 두번의 미팅을 하고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너무 물질적이고, 너무 권위적이고, 너무 자랑이 늘어졌습니다. "좋은 일이라 돈 받지 않고, 봉사해 드리려고 했는데, 목사님과 생각이 너무 달라서 못하겠씁니다." 라고 하며 일어나 나왔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과 관계를 갖고, 교회들을 좋아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의 많은 부분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뉴저지 연합교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미국에 온 그 주에 중고등부 시절을 같이 지낸 김영호 목사가 찾아왔고, 교회 안정했으면 같이 예배드리러 가자며 "친구가 보목사로 있는교회와 친구가 담임 목사로 있는 교회 중에서 선택해." 하고 했습니다. 어디가 더 가깝냐고 했더니, 부목사로 있는 교회가 가깜다고 해서 간 교회가 뉴저지에서 가장 오래 된 뉴저지 연합교회 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감리교회 였구요. 지역사외에서 존경받는 연세있으신 나구용 목사님이 담임이셨는데, 첫날부터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려보니 너무 인재가 많은 교회였씁니다. 목사님 방에서 새신자 면담이 있었는데, 저는 "저는 교회에 은혜받으러 나오지 않고, 봉사하러 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너무 인재가 많으신 것 같아서 등록하지 않으려 합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목사님은 한국에서는 어떤 봉사를했냐고 물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고등부 6년, 청년부 10년 가르쳤다고 말씀드리고, 미국에서는 영어가 안되니 주차나 차량 봉사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은 바로  "중고등부 교사를 하시고, 시간이 되면 차량 봉사도 하세요!" 라고 하셨씁니다. 왠지 목사님에게 끌려서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 다음 주부터 바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8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마음껏 봉사했습니다. 교회에서 누가 봉사 제일 열심히 하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이 저를 지목했을 겁니다. 와이프도 잘 적응했고, 저희 아이들도 이 교회에서 아동부, 중고등부를 보내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떠난 지 10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우리 교회 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추억과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기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외에도 제가 몸 담았던 교회 세 곳이 더 있습니다. 한 곳은 저희 매형이 개척한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늘사랑교회' 이고 2년 정도 다녔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뉴저지연합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던 은혜와 사랑교회 입니다. 이곳도 2년 정도 다닌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연결이 된 맨해튼의 Broken Builder's Church 입니다. 전도사란 타이틀로, 간사라는 타이틀로 3년간 같이 활동했습니다. 이 세 교회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들도 있지만, 왠지 교회를 평가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제가 다녔던 교회 임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양로원 교회에서  연세 드신 목사님을 도우며 봉사하고 있고, 장애인들의 뉴저지 밀알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제 삶의 남은 시간 동안 어떤 교회를 만날 지? 어떤 교회를 만들어갈 지 모르지만 제 삶은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듯,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던 제가 만난 모든 교회에 감사하고, 그 모든 교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회에서 저 처럼 감사하고, 기뻐하며 아름다운 추억들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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