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3일 월요일

사업을 하려는 예비 사위에게

 *** 예비 사위는 지금은 사위가 되었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했던 사업을 통해서 내 삶을 돌아보는 글로 바뀌었습니다. 목적이 사위에게 하고 싶은 말이어서, 글은 반말로 썼습니다. 

20 여년 전부터, 나를 자제시키는 말이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충고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기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 신경이 쓰이는 말이다. 그러기에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는 이 글은 아마도 네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수많은 상황, 특히 선택의 상황에 직면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 내가 만나서 같이 일을 도모했던 사람들의 삶과 그 사람들과 내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사업하면서 나만큼 고생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고생을 많이 했고, 가족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 고생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충분히 나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를 현혹하는 사탄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우울증'  과 '사업' 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를 통해 사탄은 우리의 삶을 방해한다.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서 많이 했고, 또 이 블로그를 만든 목적 중 하나이니,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사업은 일단 돈을 쫓는 행위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쫓아야 하는 크리스찬에게 정말 맞지 않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두 주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이 세상에서 돈은 거의 하나님 만큼 위력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지니스는 양보가 어렵다. 크리스찬의 가장 큰 덕목이 양보인데,  이 첨예한 사업 환경에서 양보만 하라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겠지? 소송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사업을 하면 소송이 뒤를 따르기 마련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비지니스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동양에서는 회사를 '법인'  이라고 부르지. 마치 인격이 있는 것 처럼. 특히 사업을 정리하고자 할 때, 이 사업이란 것이 살아나서 우리를 유혹한다. "들어간 돈이 얼만데? 다음 달에 좋은 소식이 올거야!" 그러면서 뭔가 희망적인 싸인이 온다. 그러니 조금만 더 투자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는 것으로 결정하게 하지. 내가 한창일 때, 정설 처럼 떠돌던 말이 있었다. 1억 가지고 시작하면 2억 빚지고 망하고, 10억 가지고 사업하면 20억 빚지고 망한다고. 10억 가진 사람이 1억만 투자해서 사업한다고 계획을 세워도 여지 없이 가진 돈 다 투자하게 되고, 빚까지 지게 되는 것이 사업이다. 

내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돌이켜 보면, 나는 타고난 사업가일 수도 있겠다. 천재적이거나, 뛰어나다는 말이 아니라, 사업을 하게 생겨먹었다는 말이겠지? 국믹학교 6학년 때,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양계장에 개구리를 잡아다 팔았다. 기억에 열명이서 한 두 시간 잡으면 2~300마리 쯤 잡았고, 가져다 주면 1~2백원 받았던 것 같다. 거기에 내 돈 보태서 아이들과 순대국을 사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러고 노는 것을 안 동네 약재상에서 두꺼비를 잡아다 주면 50원 준다고 해서, 잡으러 다녔었는데, 몇시간 다녀야 1~2마리 잡아서 별 재미가 없었다. 나중에 삽으로 땅을 파놓으면 두꺼비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 방법으로 해서  조금 더 잡았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양초를 만들어 팔았다. 야쿠르트 아줌마에게 야큐르트 병 받아서, 을지로와 청계천 화공 가게에 나가서, 파라핀과 색소 사다가, 알콜 버너와 코펠을 이용해서 3~4 색깔의 초를 만들어 팔았다. 심지 처리가 잘 안되서 절반도 제대로 못타지만, 그래도 몇번 만들어서 만든 것은 다 팔았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겨울 방학에 미술부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서 팔았다. 명동의 중극대사관 골목, 소위 카드 골목에 나가서 제대로 팔았다. 고 3 때는 그 골목의 보안관 처럼 큰소리 치며 팔았다. 주로 미대생들이 직접 만들어서 팔았었다. 한번은 불법 노점상 단속차가 와서 카드와 좌판을 압수해 갔는데, 나는 그 시간에 중국 대사관 정문 앞의 빵집에서 미팅하고 있는데, 친구가 뛰어와서 알려주었고, 명동 파출소에 찾아가 거의 땡깡을 부리다시피 하면서 파출소장을 설득했고, 중앙우체국 주차장에 서있는 트럭에 전부 몰려가서 찾아왔다. 그리고는 모두 다시 좌판을 벌렸는데, 이때 부터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이 카드 골목의 대장 처럼 되었다. 하루에 몇백장 씩 팔았다. 몰룬 경찰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를 대학생으로 알았다. 후배들은 미술실에서 카드 만들고, 나와 내 친구들은 신나게 놀면서 팔았다. 고3 가을에는 잠실 고층 아파트에서 국화 화분을 팔았다. 한 친구의 이모인가 삼촌이 화원을 하셨는데, 잘못 팔고 계시다고 해서, 학교 수업 끝나고 열명 정도가 몰려가서 두세 시간 동안 지나는 주민들에게 강매하다시피 팔았다. 국화 사시라고 하며 집 앞 복도까지 들고가서 내려놓으면 거의 다 사주셨다.  

대학교 1학년 때는 교회에서 복음성가책을 만들어서 팔았다. 200 페이지 조금 넘은 책이었는데, 예쁘게 만들어져서, 교인들에게만 판 것이 아니라, 동네 서점 두 곳에 놓고 팔았다. '명희 서점' 에서는 추가 주문도 나와서, 그곳에서만 아마 백권 넘게 팔았던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때, 친구 주환이 아버지가 학교 앞에서 운영하시던 당구장을 팔려 하셨는데, 당구장 잘되게 해서 비싸게 팔아서, 차액 나누자고 제안하고, 6개월 동안 당구장을 운영했다. 여자 후배들을 아르바이트로 써서 인기가 있었다. 당시 멕시코 청소년 축구 4강 신화의 주역인 신연호, 김종부 같은 후배들이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얘들이 당구치러 오면, 여고생 팬들이 몰려와서 당구장을 가득채우곤 했었다. 당구장은 성공적으로 팔렸고, 차액으로 3백만원 받은 것 같은데, 유흥비와 학교 앞 분식집, 술집, 여관 외상 값 갚는 데에 다썼다. 학교 앞, 식당, 술집에 몇십만원 씩 외상 값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던 86년에 학교 앞에 카페를 차렸다. 어머니에게 협박을 하다시피 해서 받은 1,800만원을 들여서 차렸다. 잠실 시영 아파트가 1,500~2,000 만원 할 시절이었으니, 꽤 큰 돈이었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서, 12시 까지 내가 운영하고, 12시부터 저녁 10시 까지 이민을 앞둔 익보라는 친구가 운영했는데, 2년 운영하고 1,300만원에 친한 친구에게 넘겼다. 이 왠수 같은 익보가 운영하면서 매일 저녁 학교 농구부 애들과 자기 친구들 불러서 술판을 벌리는 통에, 렌트 내고, 재료비  갚느라 빚이 생겼고,  어쩔  수 없어서 전문 사채를 썼다.  이자도 엄청 불어났고, 친구는 자기 가게라고 뻥을 치며 또 개인적으로 빚을 졌다. 내가 매일 아침 6시10분 쯤에 가게에 오면, 홀과 주방이 모두 난장판이었다. 돈통에는 동전만 있었다. 서둘러 정리하고, 급히 수퍼에 가서 재료를 사다가 준비를 해놓으면 7시 조금 넘어서부터 손님들이 왔다. 도서관에 자리 못잡은 아이들이 주로 온 것이고, 아침에 좋은 음악 들으며 자판기 커피 보다는 수준 높은 커피 편하게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커피를 무한 리필해 주었다. 커피에 맞는 수입 과자도 주었고. 내가 선배인 줄 다 알기 때문에 거의 써클 실 같은 좋은 분위기 였다. 없던 돈 통에 만원 정도 만들어지면, 친구가 왔다. 나는 학교로 가고, 친구는 오전 매상 1만불, 오후 매상 2~3만불을 모두 들고,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놀러갔다. 이 생활을 1년 반 정도 했다. 이 황당한 상황을 1년 반이나 끌고간 나는 정말 한심한 사람이자, 턱없는 자만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돈을 믿은 것도 있지만, 이 시절에 나는 밖에서 꽤 짭짤한 돈을 벌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과외를 금지시켜서, 전부 리스크를 악고 몰래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의도에서 잘나가는 집 두곳에서 고액 몰래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번 씩 가고, 50만원과 60만원을 받았다. 토요일과 일요일만 가서 너댓 시간 하는 것으로, 대졸 대기업 직원 월급의 2~3배를 받았다. 이 돈을 다 카페에 집어넣고도, 사채를 얻을 수 밖에 없었으니, 친구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 이걸 자르지 못하는 나도 참 황당하지? 한 일년 동안 돈 잃고, 몸과 마음 고생 좀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였는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가게가 자기 건테, 내가 주인 행세를 한다고 주위에 말을 해서, 많은 아이들이 나를 나쁘게 보게 했다는거다. 이 친구가 이민 가고 나서 개인적으로 빌린 돈 일부를 내가 갚기도 했다. 이것은 내게 큰 교훈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은 정말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학교에 오면 4시30분 이었고, 5싱에 문을 열기 때문에 담을 넘어 학교에 들어갔다. 중앙도서관 숙직실 창문을 두드리면 고참 이과장님이나 신참 조대현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서관의 제일 좋은 자리에 앉고, 친구를 위해서 옆자리 한곳을 맡아놓고,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서 마시며 딱 1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6시 가까이 되면 도서관은 시끌벅쩍하고, 친구들이 고면 친구들과 2층 목록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떠들다가, 학교 앞 목욕탕에 가서 씼고, 태평양 이란 단골 분식집에서 순두부를 먹고 8시30분 쯤 학교로 돌아온다. 도서관의 제일 좋은 자리는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 반까지 내 가방이 공부를 했다. 와이프 회숙은 언제든 내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도서관 아저씨들에게 커피 사드리고, 빵 사드리고, 가끔은 정문에서 학생증 검사하는 것을 맡아서 해드렸다. 지금은 상명여고 교장인 후배 광석이 아버님이 도서관의 기계실을 맡아서 하셨기 때문에 관리하시는 분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겨울에 농구를 하고, 씼기 불편할 때에는 도서관 지하에 몰려가서 샤워를 하기도 했다. 카페를 하면서는 도서관에서 6시에 나와 카페로 향했다. 얼마나 참담한 장면일까? 생각하고 가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화도 나고, 눈물도 났다. 이 똑같은 일을 1년 반을 했다. 물론 언제든지 친구를 그만두게 할 수도 있었다. 내 우유부단함, 사람을 좋아하는 본성, 그리고 지나친 자신감의 결과였다. 이카페를 하면서 아침에 일찍 오는 손님들에게 조금 편이를 주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꽤 많은 것을 잃었다. 돈을 잃은 것은 당연하지만, 친구의 거짓말로 꽤 가까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가게를 팔고, 빚을 좀 갚고, 1천만원이 남았는데, 이것으로 결혼 비용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1백만원 밖에 남지 않았다. 결혼식을 위해서 친구와 선배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그리고 없는 돈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서 와이프에게 정말 미안하고, 피해를 주었다. 당연히 내려야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나 혼자 피해 보면 되지 하는 마음이 나 혼자의 피해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명예까지 잃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고도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해서 잠시 직장 생활을 했다. 지도 교수는 나를 받기로 했다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이야기 했는데, 정작 내게는 이야기를 안하셔서, 다른 선배를 밀어주려고 시험을 고의로 망쳤으니, 이도 참 황당한 일이었지. 다음 시험까지  6개월 만 다니려고 했는데, 눈치 빠른 이사 한분이 취직을 조건으로 3년간 일할 것을 제시했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중간에 빠져나와서 학교 박사 과정 수업 들을 자신이 있어서, 그러겠다고 하고 입사했다. 2년 만 다니고 그만둘 수 있었던 이유는 입사 6개월 만에 그룹 내에 다른 회사로 가라고 해서, 3년 옵션을 없애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회사를 옮겼기 때문이다. 옮긴 회사에서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내가 영업한 이익금으로 회사 전직원 250명의 임금을 주고도 남았다. 내 월급은 50만원 이었는데, 영업에 대한 리베이트로 매월 약 1천만원을 받았다. 전직원 한달 인건비가 1억7천 정도였는데, 내가 벌어준 이익금은 평균 2억5천이었다. 그러면서 회사의 어려운 일도 도맡아서 처리해 주었다. 출근은 남들보다 두시간 가까이 먼저 했고, 퇴근은 자유롭게 했다. 부서의 회식은 내가 시간이 될 때 했다. 여직원회의 파워가 막강해서, 임원들도 여직원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직 나 혼자만 모든 여직원에게 반말을  하며 지냈다. 참 황당한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어떻게 회사에서 이럴 수 있었는지 말하는 것이 좋겠다. 10월3일에 입사하고, 10월8일에 결혼을 했다. 사실 입사한 이유가 결혼하는데, 시험준비생 일 수 없어서 였다. 나는 사실 7월에 인터뷰를 하고, 특채를 한 상태이고, 다른 신입사원들은 9월에 공채를 통해서 뽑혀서, 같이 10월3일에 첫출근을 한 상태였으니, 뽑히고 3개월 만에 결혼한 셈인데,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는 출근 첫주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간 셈이다. 이 회사는 출근하고 4주 동안 업무를 안주고, 스스로 어떤 일을 할지를 착제하는 방식의 연수를 했는데, 나는 여직원들로부터 방법을 찾았다. 최고참 여직원 4명에게 해운 약관과 선하증권 약관을 번역해구고 같이 공부했다. 일주일 동안 매일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일주일 지난 즈음에 그중 한명이 왜 김성윤 씨는 우리에게 반말해요? 라고 가볍게 어필했는데, 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안면을 바꾸고 화를 냈다. 나는 존대말 못하니가, 나랑 얼굴 마주하려면 내 반말을 들어야 할거라고, 지금 선택하라고 몰아붙였다. 그럼 자기들도 반말할거에요 라고 하는 것을 나보다 어린 사람이 반말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고, 제일 나이 많은 여직원 한명만 서로 반말을 하고, 나는 모든 여직원에게 반말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연말 인기투표에서도 1위를 해서 여직원회에서 선물도 받았다. 회사의 임원들도 여직원에게 힘든 부탁을 할때는 나를 통했다. 

돈을 많이 벌어주게된 동기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 우리 회사는 우정해운, 공영상운, 우정해운항공,  우정전자, Lego Korea 로 나누어져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우리 회사는 우정해운과 공영상운을 말한다. 해운으로 시작한 회사이고, 공산권과 제휴 또는 영업을 위해 공영상운을 만들었다. 나는 공영상운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가진 FTI 라는 라인이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두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부장님에게 말을 했다. FTI 를 가지고 영업을 해보겠다고. 부장님은 고대 경제학과를 나온 나보다 10년 선배셨고, 대표인 상무님은 나보다 15살이 많으시고, 외대를 나오셨다. 두분이 점심 같이 하자고 해서 갔더니, 그 라인에 대한 전권을 줄테니 잘해보라고 했다. FTI 는 부산에서 컨테이너를 실어서 홍콩으로 보내면 홍콩에서 중공 국영선사인 COSCO 배에 태워서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서부지역으로 운항하는 해운 컨테이너 해운 라인이었다. 부산에서 홍콩 까지는 무료로 간다. 컨테이너를 디포지션 해야 하기 때문에, 트럭킹 차지와 항구비용, 상하차 비용만 낸다. 홍콩부터 어떤 웨스트 아프리카 포트에도 20피트 컨테이너는 800불, 40피트 컨테이너는 1,300 불 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해서 웨스트 아프리카로 직접가는 유럽의 배는 운임이 평균 4,500 불이었다. 바이어가 LC 에 Trans Shipment 를 금지하지만 않았으면, 수출회사는 한 컨테이너에 2,000 불 이상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7대 종합상사와 두산, 고합 등을 다 돌며 영업을 했다.  내 비지니스 인 것 처럼 열심히 했다. 금새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우정해운 쪽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주는 중동방면의 벌크 화물 담당 대리가, 교통사고가 났다. 이 자리를 빨리  매워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내가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안가겠다고 했고, 회사에선 발령을 내겠다고 해서, 나를 뽑은 기획이사에게 발령을 내면, 내가 입사하면ㄴ서 제시한 3년 옵션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고, 이사는 동의를 했다. 벌크 화물은 철강, 시멘트 등이 주였는데, 볼륨이 크고, 화물에 따라 요금이 다르고, 배의 특성을 고려해서 화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훨씬 묘미가 있었다. (주)대우와 현대종합상사가 1~2위를 다투는 고객이었고, 선경과 삼성물산이 3~4위, 효성과 쌍용이 5~6위의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영업을 하면서 보니, 전임자가 삼성물산에는 운임도 대우나 현대 보다 싸게 주고, 리베이트도 주고 있었다. 대우에는 리베이트라도 많이 주고 있었는데, 현대에는 가격도 안깍아주고, 리베이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삼성물산 담당자가 잘난 체하는 것을 두고 보기 싫었다. 삼성물산은 내 친구와 선배들이 정말 많은 회사여서,  나는 직장인 농구대회에서 삼성물산 선수로  뛰고 있었고, 2연속 우승을 했던 때였다. 그런데도 오기가 발동해서, 작전을 짰다. 현대종합상사 운송부에 가서 철강을 맡은 대리에게 , 우리가 운임을 톤당 1불 낮춰주면 혹시 물량이 늘어날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톤당 1불이면 협상 중인 오더들 다 성사될 거라고 했다. 만약 1불만 낮춰주면, 자기는 회사에서 스타가 될거라고,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냐교? 원래 대리점 선사는 커미션만 먹게 되어 있는 것이 해운업계의 룰인데, 우리는 톤당 4~5불 정도의 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불을 낮추는 것은 회사에 명분만 주면 충분ㄴ했다. 회사에 들어가서 담당 차장님과 상무님에게, 큰일 났다고 미팅을 해야 겠다고 했다. 현대에서 삼성물산에 톤당 50센트 씩 더 싸게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물량도 적은 회사에게 어떻게 더 싸게 줄 수 있냐교? 우리와 거래 안하겠다고 한다고 했다. 상무님은 내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셨고, 나는 보상 차원에서 톤당 1불을 낮춰주자고 했다. 상무님은 당연히 오케이 하셨고, 나는 현대에 가서, 1불을 낮춰주는 대신에 현대에서 중동으로 가는 벌크 화물은 우리에게 독점을 줘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대리님과 운송팀장님은 기뻐하면서, 사무실에서 같이 축배를 들었다. 운송부가 수출부서에게 처음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정말 고맙다고 했다. 현대 종합상사가 계열사인 현대상선에 물량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 독점을 주면서 중동 향의 해운 지도가 바뀌었다. 한국에서 벌크 화물을 싣는 배들은 범양상선, 현대상선, 한진해운과 조양 상선인데, 부정기적으로 취항을 했다. 부산에서 1만톤 이상 화물이 있고, 중동의 각 항구에 5천톤 이상의 물량을 내려야 취항이 가능했다. 외국 해운회사의 배로 벌크 화물을 싣고 나가려면, 상공회의소로부터 한국 국적선사가 그 화물을 취급할 수 없다는 WAIVER 라는 증명을 받아야 했다. 현대종합상사가 현대상선에 물량을 주지 않는 것은 그룹의 운영원칙상 안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했다. 현대 상선이 배선을 하려면 취항을 결정하기 45일 전에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대상선에서 요청을 했을 때, 현재종합상사에서 물량이 확정된 것이 없다고 하면, 현대상선은 배선을 하지 못했다. 한진과 조양은 거의 1년에 한두번 취항하는 상황이어서, 현대상선을 배제하고 나면 범양상선만 남게 되는데, 당시 범양은 배를 96척이나 가진, 세계 최대의 벌크 화물 해운회사였다. 세계 모든 벌크 화물이 범양의 계산 아래 움직인다고 봐도 될 정도로 자이언트였다. 우리 차장님이 범양 출신이었기에, 나는 차장님과 작전을 짰다. 범양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전 부장님을 만나서, 범양이 중동에 배선을 하지 않는 대신에 우리 배가  한국에 한번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500만원 씩을 드리는 것으로. 우리는 가서 5백을 제시했고, 얘기를 듣자마자 전 부장님은 1천만원을 달라고 했다. 5분도 되지 않아 700만원으로 합의를 봤고, 이것으로 우리 회사는 한국에서 중동으로 가는 엄청난 양의 벌크 화물에 대해 독점 회사가 되었다. 내가 우정해운으로 자리를 옮기고, 3개월 만이었다. 내 전임자가 한달에 8천만원 이익을 내던 라인을 맡아서, 한달에 2억5천의 수익을 내면서, 영업도 필요 없는 갑 해운회사가 되었다. 나는 한달에 한번 씩 종합상사 해운, 운송부를 돌았는데, "높으신 분이 여기까지 ...안오셔도 저희가 갈건데 ..." 소리를 들으며 1년 넘게 편안한 직장 생활을 했다. 내 진임자는 1년간 치료가 필요한 큰 사고였는데, , 전임자가 모든 종합상사에 리베이트를 주는 것으로 회사에서 돈을 받다갔기 때문에, 나는 차장님이 직접 리베이트를 전달하는 대우를 제외하고, 오직 삼성에만 리베이트를 줌에도 불구하고, 모든 리베이트를 다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봉급의 스무배에 해당하는 돈을 거래처 접대, 거래처 선물, 우리 직원들 회식비, 점심, 학교 후배들 식사, 술 값에 썼다. 나는 거의 매일 학교에 가서 후배들과 농구를 하고, 저녁과 술을 사주었다. 술을 입에도 안대는 내 접대는 아주 편안했다. 거래처 담당자와 매달 한번 씩 룸살롱에 가는데, 담당자 와이프 선물 좋은 것 하나 사고, 저녁 먹는 자리에서 룸살롱에서 쓸 돈을 미리 주면, 그 때부터 거래처 담당자가 그 돈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를 접대했다. 끝나면 와이프 선물 드리고, 현금 십만원 더 넣어서, 형수님 드리라고 했다. 대부분의 담당자는 나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나와 같이 노는 날은 와이프에게도 칭찬 받는다고...  벌크 화물의 묘미는 무거운 화물과 가벼운 화물을 잘 섞어서 Stowage 를 짜는 것에 있다. 무거운 화물만 싣거나, 가벼운 화물만 싣는 것보다 3~4배의 운임을 받을 수 있다. 

나는 회사에 남들 보다 2시간 정도 일찍 갔기 때문에, 아침에 임원들끼리 모여서 하는 일본어 강의에 참석했다. 6개월 동안 상무님, 이사님들과 같이 매일 수업을 했는데, 우리 회사 임원들은 우정전자 사장님만 서울대를 나왔고, 우정해운에 부산대를 나온 상무님 한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연대, 고대, 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주 친하셨다. 나는 연세 있으신 분들과 잘 노는 성격이라 편안했고, 일본어 여강사도 내가 연락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여, 수업시간 교재도 내가 결정하곤 했다. 어느날 아침에 임원들께서 큰 고민이 생겼다고 하셨다. 공산화된 베트남에 독점으로 취항하고 있었는데, 사고가 생겨서 노선이 취소될 위기에 처했다고 했다. 그 주에 해운항만청에서 해운회사 오너들의 모임이 있는데, 걱정이라고. 갑자기 회장님이 혹시 그 회의에 같이 갈 수 있겠냐고 하셨다. 다들 비서 데리고 나오는데, 우리는 여자 사무비서 밖에 없었다. 나는 기꺼이 회장님과 같이 회의에 갔다. 나보다 댓살 많아 보이는 운항계장이 나타나니, 연세 있으신 오너들이 정중히 인사하는 수즌을  넘었고, 운항계장이 건방져 보였다. 당시 해운항만청장은 진념 씨였는데, 나는 내가 잘아는 진경림이라는 애의 아버지가 진념 씨라고 알고 있었다. 고대 교유회 사무총장인 선배에게 연락을 해서, 해운항만청에  있는 교우회 명단을 달라고 해서 봤더니, 요소요소에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운항계장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갔다. 선배 한분과 통화를 해서 선배 이름을 팔고 운항계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운항계장과 만난 자리에서, 다짜고짜 청장의 딸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다. 운항계장은 아마 애인 사이처럼 느낌을 받았는지? 완전히 무드가 바뀌었다. 이때를 노려서 선배라고 부르겠다고 했더니, 반기면서 그러라고 했다.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다고 하면서, 혹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냐고, 선배님 선에서 전결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정도면 자기 선에서 마무리 된다고 했다. 나는 혹시 이런 일로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했고,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오라고 했다. 회사에 가서 임원들 모인 자리에서 내가 회사의 어려운 일을 처리해 보겠다고 했더니 회장님 이하 모든 분들에게 화색이 돌았다. 회사에서 나를 가끔 수퍼맨이라고 불렀다. 재는 이상한 놈이라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소리를 들었었다. 내가 해보겠다고 했을 때, 이미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회사가 소송당한 서류와 몇가지를 챙겨서 운항계장님을 만나러 갔고, 쉽게 처리되었다. 이후에 한두번 회장님 모시고 회의에 갔는데, 운항계장님은 나를 보면 거의 달려와서 인사를 했다. 우리 회장님은 덩달아 대우를 받았다. 이 즈음에 이란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대우와 현대가 이란 이라크 국경 철책 공사를 하고 있었다. 몇년 동안 두 회사가 엄청난 양의 Barbed Wire (철조망)  를 우리 회사의 컨테이너선을 통해 공급하고고 있었는데, 사우디의 항구를 통해 들어가던 화물이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일어났는데도 챌책 공사는 계속 진행이 되어야 했고, 두 회가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내가 맡은 일이 아니었지만 내가 나섰다. 먼저 삼성화재 인수팀에 있는 후배에게 전쟁특약 보험에 대해 물었다. 후배는 로이드를 통해 재보험율을 알아주었는데, 인보이스 밸류의 2%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컨테이너에 $400 이면 보험이 커버되었다. 요르단에 있는 컨테이너 운송회사를 찾아서, 1~3 위의 회사에 텔렉스를 보냈다. 사우디에서 트럭킹하는 것보다 $300 밖에 비싸지 않았다. 모든 회사가 자기네에게 오더를 달라고 계속 연락이 왔다. 이 운송라인이 만들어졌고, 운임이 더블 이어도 좋다고 부탁을 한 대우와 현대에게 운임의 50% 인 $1,600 을 추가해서 운송해 준다고 했다. 컨테이너 당 거의 천불 씩의 추가 수입을 만들어냈고, 두 회사로부터  표창장 줄 만큼 감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요르단 출장을 가라고 몇번 밀어붙였으나, 나는 안가고 다 처리했다. 나는 교통사고로 회사를 떠났던 대리님이 출근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된 날에 맞춰서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내 사표를 들고 나를 인터부했던 기획이사님이 보자고 했다. 대학원 경력 인정하고, 또 업적을 인정해서 과장으로 대우하겠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함께 사업을 하기로 한 7명이 고대에 가까운 신설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매주 세번씩 각기 직장을 마치고 모여서 광고회사와 무역회사를 차릴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벤트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벤트 아이디어가 많은 후배가 삼성그룹 창립기념행사에 대한 기획안을 삼성그룹 비서실의 담당자에게 제출했는데, 기존 한국의 이벤트 업체로서는 그 아이디어를 시연하기가 어려워서, 후배에게 혹시 직접 해줄 수 없냐고 제의해 왔다.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첫 민간 행사였는데, 이 행사에서 3가지를 맡아 진행을 했다. 우리 멤버와 대학 후배들 십여명을 써서 3개월간 준비를 했고, 행사를 잘마쳤다. 생각지도 않게 2억원 넘는 돈을 벌었다. 우리 회사는 한국에서 이벤트업으로 등록한 첫번째 회사였다. 당시 한국에 행사를 전문으로 하는 3개 회사가 있었다. 코렉스 라는 회사는 동국대학교 응원단장 출신인 친구가 오너였고, 연 하나로 라는 회사는 연대 응원단 출신 2명이 모여서 했다. 그리고 FM 엔터프라이즈 라는 회사는 고대 응원단 출신 2명이 만들어서 운영을 하고 있었다. 모두 연배가 엇비슷했다. 우리 회사가 만들어진 후에 우리는 모든 비딩에서 오더를 받았다. 기획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삼성그룹 오더는 싹쓸이를 했다. 사내 행사, 광고 마케팅에서 이벤트의 비중이 커지자 삼성 그룹 계열사인 제일기획에서 이벤트 팀을 만들었다. 연 하나로의 파트너 중 한명을 스카웃해서 시작했든데, 처음에는 제일기획 이벤트 팀도 기획서를 만들어서 비딩에 참여했는데, 우리에게 전패를 했다. 안되겠는지 그 이후에 방침을 바꿔서 비딩에 참여하지 않고, 수퍼바이징 하는 것으로 해서 우리 기획비에서 10% 를 가져갔다. 당시 최기상 팀장이 기획비는 자기네가 먹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재료비와 인건비에서 남기라고 했다. 우리는 인건비에서 차액이 없었다. 견적에 제시한 인건비를 실제로 일한 사람들에게 그대로 지급했다. 나는 최팀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인건비에서 남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결국 재료비에서 눈치 보며 조금 남기려고 힘들여 기획하고, 시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가장 큰 고객인 삼성그룹의 오더를 다 포기했다. 이벤트의 주류가 기업체 행사에서, 방송 이벤트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방송국은 고대 인맥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벤트 회사들은 우리의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방송 이벤트를 보기 위해 '출발 돌격대장' 인가 하는 프로그램에 가봤다. 주 수입이 인건비 차액이었다. 한 주 방송을 위해서 2백명 정도를 동원했는데,  한 주에 인건비에서 2백만원, 기타 1백만원 남겨서, 매당 천오백만원 씩 꼬박 꼬박 벌 수 있다고 했다. PD 들과 같이 기획을 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있었고, 많은 인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포기했다. 기획에 대한 것은 받지 못하고,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인건비 차액 먹는 것은 맞지 않고, 또 PD 나 AD 의 전화에 24시간 스탠바이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갑의 자리에 서기를 원치 않지만, 한순간도 을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감당치 못했다. 

우리는 스포츠 이벤트와 전시 이벤트에 집중했는데, 노력에 비해 수익이 없었다. 삼성그룹체전을 잘했고, 이어서 1991년에 거의 국가적 행사로 치뤄진 침례교 세계대회를  문제 없이 진행했다. 해외에서 10만명이 참석했는데, 소련에서만 5천명이 참석했다.  안기부에서도 엄청난 인력이 배정되어 회의를 같이 했었다. 잠실 주경기장, 학생 체육관을 비롯해서 올림픽 경기장 모두를 사용했다. 이 행사에서 우리는 적자를 봤지만스폰서 중 하나인 국제상사에서 행사에서 판매한 프로스펙스 티셔츠 대금 2억원을  결손처리 해준 덕에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 

이후에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이 많이 왔다. 당시 찬양 집회로 큰 관심을 끌던 온누리 교회 경배와 찬양팀에서 연락이 와서 경배와 찬양의 잠실 주경기장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을 도왔다. 정말 젊고 예쁜 자원봉사자들, 찬양 사역자들을 보았고, 하 스데반 목사와 이병현 간사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 감리교 선교사 세계대회 라는 행사에도 관여했다. 보디 빌딩 협회에서 연락이 와서 만나 보니, 한국이 세계 보디 빌딩 업게에서 꽤 위상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 최고의 대회인 '올림피아' 에서 3연속 금메달을 딴 김준호 라는 스타가 있었고, 꽤 지명도 있는 여자 선수도 있었는데, 둘다 아주 잘생겨서 스타성이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올림피아 대회를 주최하게 되어서 도움을 요청해 왔다. 협회 관계자들과 유명 선수들을 만났는데, 협회 사무총장으로부터 두가지 말을 들었다. 저널, 매가진, 신문을 만드는 사람이 숭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단법인을 하나 만들면 평생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이다. 보디 빌딩 계에서 신 처럼 대접받는 Joe Weider 란 사람의 이야기를 인상깊게 들었다. 사실 우리는 대한체육회에 인맥이 많았기 때문에 사단법인 허가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개척 종목인 '컬링' 을 가지고 협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진행하지 않았었다. 실제로 신문이나 잡지는 대단한 비지니스 아이템이다. 내 절친이 해운무역신문이라는 해운회사에 관련된 월간지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는데, 광고 영업이 주업무였다. 회가는 대표와 편집장, 여자 편집기자 그리고 내 친구가 전부였다. 내 친구도 기자 로 명함을 만들어서 다녔고, 각 회사 대표들고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당시 해운회사와 관련되어서는 Shipping Gazette 가 1위, 해사 저널이 2 위 였고, 내 친구 회사가 3~4 위 정도 였다. 신문, 그리고 기자의 이름이 붙으면 대표나 이사들과 상대하게 된다. 언론은 그만큼 위력이 있다. 내가 의료기기 수입을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열심히 드나드는데, 거기서 '의약 신보' 에 다니는 대학 후배를 만났다. 담당 과장과 식사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근처 일식집에서 만났는데, 그 힘있는 과장이  내 후배를 접대하는 자리처럼 되었다. 이 계통에 의약신보와 약업신문 이라는 두개의 신문이 있는데,  보건복지부, 각 병원, 제약회사에 대해 완전히 감 이어서, 이 두 신문을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만들어서 3회 까지 진행한 이태원 거리 축제 라는 것도, 이태원 상인들의 회보를 만드는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시작이 되었다. 일년에 네번  타블로이드 판의 회보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상인연합회도 만들어지고, 신문 네번 만드는 예산은 5천만원 정도인데, 광고비와 도네이션은 1년에 2억원 이상 들어온다고 했다. 나는 신문과 잡지 사업은 정말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같은 인쇄시설이 필요 없는 세상에선 별로 어렵지 않은 정말 좋은 비지니스라 생각한다.

이벤트 전문가라는 분들을 소개받아서 만났다. 이런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계셨구나? 라고 안목을 넓혀주기는 했지만, 운영하는 것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주요 사업은 외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초청해서 한국 국가대표팀과 시합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키는 방송국에서 쥐고 있었다. 어느 나라 대표팀은 얼마 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방송국에 접대만 하고 다녔다. 사무실에는 직원도 없었고, 이틀에 한번 정도 들려서 메일과 팩스 체크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회사가 한국에 세곳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한국 이벤트의 개척자라고 하는데한편으론 반가웠다. 우리가 할 부분이 많이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배울 점이 있는 좋은 분도 만났다. 정동에 세실 극장, 극단 세실, 세실 아트 센터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극단 출신으로 여러가지 이벤트를 많이 만드신 분이셨다. 공간이 있어야 마음 놓고 좋은 공연, 이벤트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셔서, 말년에 세실 극장을 인수해서 세실 아트 센터를 만드셨다고 했다. 본인의 돈으로 한 것이 아니고, 뜻 있는 분들이 도네이션 해주셔서 자신은 운영만 하신다고. 이벤트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여야 한다고 하셨다. 서너번 뵙고, 식사 한번 한 것이 다인데, 꽤 친해져서 세실 극장은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세실 아트 센터는 현대식 건물이었는데, 덕수궁 돌담을 마주 보고, 바로 옆으로는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교회 건물만 있어서 언제나 조용하고, 좋은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엘리트 스포츠가 아닌 일반 학생들을 위한 전국 고등학생 농구대회를 만들었다. '고려대학교 총장배' 를 타이틀로 걸었는데, 첫 대회에는 서울, 경기 지역에서 50여개 학교가 참가했는데, 2회 대회에는 전국적으로 200 여 학교가 참가해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매스컴도 타고, 광고 스폰서도 붙고, 수익 사업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3회 대회를 고대에서 직접 주관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는데,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체육과 박사과정에 있는 한 선배가, 자기가 이 행사를 잘 진행하면 전임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사정을 했다. 고대 총장배 이기 때문에 총장을 포함해서 이사회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회도 없어지고, 그 선배도 자리를 잡지 못한 것으로 끝이났다.  

기독교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준비했다. '기독교 관련 종합 전시회' 라고 이름을 붙이고, 기독교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될 행사를 만들고 싶었다. 올림픽 펜싱 경기장을 빌려서, 250 개 업체가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했는데, 극심한 불경기가 닥쳤고, 상황이 좋지 않았다. 110 여개 업체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가 숫자가 점점 줄었다. 스폰서와 주요 업체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했다. 참여업체가 50개 이상이면 행사를 진행하고, 아니면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했다. 회사로서는 광고비도 많이 쏬고, 이미 행사장 비용도 냈기 때문에 30개 업체만 참가하더라도 진행을 해야 맞지만, 이렇게 되면 실망을 느낀 사람들이 다음에도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 걱정이 되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참가업체를 따져보니 40개 업체 밖에 되지 않았다. 행사를 취소한다고 또 광고비용을 썼고, 전국에 있는 만여개 교회에 취소 메일을 보냈다. 행사장에 사과의 뜻을 전하는 플랜카드를 붙이고, 인력을 동원해서 들어온 차량의 안내도 했다.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올라오신 목사님들에게 심한 욕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40개 업체로 전시늘 하는 것이 낫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자도 7~8천만원 정도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었고, 조금 실망하신 분들께 좋은 기념품이라도 드렸으면 좋았을 것이고, 참가를 준비했던 업체들도 준비한 것을 소개하거나, 오히려 더 잘 팔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항상 멋있는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데에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 

이벤트를 하면서 기업체 직원 선물과 판촉물을 취급하게 되었다. 전시회의 실패 이후에, 방송 이벤트의 포기를 선언하고, 직원 중 3명에게 판촉물 부분을 떼어내서 독립하게 하고, 무역업만 하기로 결정했다. 멤버들 모두가 떠났다. 자기를 위해서 떠났지만, 나를 위해서도 떠났다. 여직원 한명을 데리고, 성수동에 있는 친구 회사에 방 하나를 얻어서 들어갔다. 해운이나 운송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무역에 강점이 있었다. 중소 회사들은 수입이 적합한 사업인데, 수입만 하기는 마음이 불편해서 수출을 중심으로 하기로 했다.  맨 땅에서 시작해서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산 철강을 원했지만, 중소기업이 포항제철이나 동부제강 등에서 철강을 받을 수는 없었다. 가장 공을 많이 들였던 중국의 바이어는 효성물산에 연결시켜 주고 철강 분야를 접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플라스틱 사출제품이 경쟁력이 있었다. 당시 한남동에 월마트의 아시아 지역의 Buying Headquarter 가 있었는데, 이 아이템, 저 아이템 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각 분야별로 MD  가 있었는데, 이들의 전문성이 대단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샘플과 제품소개서를 들고 방문을 했지만, 온 사람 중에 3분의 2는 MD 를 만나보지도 못했고, 만난 사람들도 거의 5분 이상 시간을 갖지 못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내가 만나 본 MD 들은 전문가 중의 전문가 였다. 제품을 가져가면 그들은 제조업체 만큼 정확히 원가를 계산했고, 거의 오차 없이 판매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오히려 이들이 굉장히 편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제품을 그들 앞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됐다. 아쉽게도 1년 정도 드나들었지만 한 건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Macro 라는 유럽 최대의 유통회사가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그들은 Vender 와의 미팅을 1년에 네번 했다. 그들은 전화도, 샘플도 받지 않았다. 오직 한 페이지 짜리 제품 소개서만 받았다. 제조업체나 벤더들은 오직 한 페이지 짜리 제품 소개서에서 자기들의 제품에 대해 어필해야 했다. 이들과 두세번 만났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들의 축적된 경험과, 시스템, 안목에 대해서 나는 리스펙트 하게 되었다. 내 판단은 이랬다. 이런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제품 개발해서 못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IKEA 쪽을 써치하다가, 우연히 Kersten 이라는 네덜란드 시계회사를 찾아냈다. Station Clock 이라고 역에 걸려있는 까만 테두리에 둥글고 큰 벽시계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들은 절재 테두리를 고집하는 회사였기에, 싸구려 플라스틱 사출 제품이 모두 중국으로 넘어간 시점에서도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에서 철재로 스테이션 클락을 만드는 회사는 총 3군데 정도가 남아 있었고, 그 중에서 수원에 있는 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매달 40 피트 컨테이너 한대 씩을 수출했다. 나와 함께 오랫동안 일한 이명희 씨가 고앙을 컨트롤했다. 컨테이너 작업하기 전날 가서 검품하고, 공장 직원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고 돌아왔다. 한 3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회사의 유일한 수출상품이었다. 우리는 한 컨테이너로 직원 한명 월급과 사무실 렌트를 낼 수 있었으니, 해피한 아이템이었으나, 물량이 더 늘지 않았기에, 공장은 이 제품의 생산 라인을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배 누님이 세운조명 이라고, 아주 규모가 큰 조명 가게를 하고 계셨는데, 2층 쇼룸에서 Halogen Up Stand 라는 제품을 보았다. 아주 심플한 제품이었는데10만원 정도로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점원 말이 롯데 백화점에서는 18만원에 팔고 있다고 하였다. 백화점을 돌아보니, 대부분의 백화점 조명 섹션에 이 스탠드가 있었고, 17~18만원 정도이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대만의 조명공장을 서치해보니, 40 피트 컨테이너 기준으로 개당 FOB 가격이 $14 정도였다. 운송비, 관세, 부가세를 붙여도 13,000 원이면 충분했다. 어떤 벤더가 아주 비싸게 가격을 책정하고, 소량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백화점들이 사은품 경쟁을 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30만원을 구매한 고객에게 원가 23,000 원 정도의 사은품을 주고 있었다. 마침 미도파 백화점에 동서가 일하고 있었고, 상계점은 꽤 매출이 있었다. 수입제품으로는 사은품을 줄 수 없었다. 매출 예상이 어려웠기 때문에, 30% 정도의 수량 변동이 있을 수 있는데, 수입품은 이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마진이 넉넉했고, 30만원을 쓰면, 매장에서 17만원에 팔고 있는 제품을 증정하니, 인기가 있을 것이 확실했다. 계약물량은 15,000 개 였는데, 19,500 개를 준비하는 것으로 계약을 했고, 우리는 25,000 개의 물량을 준비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준비한 25,000 개가 다 나가고, 교환권까지 나눠주었다. 총 3만개가 나갔고, 보름 만에 3억3천만원을 벌었다. 이로부터 시작해서 롯데백화점을 제외하고, 전국의 거의 모든 백화점에서 우리 제품으로 사은행사를 했다. 컨데이너를 백화점 주차장에 놓고 사은품을 나눠주었다. 들고가기 좋은 부직포 가방도 만들어서 넣어주었다. 어떤 고객은 이 스탠드 받으려고 백만원을 쓰고 스탠트 4개를 받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대 히트를 치면서도 2년간 시작을 독점했다. 2년이 지나면서 경쟁업체가 생겼지만, 우리는 그때 이미 대만의 카오슝에서 유명한 회사가 되어 있어서 $8~9 사이에 물건을 살 수 있었다. 5년간 약 1백만 대를 넘게 팔았다. 기업체 직원 선물, 보험회사 사은품의 목록에서 한동안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가정의 10% 가 우리 스탠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의 경우 거의 모든 집에 우리 스탠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목이 뛰어난 후배가 있었는데, 어느날 한국도 선 블락만 쓸 것이 아니라, tanning oil 을 쓰게 될 것이라고, 미국의 Tanning Oil 대표 브랜드를 수입해야 한다고 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제조업체를 조사해 보니, 값싸고 대중적인 Hawaiian Tropic 이란 회사가 적합할 것 같았다. Miss Hawaiian Tropic 을 뽑는 이벤트가 방송에 가끔 나오기도 했었고. 친구와 후배가 미국으로 갔고, 어렵지 않게 Hawaiian Tropic 과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선 블락 제품 2가지와 태닝 제품 5가지를 들여왔다. 첫해에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정문과 에버랜드 안의 캐리비안 베이 두곳 에서만 잘생긴 남자 후배들을 아르바이트로 써서 판매했다. 제품 평균 가격이 $1 이어서, 원가는 천원 이었는데, 만원 조금 넘게 받고 팔았다. 첫해에 두 곳 합쳐서 6천만원 정도 팔았는데, 다음 해부터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화장품 유통은 대형 할인매장 추세로 나아가기 시작했었다. 명동에도 3층 건물 전체가 매장인 곳이 3~4군데 되었다. 대구와 부산은 더 대형 할인매장이 활성화 되었다. 태평양화학과 한국화장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제조업체가 할인 매장에 대해 을 이 되었다. 이 할인매장들이 하와이언 트로픽을 사기 위해 몰려왔다. 오직 여름철 장사지만, 우리 제품이 있어야 다른 제품을 팔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원가 천원 짜리 제품을 대형매장에 4천원에 주었고, 그들은 소매가 만원 도매가 6천원에 제품을 팔았다. 우리는 매년 11월에 그 다음 해의 필요 물량을 주문하게 했다. 절반을계약금으로 받았다. 계약금 4억을 받으면 2억으로 수입을 해서, 물건 내주면서 다시 4억을 받았다. 재고를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3년 동안 아주 재미있는 비지니스를 했다. 우리 회사가 수입 화장품 회사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 제품을 제안했던 후배가 회사를 나가면서, 그 아이템을 달라고 해서 넘겨주었다. 

실패한 제품들도 있다. 끓어도 넘치지 않는 일본 냄비를 들여다 팔았다. 시연 판매도 하고, 통신 판매도 했는데,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현재백화점 특판팀이 우리 냄비 카피 제품을 백화점 사은품으로 나눠주었다. 이는 꽤 큰일 이었는데, 대표이사에게 처벌이 가기 때문이다. 이당시 현대백화점을 운영하는 금강개발의 대표는 정몽구였다. 우리가 변호사가 슨 편지를 보내자, 현대뱍화점은 난리가 났다. 사실 현대백화점은 꽤 친한 거래처이기 때문에 소송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보상 차원에서 뭔가 큰 건 하나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현대백화점에서 전화가 왔길래, 농담으로 대표이사와 이야기 하겠다고 했더니, 난리가 났다.  담당이사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친한 대학 선배 한명이 동석했다. 고대 농수선수 출신인 선배였는데, 친하게 지내며 우리에게 도움을 준 선배였다. 나중에 사은품 결정할 때, 무조건 한번 우리 제품으로 하는 것으로 하고 정리했다. 이 냄비는 꽤 비쌌는데, 롯데백화점 본점에 놓고 팔았다. 어느날 매장에 갔더니, 가격을 할인해서 팔고 있었다. 생활용품 책임자에게 왜 우리에게 상의 없이 가격 내렸냐고 했더니, '완사입' 제품은 자기네 계획대로 판매한다고 했다. 그냥 우리 제품을 우리가 제시한 가격에 다 사준 것이었다. 롯대백화점에서 잘 나가는 과장 선배였는데, 항상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롯데 집안과 인척 간이기도 했던 선배였다.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은 친한 대학후배가 생활관을 책임지고 있었고, 우리 과 동기가 명품관 점장이었다. 그리고 전체를 총괄하는 이사는 같은과 7년 선배였다. 갤러리아 백화점과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다. 식당이나 커피숖도. 롯대백화점 임원은 70% 가 고대 선배였다. 이 중에서도 롯데 가족과 관계가 있던 하 부장님이 중심이 되서 도움을 주었다. 롯대와 인맥을 쌓은 이유는 내가 근무한 해운회사가 롯데백화점 19층에 있었던 이유도 있다. 당시 롯데 호텔 총무과장인 장 선욱 선배가 있었는데, 이 형과 자주 만나고, 식사하고 하면서 여러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 친분이 기여를 했다. 특히 롯데 호텔은 이 장 선배 덕에 뭐든 할 수 있었다. 장선배가 충무부장으로 있을 때, 인사팀장, 구매팀장, 감사팀장이 다 고대 나와 같은 동기였다. 장선배가 끌어준 것이었다. 이 세명은 호텔 내의 핵심부서 였는데, 사실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이들의 관계를 내가 가운데서 도왔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자기들끼리 비빌스럽게 해야 하는 대화가 있으면 내게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자리를 만들어 주고 일어나면, 이들은 업무 이야기를 했다. 장선배와 이들과 호텔에서 만나면 항상 이들이 내야 했다. 접대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이다. 한번은 구매팀장인 친구가 혹시 백자를 잘 만드는 공장이 없냐고 물어왔다. 양식기의 대부분이 백자인데, 처음 오픈할 때는 일본에서 들여왔는데, 마땅히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광주로 가서 도자기 공장들을 뒤졌고, 광주요에서 나와서 '광주도자기' 를 운영하는 김 주하 사장님을 만났다. 나는 김 사장님에게 롯데에서 원하는 품질이 가능할 경우, 50% 지분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샘플을 가져다 주고 제조를 했는데, 충분히 좋은 제품이 나왔다. 구매팀장이 전화가 와서, 검품팀에서 꽤 까다롭게 나올건데, 쎄게 나가라고 조언을 했다. 우리 직원이 트럭을 몰고 직접 납품을 하러 갔는데, 전화가 왔다. 검품에서 접시 라인이 평평하지 않다고 반품하라고 한단다. 직원에게 그냥 내려놓고, 너희들이 받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오라고 했다. 다음날 구매팀장이 잘했다고 전화가 왔다. 

도자기 공장을 다니면서 광주에 근거를 두고 도자기를 만드는 3세대 장인들을 만났다. 장인이란 타이틀은 전국 기능 대회에서 1등을 두번 하면 주어지는 타이틀이라고 했다. 내 또래의 여섯 명이 장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대단한 스승 밑에서 배우고 독립한 친구들이었고, 공교롭게 모두 내 또래였다. 광주와 이천에 살면서 주로 농사로 시간을 보내고, 1년에 네번 정도 가마에 불을 지피며 살고 있었다. 가마를 여는 날에는 모두가 함께 몰려와 잔치를 벌렸다. 잘 나오면 축하해 주고, 못 나오면 위로해 주었다. 광주도자기 공장에서 가까이 사는 친구의 잔치에 가서 여섯 가족 모두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가졌고, 이후에 몇번 만나서 제품의 판매를 도왔다. 한국관광공사의 명동 매장에 전시판매하게 해주었다. 이들의 공통된 소원이 일본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었다. 모두 일본 연수를 다녀왔고, 그들이 시설은 우리 보다 좋았고, 도자기 인구도 우리의 열배를 넘지만, 자기들은 충분히 숭산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이들에게 약속을 했다.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마음 아픈 일 중 하나지만, 이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당연히 IMF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참 많이 했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내 약속은 당신들의 꿈을 이루는 것을 내가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망했을 것이고, 몇몇은 술마시면서 나를 안주 삼아 씹어댔을 것이다. 얼마전 어떤 드라마에서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면 사기꾼 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못하면, 약속을 못지킨 사람이다.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알고, 약속을 하고 이익을 취하면 그것은 사기가 된다. 나는 그들에게 사기를 치지 않았다. 그들이 꿈을 이룰 좋은 계획을 세우고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지. 이 여섯 친구의 작품 중에서 아주 얇은 자완은 명동매장에서 잘팔려서, 공항 매장까지 확대햐야 판매를 했다. 없어서 못팔기도 했다.  

삼성그룹이 조선호텔을 인수하면서, VIP 멤버쉽 제도를 만들었다. 연회비를 내면 호텔 객실요금의 50% 를 깍아주는 제도였다. 제도가 생기자 마자 가입을 했다. 중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연회비의 몇배를 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입을 하고 나서 보니, 롯데 호텔은 아무 때나 가도 40% 를 디스카운트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깜빡했었다. 장선배는 50% 안쓰고 우리 호텔에 오는 것이니, 특별히 50%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몇년 간 롯데 호텔을 50% 요금으로 쓸 수 있었다. 롯데 호텔이 제주점을 오픈하게 되어서, 납품할 것이 많았다. 백자 그룻과 커텐을 납품하기로 했다. 잘 아는 커텐 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릇과 커텐의 오더를 거의 확정하고 있던 중에, 나는 도움을 받기보다 주는 쪽에 더 관심이 있어서, 엄청난 자재와 도구들이 들어가는 것을 부산에서 제주까지 배를 빌려서 운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해운에서 이런 운송을 Tramper 라고 하는데, 해운회사에서 나와 같은 부서에 있던 친구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기에 편안하고, 저렴하게 준비해 줄 수 있었다. 제주 롯데호텔 비지니스는 성사되지 못했다. 1999년에 내 회사가 부도가 났기 때문이다. 부도 후이 법적처리 문제, 금전적 처리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호텔은 2000년 봄 개관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어서, 결국 롯데호텔 대표까지 역임했다. 

내가 잘아는 선후배 중에 나는 세명은 대기업의 대표까지 할 사람으로 보고 있었는데, SK 텔레컴의 대표 가까이 접근했던 한 치우 선배는 최종현 회장이 급작스럽게 죽고, 최태원이 들어서는 통에 좌절됐다. SK 계열사인 부산도시가스 대표로 만족해야 했다. 또 한명 기대를 했던 김 태엽 이라는 후배는 아시아나 항공에 다녔는데, 상무로 진급한 상태에서 아시아나가 흔들렸고, 결국은 합병이 되고 말았다. SK 의 한선배는 내게 많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다. 학교룰 다닐 때눈 마이티 라는 카드 게임의 호적수였다. 포카에 관한한  지존 급이어서 한번도 돈을 잃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티 라는 게임에선 내가 훨씬 승률이 높았다. 직장 생할을 할 때는 이상하게 한 선배와 우연히 자주 만났다. 한선배가 SK 텔ㄹ;컴의 자금을 총책임지는 자금담당 상무에 올랐을 때, 나를 보자고 했다. 한선배는 사람들 모이면 나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데, 내가 사업에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불가사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한단다. 나는 머리도 있고, 꿈도 있고, 깡도 있고, 친구도 많고, 인맥도 좋고,이미지도 좋고, 말도 잘하고, 돈도 없지 않은데... 성공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데 왜 크게 성공하지 못할까? 그래서 자기가 내 성공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 했다. 몇일 수에 회사로 부르기에 갔더니, 고대 동창 두명이 더 나와있었다. 고객 포인트 선물 담당자와 기지국  개설 담당자였다. 생각해 보니, SK Telecom 과 관련된 것 중에 가장 쉽게 돈이 되는 사업이 두가지 인 것 같다고 했다.  선물 선정하는 것은 전문 분야 중 하나였고, 기존에도 한 두 아이템을 납품하고 있었다. 기지국은 SK 에서 장소를 찍어주면 그 범위 내에서 대 가능한 건물을 찾으면 되는 일인데, 내가 건물주와 계약을 하고, SK 에서 나와 계약을 하는 방식이었다. 계약을 잘하면 50% 까지 얹어서 받을 수 있고, 최소 10% 는 얹을 수 있다고 했다. 한선배와 동창들에게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나와서, 다음 날 전화해서 안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부탁할 때 도와달라고 했다. 최종현 회장은 자금 쪽에서 사장을 임명했기  때문에 , 전무가 아니고, 상무로 자금부문의 총책임자가 된 한선배가 대표까지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호의를 거절한 적이 많았다. 대학교 친구 중 하나가, 맥도날드 한국지사의 공채 1기로 입사해서, 맥도날드의 전무까지 됐다. 맥도날드의 이벤트를 많이 도와주었다. 한 2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데, 친구가 자기가 미안하니까, 편안하게 수입이 되는 아이템을 하나 주겠다고 했다. 트레이 위에 까는 종이를 납품해 보라고 했다. 현재 납품하는 곳에서는 몇년 째 많은 이익을 봤기 때문에 바꿀 때가 되었다고 했다. 매월 3천만원 씩 납품하는데, 자기들이 인쇄 공장에 의뢰해 보니, 매월 1,200만원 씩은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우리 회사  직원 인건비가 이 오더 하나로  충분했었는데, 나는 또 사양했다. 

어느날 같이 일하는 후배가 대학 2년 선배를 소개해 주겠다고 같이 회사로 왔다. 묘한 사람이었다. 엑스포 복권을 운영한다고 했다. 어떻게 복권회사를 만들었는지? 자기도 우연히 친구가 자기 아버지 일 좀 도와달라고 해서 접한 것이 주택복권 이었고, 사단법인이 명분이 있으면 복권사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직원도 많지 않았고,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 선배의 전화번호가 011-201-0007 이었다. 당시 이동통신이 생기면서 번호를 011-201-0001 부터 주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선배가 핸드폰을 두대 가지고 있었는데, 201-0005 와  0007 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번호였다. 비밀이 꽤 있는 선배였는데, 내게는 아주 호의적이었고, 가끔 와서 밥 먹고, 차 마시며 시간을 가졌다. 엑스포 복권도 자기가 100% 만든 것이 아닌데, 다음 복권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자신이 만들 것이라고 했다. 나랑은 언제든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과학복권을 만들었다. 물론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는데, 형수님이 어느날 형의 절친인 준현이 형이 대전 엑스포의 건설사업단장이 되었다고, 만나보라고 했다. 당시 오명 장관이 전체를 맡은 단장이었고, 건설부에서 올라갈 때까지 다 올라간 준현이 형이 은퇴를 앞두고, 건설산업단장을 맡게 되었는데, 전체 2인자의 자리였다.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준비위원회 본부에서 준현이 형을 만났는데, 나를 보자 몇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형이 생각이 나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형과 준현이 형, 문기 형, 그리고 한 친구 분은 형이 중학교 때 전남 화순으로 전학가서 만난 친구들이다. 아주 친했고, 형은 리더 역할을 했다. 형은 작은 키에 깡마른 몸집으로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개가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형과 친구들은 서울로 대학을 같이 왔고, 모두 함께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형과 친구들은 하숙을 했지만, 거의 우리 집에서 지내다시피 했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한번은 준현이 형이 학교 유도부원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준현이 형의 얘기를 들은 형은 혼자서 유도부실을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했고, 당연히 유도부원들은 사과하지 않았고, 형은 그들 중 한명을 때려눞히고 유도부장에게 1:1 로 붙어서 이기면 사과를 받기로 하고, 붙었고 이겼단다. 그리고는 유도부장이 준현이 형에게 사과를 하게 했다. 놀라운 것은 형의 친구들은 형이 유도부에 들어가서 당연히 이기고 나올 것을 알았단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우낙 월등해서 주위에서 아무도 형 친구들을 건드리지 못했단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에게는 유세도 안하고, 장난도 같이 치면서 좋은 친구였단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 머릿 속에 이상한 기억이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길거리에 있는 3층 집이었는데, 하루는 옥상에 올라가서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작은 얼음 덩어리를 떨어트려서 맞추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음을 작게 해서 사람들에게 맞을 때는  물 같이 되게 했다. 주로 여자들 머리에 맞추어 떨어트렸는데, 내가 동작을 놈 늦게 하는 바람에 같이 걷던 남자친구가 내 얼굴을 보았다. 그 남자는 아주 험상굳게 생겼고, 동네에서 힘좀 쓸 것 같은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였는데, 나를 보고 거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소리치고 우리 집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겁이 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3층으로 내려갔는데, 형이 그 깡패같은 남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시끄럽게 하고 있어. 너 누구야? 대답 안해? 한번 혼좀 나볼래?' 형의 소리는 대충 이랬고, 그 남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형에게 인사를 하더니 내려갔다. 나는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한다. 형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지만, 한가닥 할 것 같고, 또 여자 친구에게 위신도 세우려고 한 그 남자가 한마디도 못하고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간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준현이 형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형은 나와 나이 차이가 스물다섯살 난다. 보통 같으면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형에게 호칭만 형이라고 부르고 존대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나에게 있어서 형은 섬세하고, 정이 만ㄶ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형이 정치를 하기 원했다. 그래서 대학도 법대에 보냈는데, 형은 기계를 만들면 좋을 사람이었다. 이북 사람의 전형적인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니셨던 아버지가 두번의 부정을 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형을 당시에 가장 잘나가던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에 취직시킨 것이다. 당시 아버님의 친구 분들 중에 쟁쟁한 분이 몇분 계셨다. 김일환 의원, 태환선 장관, 전준항 교수셨는데, 전 교수는 민의원이면서 대학 교수를 하셨다. 당시 태환선 장관이 대한중석 사장으로 계실 땐데, 청탁을 해서 취직을 시키셨다. 형은 몇년 못다니고 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혼이 나며 계속 연구 같은 걸 했다. 어쨌든 준현이 형의 사무실에 앉아서 두시간 가까이 형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형 친구들에게도 존대말을 쓰지 않았었다. 준현이 형은 대전 엑스포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자기가 힘껏 돕겠다고. 형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게 보상하겠다고 했다. 나는 건설회사, 인테리어 회사들을 꽤 알고 있었고, 한두 군데 소개해서 큰 돈을 벌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왜 하지 않았는지 이유도 없었던 것 같다. 

건축에 관련되어서도 스토리가 한가지 있다. 어느 날 후배가 자기 삼촌이 인테리어 회사를 하는데,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단다. 별 생각 없이 만났는데, 시공테크 라는 꽤 유명한 인테리어 회사를 하고 계셨다. 내가 대기업과 거래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고 하시며, 대기업의 사무실을 꾸미는 일이 요즘 꽤 뜨고 있다고, 소개를 해줄 수 있냐고 하셨다. 따져보면 나는  해운회사를 다닐 때에도 7대 그룹 모두가 거래처였고, 이벤트 회사를 할 때도 거의 모든 그룹사와 거래를 했다. 백화점들도 거의 다 거래를 했고, 가장 큰 두 호텔도 거래를 했다. 얼마든지 소개를 할 수 있었는데, 조건을 듣고는 영 마음이 찜찜했다. 대기업의 담당자와 연결만 해주면 되고, 건축비용이 얼마로 결정되던지 간에, 나에게 전체 대금의 30% 를 리베이트로 주시겠단다. 그러면 그 30% 를 가지고 담당자에게 얼마를 주고, 내가 얼마를 가질 지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보통 담당자에게 10% 는 준다고 했다. 사무실 꾸미는 비용은 엄청났고, 내가 벌 돈도 말도 안되게 큰 금액이었다. 나는 한 곳도 소개하지 않았다. 소개하는 것은 내게 정말 쉬운 일이었다. 한번은 내 절친인 준철이란 친구가 나를 보자고 했다. 청담동에 집이 세채 있는 친구였다. 영동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담임 선생님에게 영어 과외를 같이 받았었다. 집이 학교와 붙어 있어서 너무 편했고, 서울대 미대 나오신 어머니는 정말 예쁘고 나이스 하셨다. 할아버지 집, 아버지 집, 자기 집이 붙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비어 있었다. 3채를 헐어서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125평 짜리 호화 아파트 30유닛을 지으려고 한다고 했다. 나에게 뭘 원하냐고 했더니, 공사에 대해서 같이 상의하고, 분양을 맡아 달라고 했다. 잘나가는 법조인 한명, 잘나가는 연예인 한명만 입주하게 해주면 된다고 했다. 조건은 좋게 해줄 것이니,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검사 너댓명 아는 것이 전부고, 이벤트 회사 할 때 연예인들을 좀 써보았고, 우연히 아는 연예인 몇명 있고, 연예인 농구단에 속해 있는 친구들 아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냥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미국에서 아키텍을 하다가 중대 건축과 교수로 있는 친구와 셋이 일주일에 한번 씩 모여 집을 디자인 하는 즐거운 일을 했다. 김 교수는 정말 뛰어난 아키텍 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매지션 이라고 불렀다. 공사는 현대산업개발에 맡겼다. 내 친구 준철이가 현대산업개발의 몽규와 국민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다. 나는 이 화화빌라를 분양해 주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 그리고 결과도 알지 못한다. 미국에 오면서 한국과의 모든 연결을 끊었기 때문이다. 

준철이란 친구가 했던 재미(?)있는 사업에 조금 관여한 적이 있었다. 소위 작전주 라는 것을 했다. 90년대 초반에 (주)중원 과 레이디가구 에 대한 작전주 사건으로 큰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당시 변 회장 이라는 작전주의 창시자 같은 분이 계셨는데, 내 친구가 갑자기 몫돈이 생긴 것을 알고, 제안을 해왔다. 내 친구는 성수동에 자동차 정비공장이 있었는데, 삼성자동차가 이 공장을 인수해서 서비스센터를 만들었다. 공장 땅의 인수대금이 400억 이었는데, 이것으로 공장을 수원으로 이전을 했다. 땅 사고 공사하는 데에 먼저 200억이 들어가고, 나머지 200억은 1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 200억을 가지고 중원과 레이디가구에 대한 작전주를 시작했다. 물론 오너 일가와 다 짜고 하는 것이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 같은 손쉬운 사업이었는데, 변회장을 믿지 못하는 오너 일가가 배신을 하고, 좀더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에 주식을 풀었다. 이 물량까지 확보해 가면서 주가를 올려야 하니, 자금이 부족했다. 200억의 현금으로 주식을 인수하기 시작하면, 인수한 주식을 담보로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5배 정도의 자금을 쓸 수 있었음에도 ... 친구가 내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내가 돈을 빌려준 시점의 주식 시세를 기준으로 해서, 나중에 돈을 빼줄 때, 이익이 남았으면, 원금과 이이금을 합쳐서 돌려줄 것이고,, 만약에 마이너스 이면 원금을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나는 자금이 없어서 매형에게 말해서 5억을 빌려주었다. 친구는 중원과 레이디가구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보유했지만, 결국 주식을 처분할 수 밖에 없었고, 조금의 적자를 보았다. 나는 얼떨결에 레이디가구의 대표를 할뻔 했다. 아니 내가 하겠다고 했으면 할 상황이었다. 친구는 5억을 돌려주었고, 나는 5백만원을 더해서 매형에게 돌려드렸다.  변 회장은 구속이 되었고, 내 친구는 검찰에 몇번이나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내게도 검찰에서 연락이 왔었다. 나는 전화로 하자고 하고, 사실 그대로 말했고, 조사관인지 검사인지는 내게 안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관계하려 했던 대단한 사업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국에 야쿠샤 조직 처럼, 건달 연합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건달이 끔이었던 상수라는 친구가 있다. 나는 이 친구를 대학교 때 만났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이 친구의 이름은 잘알고 있었다. 학원들이 밀집해 있어서, 고삐리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종로를  장악하고 있는 33 이라는 음성써클이 있었다.  엄청난 일화를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써클이었다. 어께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종로에서는 33을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등학생 인데도 종로의 업소들로부터 세금을 걷는다는 이야기 까지 돌았다. 그 33의 리더가 의성이, 상수, 동항 인데 이 친구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어디가서 낄 수 있었다. 친구들 이야기에 의하면 상수는 싸음을 그다지 잘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건달이 삶의 목표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그러니 왠만해서는 상수를 피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의성이를 만나서 절친이 되었고, 4학년 때 상수를 만나서 역시 절친이 되었다. 의성이와 상수는 견원지간 이지만, 나는 이 둘과 지금도 절친이다. 상수가 30대 중반의 어느 날, 내게 자기가 하려는 일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당시 상수는 미아리파의 보스였다. 원래는 상수의 바로 위 형인 상택이 형이 1977년에 스무살의 나이로 미아리를 장악했다. 미아리는 300개가 넘는 접객업소를 가진, 서울에서도 가장 큰 상권 중 하나였는데, 상택이 형은 친구 3~4명과 함께 수많은 싸움을 하여 보스가 된 것이다. 당시 강북에는 미아리 외에 청량리, 동대문, 용산, 신촌 등에 조직이 있었고, 이들은 자주 만남을 가졌단다. 물론 신상사의 명동파는 여전히 건재했고, 무교동도전라도 조직들의 결전장이 였지만, 순수한 서울 주먹들은 이정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무살의 상택이 형은 3~40대인 다른 조직의 보스와 친하게 지냈고, 형 동생 하고 지냈지만 확실하게 제일 큰 나와바리의 보스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20년이 지나니, 다른 조직은 밑에 있는 조직원들이 보스가 되었고, 이들과 상택이 형과는 나이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아도, 배분에서 차이가 나서 자연스럽게 리더로 자리메김을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동생인 상수에게 넘겨주고, 강남으로 갔다. 유명한 용팔이 사건의 용팔이와 한 팀을 이루고, 건설업에 개입했다. 상수는 머리가 좋고, 섬세한 친구여서, 가능하면 불법적인 일을 줄이고, 작고 안정적인 조직으로 운영을 했다. 직원 열다섯 명 정도의 주류도매 회사가 그의 조직의 전부였다. 전체 미아리 업소에 주류를 공급할 수도 있었지만 50% 에만 공급을 했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전라도 조폭들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끝까지 뺐지 못한 곳이 미아리와 청량리였다. 표적 수사의 대상이 되어 검찰 조사도 받았다. 상수는 구속을 피하기 위해 성균관대 종교철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원래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에는 깡패처럼 살면서도 교회 고등부 회장도 했다. 아마 이 사실을 아는 친구는 거의 없을거다. 상수는 건달과 양아치의 차이를 강조하며 살았다. 상수는 건달은 정의로워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인신매매와 마약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처럼 지역 연합회를 만들면 훨씬 더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으로 믿었다. 이 뜻을 가지고 경찰 조직과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검찰 쪽과 연계하기 위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먼저 서울지역 연합회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봤다. 상택이 형의 입지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부산의 칠성파와 서면파에도 각기 기본적인 동의를 얻었다. 부산의 이 양대 조직은 군소조직을 컨트롤 하기에 연합회 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보았고, 기간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연합회 회장을 맡는 것으로 했다. 서울과 부산에 연합회가 만들어지면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어려울 것이 없다고 보았고, 전국 연합회까지 만들 수 있다고 봤다. 경찰에서는 치안 유지에도 도움이 되고, 특히 인신매매와 마약을 막는 데에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혐조할 뜻을 비췄다. 상수의 친한 선배의 친형이 당시 경찰청장 이어서 더 협조를 얻어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검찰 쪽에는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아리에 있는 호텔에서 주먹 원로들과 서울 각 지역 보스들을 초청해서 1차 모임을 가졌다. 연합회를 만드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연합회로 인해 전라도 조직이 서울 경기 지역에서 자리 잡는 것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입장에서 견제가 있었다. 상수, 상택이 형을 포함해서 모임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정권이 바뀐 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나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다. 체질적으로 나는 머리 쓰는 사람들 보다, 몸 쓰는 사람들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흥미진진한 이 사업을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났다. 

다시 내 수입 사업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는 코닝, 코렐 브랜드의 그릇을 좋아했다. 잘 깨지지 않고, 가볍고, 잘 포개져서 공간활용이 정말 좋았다. 직원 선물이나 사은품으로도 좋은 한국의 유통망은 간단했다.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사장은 DK Kim 이란 사람이었고, 재래시장 유통은 이모상사, 백화점 유통은 다른 회사가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DK Kim 에게 연락하여, 통신판매와 특판 시장 쪽의 유통을 달라고 했다. 두번을 만났는데 거절당했다. 우리는 미국의 본사에 접촉했다. 여러 부서에 전화해서 너희의 한국 유통망에 문제가 있다고 메세지를 남겼다. 어느날 코닝의 Vice Chairman 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문제가 있냐는 물음에, 시대가 바뀌고 있고, 통신 판매와 홈쇼핑이 대세로 갈건데, 너희는 아직 재래시장과 백화점 두 라인만 가지고 있고, 이 둘은 홈쇼핑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는 회사라고, 우리 같은 특판과 홈쇼핑 전문회사에게 이 부분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전략은 쥬효했다. DK 로부터 전화가 왔다. 심기가 불편했겠지만, DK 는 호의적이었다. 우리가 잘해서 실적을 올려야 자기의 입장도 조금 좋아지는 묘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소품종 다량 주문을 했기 때문에 기존 유통업체 보다 훨씬 좋은 가격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대량구매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제품을 받아서,  초기에 홈쇼핑 회사로 승인을 받은 두 회사인 삼구쇼핑과 LG홈쇼핑 사이에서 저울질 하다가 LG  에 공급을 했다. 39 의 오너는 대학 선배였고, 여러 컨택 포인트가 있었는데, 그래도 LG 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보고 LG 를 선택했다. 이후로 4~5년간 LG 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LG 에는 서른명 정도의 MD 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의 제품개발을 도와주었다. MD 들의 리더인 전 과장은 같은 대학은 아니지만 나보다 2년 후배여서, 그냥 친한 선후배로 지냈다. MD 들의 회식 때 마다 초대를 받았는데, 나는 참석을 안했지만, 우리 회사의 직원 몇명은 참석을 해서 어울려 잘놀았고, 2~3변에 한번은 우리가 회식비를 내기도 했다. 여러가지 개인적인 문제들도 처리를 해주었지만, 전혀 갑을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LG 홈펴핑 가탈로그를 전국에 배송하는 일도 맡아서 했다. 우체국 보다 더 싼 요금으로 해주었다. 한전 검침을 대행하는 회사와 연결했다. 전국의 모든 가정을 한달에 한번 씩 방문하기 때문에가는 길에 150만부 되는 카탈로그를 가정에 전해주었다. 윈윈하는 아주 좋은 구조였는데, 우리가 두번 배송을 마쳤을 때, 한전에서 새로운 규정을 제정했다. 검침 대행 회사는 검침 이외에 다른 영리행위를 할 수 없게  규정을 바꾸었다. 우리 때문에  급하게 만든 규정이었다. 아쉬움이 남는 프로젝트 였다. 6개월 가까이 공을 들여서 준비했었는데, 단 두번하고 종료가 되었다. LG 와 참으로 많은 아이템을 했다. 도루코 칼을 판매할 때는 도루코의 이사 타이틀로 방송을 하기도 했다. 천연 송이버섯을 팔기도 했고, 광천 토굴 새우젓을 팔기도 했다. 공산품도 여러가지를 했다.  어느날 전 과장과 팀장 두명이 보자고 해서 갔더니, 우리가 제품 개발에 너무 출혈이 큰 것을 알기 때문에 보상 차원에서 최고 인기 제품들을 우리가 납품하라고 했다. 시즌 당 한가지 씩 1년에 네번을, 한번 방송에 3억 이상을 파는 제품들로 한 시즌에 3번 정도 방송하게 해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또 사양했다. LG 의 당시 대표는 최 상무님 이었는데, LG 홈쇼핑을 미국으로 진출시키는 기획안을 제시했다.  한 시즌에 카탈로그를 20만부 주면, 이를 캘리포니아와 뉴욕, 뉴저지의 한인 가정에 발송하고, 미국에 콜센터를 만들어 주믄을 받아서, 주문을 하면 다음날 한진 구로물류센터에서 제품을 픽업해서, 3일 내로 미국의 주문자에게 배송해 주겠다고 했다. 제품 가격은 한국 가격의 1.3배로 가능했다. 캘리포니아에 4대, 뉴욕과 뉴저지에 3대의 배송 차량으로 충분했다. 기획안에 싸인을 하면서, 6개월 이내에 시행하겠다고 했는데, 계약 후에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서 미국에  콜센터와 배송센터를 만드는 것이 지체되었다. 최상무님은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추석 때는 설날에 하자고 미뤘고, 설날에는 추석에 하자고 미뤘다. 이러던 어느날, LG 홈쇼핑의 오너가 바뀌었고, 내가 잘아는 대학때  농구 써클에서 같이 농구를 하던 선배가 오너로 부임을 했다. LG 홈쇼핑의 인사담당 이사로 있는 친구에게 저노하가 왔다. 태수 형 잘알지 않냐고, 나는 잘 안다고 했더니, 그 형이 오너로 부임했으니, 같이 식사 한번 하면 어떠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 해서 인사하고 약속을 잡으려 했는데, 전화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 힘들게 연결해서 점심 약속을 잡았고, 약속한 시간에 회사로 갔는데, 후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부탁하러 온 납품업자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격 급한 나는 내가 뭐 부탁하러 온 것도 아니고, 미국 진출 계약도 LG 에서 부탁해서 해주려고 하는 건데, 이런 분위기면 할 필요 없겠네 라고 하고, 점심은 나중에 하던지 말던지 하자고 하고 나왔다. 어쨌든 이 형에 대해 가졌던 좋은 느낌은  180 도로 바뀌었고, 다시는 LG 와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 형은 지금은 GS 그룹의 총수 자리에 있는데, 이 장면도 내가 가끔 후회를 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 형의 본심이 어땠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당시 힘든 내 상황 때문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형은 한마디 했을 뿐인데,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고않고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나온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이지 하는 마음이다. 물론 나는 이 형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담당자들이 3개월에 10억 씩 벌게 해드린다는 것을 계속 고사하고 있던 중고, 대표 역을 하던 최 상무님이 미국 프로젝트 좀 제발 빨리 진행하자고 하는 것도 바빠서 1년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니 이 형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이 형이 자리 잡는 데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초기에 나를 도와 준 인사담당 이사인 내 친구와 잘 맺어주면 서로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이 즈음에 컨설팅 비지니스라는 것을 했다. 식당 같은 서비스업을 대상으로 하는 컨설팅에 관심이 있었는데, 작은 식당 한 곳의 오픈을 도왔다. 부업이어서 부담은 없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촌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 친구가 한국에서 '마늘 왕' 소리를 듣는 사람인데, 마늘을 쓰기 좋게 분말로 만들어 파는 식품회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 경영대학원 내에 있는 컨설팅 연구팀에서 리포트를 이미 받아 본 상태였다. 리포트를 보니 학술적인 수준이었다. 나는 한달 정도의 기간 동안 시장조사를 하고, 리포트를 만들었다. 회사를 설립하는 것부터 특허 신청, 공장 설립, 머천다이징, 마케팅 까지 총 망라한 실질적인 보고서를 만들었다. 염 사장님은 이 보고서를 서울대 팀에다 주었고, 보고서를 본 서울대 팀은 자기네 보다 내가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며 손을 뗐다. 회사를 만들고, 공장을 꾸미고, 제품화를 위해 기계를 도입하고, 부분적으로 하청 공장을 물색하고, 광고 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것을 나 혼자서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직영 공장 설립을 위해서는 서산군 뿐 아니라, 서해안 경철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서해안 경찰의 책임자는  우 빈규 청장이었는데 정말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전체의 경찰청장과 친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소개를 부탁하지도 않았고,  그냥 방문해서 우 청장님을 만났는데 이상할 정도로 내게 잘해 주었다. 경찰청의 허가는 즉시로 해결이 되었고, 수질 검사를 잘 받아야 한다는 충고도 받았다. 당시 충남 지역은 대전에 있는 보건환경연구원에서 수질 검사를 했는데, 방문해서 채취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채취해서 제출하는 수준 높은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통에 공장부지의 지하수를 20% 넣고, 생수를 사서 나머지를 채웠다. 무난히 통과되었다. 직영 공장에서는 열풍으로 마늘을 건조하여 분말을 만들었고, 동결건조하여 분말을 만드는 것은 충주에 있는 농심라면 스프를 만드는 하청업체에 맡겼다. 송파구, 석촌호수 옆에 사무실도 얻고, 직원을 뽑았다. 광고도 여러가지로 만들었다. 주부 모델도 쓰고, 당시 잘나가던 개그맨 이경규도 썼다. 이 모든 것을 6개월 정도에 했다. 직원을 뽑고 조직을 갖추는 중에 문제가 생겼다. 경력이 꽤 좋은 총무부장을 뽑았는데, 내 중학교 5년 선배였다. 영업팀을 두 팀으로 만들어 경쟁을 시키려고, 1팀 과장은 성균관대를 나오고, 오뚜기 식품에서 10년 일한 사람을, 2팀 과장은 강원대를 나와서 삼양식품에서 10 년 일한 사람을 뽑았다. 1팀 과장은 계획이 거창했고, 브리핑을 잘했다. 2팀 과장은  직원들에게 매일 보고서를 받는 것에 최우선을 두어서, 직원들이 멀리 영업을 갔다가도, 늦게라도 회사에 들어와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해서 불만이 많았다. 아 둘에 대한 초기 평가에 오류가 있었다. 1팀장은 총무부장과 가까이 지냈고, 기존 거래처와의 안면으로 어느 정도 매출을 올렸다. 2팀 장도 꽤 오랜 시간 삼양라면을 영업하던 사람인데, 초기 매출은 1팀장에 비해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염 사장님에게 1팀장을 중심으로 영업팀을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염응수 사장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룸살롱을 좋아했는 지도 모르겠다. 총무부장과 1팀장과 함께 자주 술을 마셨다. 나는 염사장님에게 직원들과 자주 술 마시지 말라고 몇번을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을 한층 더 쓰기로 했다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나는 당시 오전에는 내 사업을 하고, 3시부터 와서 일을 처리했는데, 내가 모르는 일을 총무부장이 염 사장을 꼬드껴서 진행한 것이다. 염 사장은 명함을 회장으로 바꾸었다. 윗층의 거의 절반을 비서실과 회장실로 꾸몄다. 나는 염 사장을 크게 나무랬다. 나는 1년 단위로 컨설팅 계약을 했는데, 당시가 두번째 계약을 한 직후였다. 염 사장은 어차피 계약했으니 1년은 써야 하지 않겠냐고, 잘못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오후에 출근을 하지, 총무부장이 다가와서 회장님이 실장님 이제 그만 나오시라고 한다고 말을 했다. 조금 화가 났지만, 크게 호통을 쳤다. 당신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한거냐? 어떻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해고를 통보하냐?  내일 3시에 올테니까, 회장님 나와 계시라고 하고, 다음 날 염 사장님을 만나서 두가지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그 중에 하나는 영업 2팀이 회사를 먹여살릴 것이라는 것이었다. 영업사원에게 일일 보고서와 다음 날 계획을 쓰게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이 지금도 나의 기초가 되었다. 내가 손을 떼고 2년이 지나지 않아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이후에 한 건의 컨설팅을 더 했다. 영등포 쪽의 식당이었는데, 크지 않은 식당이고, 밥 먹으면서 주인과 이야기 하다가 서비스 개선과 마케팅에 대한 플랜을 간단하게 짜주었다. 하지만, 한두가지 바꾸는 것 같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잘되서 자금이 충분하거나.  완전히 문을 닫을 식당이  아닌 경우에 개선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IMF로 인해 주력인 무역회사가 부도날 때까지 사실 어떤 사업이던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어떤 패션 회사에서 제안이 왔다. 조흥은행 여직원 유니폼을 교체하는데, 여직원회가 전권을 가졌다고, 그 여직원회를 움직여서 자기네 디자인이 선정되게 도와달라고 했다. 이미지 좋은 후배들 세명을 배정해서, 여직원호 사무실에서 거의 같이 지내게 했다. 10억원이 넘는 프로젝트이고, 디자인에만 8천만원 정도가 책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이 참 쉬웠다. 1989년 쯤에 한국에 Amway 가 들어오려고 준비를 했다. 호주 쪽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으로 아는데, 일을 맡아서 하는 분이 후배의 이모님이셨다. 대학 나온 사람 열명 만 모아서 설명회를 할 수 있게 해주면, 20만원 씩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후배가 이모에게 "이 형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2백명도 모을 수 있어요." 라고 했단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친구, 선후배들이 참 많았다. 나는 사람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해서 도움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 원래 목표는 정치가 였는데,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제대로 정치를 해서 최고의 자리까지 가려면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전국 최댜 득표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의 강동구에서 출마할 것이었는데, 이 지역 주민 5천명에게 정치성금을 받을 수 있으면 10만표를 받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고, 나는 2년 준비하면 5천명의 후원자를 모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내가 정치를 하면 자금을 대주겠다고 하신 분도 있고, 후배도 있었다. 한분은 강동구 최고의 재력가셨고, 후배는 아버지가 전라도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내셨어서,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친구였다. 이명박 선배가 종로구에 출마했을 때도 가서 도움을 많이 주었던 후배였다. 이 후배는 언제라도 내가 출마한다고 마음만 먹으면 사무실 꾸려서 사무장 하고, 모든 자금을 다 대겠다고 했다. "형은 무조건 된다고. "

내 기억에 1991년에 중국이 개방되었다. 매형 한분이 잘 알고 지내는 박태호 란 분이 계셨는데, 한중교류협회 라는 것을 만들어서 회장 이란 타이틀로 운영하셨는데, 중국개방 전부터 중국에 드나드셔서, 한국 내에 아무 조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대우를 많이 받으시는 분이셨다. 91년 겨울에 모시고 함께 중국에 갔더니, 공항에서부터 우리가 중국을 떠날 때까지 공안에서 사복 경찰을 경호원으로 붙여주었다. 어떤 도시에 도착하던, 시장이 마중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에 가면 성장 까지 직접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주요 경제인사들이 한국에 진출하려고, 한국의 자본을 끌어보려고 애를 썼다. 2년 정도 규칙적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시장 조사를 했고, 많은 회사들을 만났고, 이들을 한국에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중국, 몽고, 러시아가 만나는 곳에 양복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강택민 주석이 전국인민대회에서 양복을 입고 나타났고, 몇몇 주요 인사들도 인민복을 벗고 양복을 입었다. 양복의 시대가 온다고 판단했고, 당시  중국에는 양복을 만들 시설이 거의 없었다. 단독투자를 인정안하고, 50:50 의 합자만 인정하기 때문에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동북 삼성에 백화점 일곱개를 운영하는 여자 동사장과 동업을 했다. 한국에도 두번이나 초청을 해서, 상당히 친한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다. 양측에서 각 50만불 씩 투자하여, 이 자금으로 한국에서 양복 만들 시설, 장비와 원단 부자재를 들여오기로 했다. 논노가 부도가 나면서, 논노의 양복 재단과 공정 책임자를 뽑았고, 제일모직에서 중고 장비들을 구입했다. 경남모직의 원단과 기타 부자재를 들여갔다. 공장은 치치하르 라는 중국 최북단, 최고 추운 지역에 있는 파트너의 백화점 위에 있는 창고에 꾸몄다. 한국에서 관리자 한명과 기술자 4명이 들어갔다. 시장과 주요 인사를 모시고 개업 파티를 하고, 다음 날부터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아침에 전화가 왔다. 공장 문이 닫혀있고,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파트너에게 전화를 했더니, 회담을 하자고 했고, 만났더니 대뜸, 생각해 보니, 공장은 자기네가 운영하는 것이 맞다고 결론 내렸단다. 이익이 남기 시작하면 그때 부터 배당을 해주겠다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었다. 나는 우리가 운영하고, 매달 일정 금액을 주겠다고 했다. 서로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시장이 개입했다. 시장은 연세가 많으신 유명한 한학자 출신이셨는데, 나와는 꽤 각별한 사이였다. 치치하르 시가 일산시와 자매결연한 도시여서, 매년 일산 꽃박람회에 초대를 받았다. 호텔과 점심, 차량을 일산시에서 제공했지만, 비서도 없이 혼자 오시기 때문에, 공식 행사 이외의 시간은 내가 거의 동행을 했다. 떠듬떠듬 중국어와 한자를 섞어서 대화가 어느 정도 됐고, 밤에는 속옷 차림으로 카드놀이를 하고,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었다. 공장 오픈 전에 두 해를 이렇게 지내면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시장님은 무조건 우리 손을 들어주었다. 매달 주기로 한 돈도 말이 안된다며, 이익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그때 그 금액을 지급하라고 했다. 오소정이란 동사장에게는 시에서 가진 다른 비지니스를 떼어주겠다고 했다. 공장은 있는데, 판매처는 없어졌다. 우리는 양복 공장을 작업복 공장으로 바꿔서 작업복을 만들어서 한국으로 수출을 했다. 영업은 간단했다 평화시장의 가장 큰 작업복 유통점과 구로공구상가의 가장 큰 유통점에 공급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두 곳이 다 자식들이 비지니스를 이어받는 시점이었다. 박성현이란 친구와 노해룡이란 친구를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94년부터 4년간 이 두 회사에 작업복을 공급했다. 4년 사이에 우리는 공장을 네개로 늘렸다. 97년 통계로 한국 작업복 시장의 15% 를 우리가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는구나 했을 때, IMF 가 터졌다. 어떤 수입도 할 수 없었고, 중국의 공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문제는 중국 관리자로 나간 친구가 회사 돈으로 자기 비지니스를 하다가 잘못 되서, 회사의 잔고가 마이너스 였다는 것이다. 치치하르시 농업은행으로 부터 30만불 정도의 론을 받았는데, 이를 정리하지 못하면 은행 담당자가 감옥에 갈 수 있어서, 그냥 청산을 할 수도 없었다. 친구과 기술자 네명에게 즉시 귀국하라고 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좀더 있겠다고 버텨서, 결국 8개월을 더 있으면서 체제비와 급여로 회사에 큰 부담을 주었다. IMF 가 시작된지 7개월 후에 주력인 무역회사가 부도가 났고, 이 상태에서 기술자들의 고액 급여를 한국의 가족에게 지급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중국에 일찍 진출한 탓에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한 컨설팅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만리장성을 일곱 번이나 올랐고, 백두산에도 두번을 갔다. 북경 시내 관광은 가이드할 만큼 다녔다. 치치하르에 공장을 오픈하고 1년 간은 매달 중국에 왔다. 북경에서 하루를 자고 치치하르로 들어갔고, 돌아갈 때도 북경에서 하루를 묵었다. 어떤 생각에서였는지 북경에서는 최고급 호텔에 묵었다. 당시에는 캠핀스키 라는 호텔과 쿨룬 이라는 호텔이 5성급 호텔이었는데, 쿨룬은 한자로 곤륜 이고, 내 이름의 윤 자와 같았기에, 왠지 항상 쿨룬에 묵었다. 중국에 다섯번 째 쯤 갔을 때, 박 회장님화 같이 가지 않고, 혼자 가게 되었는데, 가방 안에 선물로 줄 차량용 TV 를 스무개 쯤 가지고 갔다. 공항 세관에서 문제가 됐다. 나는 선물이라고 했고, 영수증이 있으니, 세금을 내라면 내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압수하겠다고 했다. 나는 강력하게 대응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내 통역은 싸우면 안된다고 난색을 표했다. 통역이 세관원과 이야기를 하더니, 절반은 압수하고, 절반만 주겠다고 했다. . 나는 됐다 싶었다. 더 큰소리를 냈더니, 공안이 왔다. 공안에게 통역하라고 했다. 이 세관원들은 부정하다. 내게 절반을 달라고 했다. 이건 범죄다. 공안은 세관원에게 정말로 그랬느냐고 물었다. 세관원은 아니라고 했다. 세관원은 안에 열어보고 주려고 했다고 변명했다. 공안은 그냥 주라고 했고. 나는 당당하게 가방을 뺏었다. 그리고 세관원과 공안에게 TV 한개 씩을 주었다. 이렇게 선물로 주려고 가져왔다고 말했다. 세관원과 공안은 공항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인사치레지만 나도 펑유 라고 악수하고 에어졌다ㅣ 평유는 친구라는 뜻이다. 이것이 내 중국에서의 마지막 입국심사였다. 내 손자뻘인 영남이가 아시아나 항공에 취직했는데, 잘 진급해서 공항에서 나를 마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내가 탄 비행기가 북경 공항에 도착하면, 트랩에 영남이가 아시아나 직원 제복을 입고 나를 마중했다. 내 가방을 들고 아시아나 직원 사무실을 통해 공항 대합실로 바로 빠져나왔다. 나랑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북경에서의 에피소드 중 한가지는 내 친한 친구의 친구들이 안기부 직원이었는데, 중국의 정보기관과 교환근무를 해서, 북경에 파견나와 있었다. 30대 중반이었는데, 꽤 직급이 높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저녁은 늘 함께 놀았다. 말단 들도 힘을 쓰는 것이 중국 정보기관인데, 이 두 친구는 간부급 대우를 받고 있어서, 어디를 가나 기관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룸살롱엘 가면 문 밖에서 기관원들이 경호를 섰다. 술집에서 이 친구들이 돈을 내면, 가격표의 절반만 내도 주인이 나와서 깍듯이 인사를 했다. 호텔로 들어올 때도 입구에 서너명 씩 거의 부동자세로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호텔에서 돈 주고 여자랑 자다가 신고 들어와도 괜찮다고 했다. 당시 함정을 파서 여자랑 자는 것을 적발하고, 벌금 엄청 물리고, 여권에 파렴치 범 이라고 찍어서 국외로 내쫓는 일들이 빈번했다. 나는 호텔 로비에서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호텔 로비에 있으면 한국 유학생들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 분이세요? 술 한잔 사주실래요? 가끔은 귀찮아서 일본 사람인 것 처럼 할 떼도 있었다. 당시 북경 최고의 클럽은 하드 락 카페 였다. 가끔 가보면 한국 유학생 들도 꽤 많았다. 

북경에는 또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감리교시학대학에서 천재라고 소문이 났던 내 친한 선배의 형이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식당인 경복궁의 주방장으로 있었다. 후성이 형은 거칠게 살았고, 20대 때 감옥에도 갔다왔는데, 요리에 관심이 있었고, 잘 배워서 유명한 주방장이 되었다. 북경에 오면 묵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이어서 올 때마다 들렸는데, 항상 자기가 계산하려 해서 나중에는 계산 다하고 연락해서, 커피를 같이 하곤 했다. 후성이 형은 요리 솜씨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업 수완도 좋았다. 경복궁에서 일하면서 투자자를 만나서, 동업으로 큰 한식당을 차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곳을 더 오픈해서 세곳을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만나기가 어려워졌고, 잘나간다는 소문을 듣는 정도가 되었다. 복경에는 내 조카 뻘 되는 부부가 사셨다. 북한 국적인데, 북경에 사는 북한 주민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조카 뻘인데, 나이는 나 보다 스무살도 더 많았다. 내 큰 매형이 1924년 생이셨고, 그 형님이 1914년 생이셨는데, 이 분의 자식이어서 내가 아버지의 사돈이니, 내게는 조카 뻘이 됐다. 그분들의 아들이 영남이고, 딸이 미옥이었다. 내게는 손자 뻘인 셈인데,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대학도 잘 나오고, 인물도 좋은 애들이었다. 조카 뻘인 두분과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자주 만나지 않았고, 직책상 그분들은 나를 만나면 안되기도 했다. 영남이와 미옥이는 자주 만났다. 돈을 버는 아이들이었지만, 용돈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유혹도 있었다. 중국에 두번째 갔을 때, 치치하르에 있는데 한국에서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다. 25시간 기차를 타고, 신깡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기차표를 궁할 수 없었는데, 치치하르 시의 공산당 서기가 편지를 써줬다. 역장에게 갔다 주면 알아서 해줄 거라고 했다. 삼권분립이 명확한 중국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공산당 서기다. 역무원이 내 가방을 들고 내 자리로 안내했다. 4명이 한방을 쓰는 귀빈용 침대칸 이었다. 북경까지 23시간을 가야했다. 2층 칸에 누웠다 잠시 잠이 들었다. 이야기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맞은편에 젊은 아가씨 둘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내 밑에 칸에는 짧은 머리의 내 또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중국말로 인사를 건넸는데, 내 밑에 있는 친구가 한국 사람이세요? 하고 물었다. 맞다고 하니, 자기 아버지가 만주로 온 사람이고, 자기는 한국말을 조금 한다고 했다. 맞은편의 아가씨들은 외모도 여느 중국 사람 같지 않았고 영어도 조금 했다. 중국어, 영어, 한국말이 섞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건너편 아가씨 중 한명은 27살의 의류 유통 사업가였고, 다른 한명은 패션 디자인을 배우고ㅗ 싶어하는 19살의 아가씨 였다. 옆의 아가씨 말에 의하면 하얼빈 최고 부자의 딸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차를 사준다고 해서 북경으로 아우디를 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이가 여덟살 차이 나는데, 친구로 지낸다고. 내 밑의 남자는 직업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냥 비밀 공안 정도로 알면 된다고. 이 친구는 나와 민증을 깠는데, 나보다 한 살이 적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이 되었다. 이 친구가 장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내가 탄 침대 칸은 최고 귀빈용 이어서, 돈 가지고도 탈 수 없는 곳이라고 했고, 나는 기차표도 없이 여기에 탔다고 하니, 내 자리는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는데, 자기가 내 이름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몇시간은 카드 게임을 하면서 이들은 맥주를 마셨고, 나는 맛을 들인 중국 티를 마셨다. 젊은 아가씨가 황당한 제안을 했다. 우리 회사를 통해 자기를 초청해 주고, 한국의 패션 디자인 학원에 등록시켜 주면, 내 사업에 투자도 하고, 자기가 살 집을 내 명의로 사고, 자기가 귀국하면 집을 내게 주겠다고 했다. 내가 한국의 아파트 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냐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업하는 아가씨가 웃었다. 중국 부자가 얼마나 부자인 줄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한다고. 아파트 한 동도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받았고, 한국에 나가서 알아 보고, 다음 번에 들어와서 연락하겠다고 했다. 초청은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이미 파트너를 초청한 적도 있었다. 학원 등록은 당연히 쉬운 일이었고. 하지만 하지 않았다. 꽤 예쁘고, 적극적이었던 것이 부담이 갔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서른세살의 아주 젊은 사업가 였기에, 그들이 보기에 매력적이었을 수 있었다. 내 밑에 칸의 친구는 저 아가씨가 사장님께 반했나 본데, 중국 부인 하나 두면 어떠냐고 했다. 갈등도 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 두번 그때 초청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생각하면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마 초청을 했다 하더라도, 적당히 신경 써주고, 하얼빈에서 대접 잘 받고 끝났을 것이다. 한번은 내가 투자한 도시의 부시장과 공안부장이 찾아왔다. 치치하르 시의 중앙 광장에 지하상가가 있었는데, 도시에서 최고로 번화한 곳이었다. 이곳에 슬럿 머신을 놓고 비지니스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인근의 다른 매장을 가봤다. 정말 계산 안되는 사람들의 돈을 그냥 긁고 있었다. 슬롯 머신이라야 전자 오락 기계였고, 한국에서는 7~80 만원이면 살 수 있는 기계들이었다. 100 대만 들여 오면, 한달에 1억을 번다고 했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한달에 1억 이상을 벌 것으로 보였다. 이들의 문제는 기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들여와서 재조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분해하고 조립하는  기술자 2명만 물색하면 되는 일이었지. 1년만 해도 꽤 큰돈을 벌 사업이었지만, 꺼림직한 것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때여서 정중히 거절했다. 

이상한 사업을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베스트 후렌드가 있었는데, 미국에 유학와서 운동화 비지니스를 했다. 국제상사 출신들이 나와서 패트릭 유잉 이라는 NBA 스타를 모델로 해서 33 라는 운동화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국제 파트를 담당했고, 뉴욕에서 운동화 가게를 몇개 하고 있었다. 이 친구에게 한국에 와서 우리 회사 일 도와달라고 꼬셔더 데리고 왔었다. 이 친구가 일본에 아주 큰 거래처가 있었다. 수입의류, 신발을 유통하는 회사였는데, 대단한 규모였고, 이 일본회사에 나이키 운동화를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나이키 가격이 한국 가격의 1.5배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매장에서 할인 받는 만큼은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한 2년간 꽤 많은 금액의 나이키 운동화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그런데Air Force I  이란 제품이 너무 인기가 좋아서, 일본 쪽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중국의 나이키 하청공장을 컨택해서 짝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이키 본사의 방침은 가죽 원단이나, 라벨은 10% 정도의 여분을 제공했고, Sol 이라고 부르는 신발의 밑창 고무 부분만 타이트하게 관리를 했었다.  나이키 운동화 고무 부분을 똑같이 만드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어서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한달에 한번 씩 중국 업자들이 샘플을 만들어서 찾아왔다. 한 컨테이너에 40만불 정도인데, 물량을 무제한으로 받겠다고 하니, 중국 쪽에서는 어떻게든 이 오더를 만들려고 난리가 났고, 샘플에 대한 심사는 나와 내 친구가 했다. 거래가 성사될 경우 우리의 몫도 한달에 최소 40만불 이상이었다. 일본 쪽에서는 야쿠자 조직과 세관에 라인을 만들어 놓았고, 우리 쪽에서도 선배 한명이 총대를 메고 사자ㅏㅇ을 맡았다. 네번째 샘플을 받아봤을 때, 친구는 이정도면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는데, 내가 반대를 했다. 금형 마감이 깔끔하지 않았다. 내 반대 후에 국면이 변하였다. 중국 쪽과 일본 쪽이 다이렉트로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래를 시작했다. 정말 검사 없이 세관을 통과해서 짝퉁 에어포스 원을 일본에 풀었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어졌지만, 중국업자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줄 알고, 우리에게 보고를 하였고, 몇개월 진행하다가 중단이 되었다. 큰 문제 없이 모두가 어느 정도 수익을 남기고 끝이 났다. 재미있는 비지니스가 하나 있었다. 대학 써클 후배가 사촌형을 데리고 왔다. 나보다 다섯살이 어린 조문익 이란 친구였는데, 도전을 좋아하고, 아이디어가 좋은 친구였다. 새우 양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에 양식장을 만들어서 한국으로 가져오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와서, 노량진 시장과 가락동 시장을 연결시켜 주었다. 계산 상으로는 괜찮았는데, 폐사율이 50% 가까이 되어 중단했다. 이 친구는 고민을 하더니, 양식장을 베트남으로 옮겼다. 그리고 퀄리티가 높아졌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에는 일본 회사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동경 수산시장의 공급업체 중 가장 큰 곳 두곳에 컨택해서, 동도 수산 이란 곳과 계약을 했다. 베트남에서 새우를 보내면 경매에서 팔고, 팔린 가격에서 동도수산의 커미션을 떼고, 우리 회사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고, 그 돈에서 우리 커미션을 떼고, 그 친구가 원하는 곳으로 송금을 해주었다. 심심하면 한번씩 새우 박스가 회사로 배달이 왔다. 나눠주고, 회사 밑의 횟집에 가서 오도리로 먹고, 삶아도 먹고, 튀겨도 먹고... 도와주면서 재미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도 문제가 있어서 1년 정도 밖에 진행을 하지 못했다. 안좋은 사업도 하나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함께 사업하던 친구가 미국에 있을 때, 많이 수입해서 판 니트 스웨터가 있는데, 지금 한국에서 잘 나갈 것 같다고, 수입해 보자고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아니어서, 40 feet 한 컨테이너를 수입했다. 백화점에서 팔려면 수입 가격을 표시해야 하는 것으로 법이 바뀌어서, 백화점에서 팔 수 없게 되니, 별로 판로가 없었다. 몇달을 끼고 있다가, 원래 친구가 운영하던 미국 쪽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아침에 출근을 하니, 문 앞에 형사 느낌을 풍기는 사람 둘이 서있었다. 허리 춤을 보니 수갑도 차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관세 문제로 조사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회사에서 조사를 좀 해도 되겠냐고 했고, 그러라고 했더니, 한명은 내 방에서 나와 커피를 마시고, 다른 한명이 여기 저기 뒤지더니, 잠시 후에 득의만면한 모습으로 서류 화일 하나를 가지고 왔다. 내 앞에 있는 친구에게 "이거 대박인데요!" 라고 하고는 서류를 펼치며 나이키를 일본으로 수출하셨네요? 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화일에 있는 금액이 10억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이들은 내가 가짜를 만들어서 수출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당시에 정품 나이키를 사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비지니스는 거의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품 나이키 이고, 국가를 건너가는 것에 대해 나이키 본사에서는 막고 싶지만, 법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해서 서류를 복사해 가겠다고 했다. 이들은 내가 보낸 스웨터가 문제가 되어서 혹시 다른 건이 있나 하고 조사하러 온 것인데, 나이키 건이 크다 보니, 본 건은 그냥 스치듯 이야기 하고, 연락오면 부산 용당세관으로 오라고 하고는 떠났다. 부산에는 세관이 4개 정도 있었다. 그중에서 용당 세관은 악명이 높았다. 특히 조사팀은. 내가 해운회사에 있어서 더 잘아는 것이지만. 관세사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관세사는 우리 여직원이 수출면장 발급받으러 와서 상황을 보니, 제품에는 Made in China 라고 붙어있는데, 수출면정에 중국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그냥 수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문제가 있지만, 뾰죡한 수가 없고,  어차피 한번 나가고 말 것이니 표기하지 말고 그냥 보내자고 했단다. 걸릴 확률은 거의 없다고.  관세사는 아주 가끔 샘플로 컨테이너를 열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재수 없게 걸렸다고 해한달 뒤에 연락이 왔다. 여직원이 했다고 하면, 여직원이 벌금내고, 회사가 같은 금액을 내는데 아마 각 1천만원  정도 낼 것이라고, 내가 했다고 하면  나 개인과 회사가 벌금을 낸다고 했다. 나는 정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벌금을 맞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직원이 부산에 내려가서 조사를 받고, 벌금을 내게 할 수는 없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현금 천만원을 둘로 나누어 서류 봉투에 넣어서 가지고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친한 후배 검사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그냥 별금 다 내시는게 좋겠다고 했다. 검사들이 공무원 불러서 조사할 때, 다른 돈 받은 것 불라고 하면, 작은 금액 받은 것 몇개 불곤 하는데, 내 케이스가 딱 불기 좋은 케이스여서, 10년간 캥기면서 사셔야 한다고 했다. 워낙 내 일을 잘 챙겨주는 후배여서 그대로 듣기로 결정했다. 조사를 받으러 가니, 아주 친절하게 나를 맞았다. 벌금이 2천인데, 자기네에게 5백을 주면 사건을 덮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대놓고 내 후배가 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캐쉬 준비해 왔는데, 하고 돈을 꺼내서 두명에게 각 200만원 씩 주었다. 이건 당신들이 받고, 나는 벌금을 내겠다고 했다. 그들은 안받겠다고 했고, 나는 서울까지 올라와서 수고했으니, 받으라고 했더니, 둘이서 합쳐서 백만원 받겠다고 하고, 앞으로 어떤 세관에 어떤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연락하면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다고 했다. 이들의 협조가 얼마나 위력적이냐 하면, 컨테이너 못 내릴 때도, 연락을 하면 최우선적으로 컨테이너를 내려서 빼주기도 했다. 나는 도움을 받고 나면 꼭 돈을 주는 편이었다. 내 원칙은 돈을 먼저 주고 일을 해결하지 않았고, 협조를 잘해주면 나중에 끝나고 돈을 주는 방식이었다. 당시는 리베이트나 언더 테이블 머니가 별로 사회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나의 이런 방식을 주변에서 알게 되어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금 알고 지내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이영서 회장이란 분이 사업 파트너를 찾는데, 나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전에 대우전자 사장이셨고, 효성그룹 부회장을 하시면서 회장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분인데, 경기고, 서울대를 나오셨고, 대한화제 회장님의 친동생이셨다. 대우전자와 아남전자 수출물량을 운송해줄 회사를 만들자고 하셨다. 하루에 컨테이너 5~10대 정도를 쓰는 것이니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나는 해운회사에 있을 때부터 컨테이너 운송에 관심이 있었고, 컨테이너 트럭 기사들이 다 자기 차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무실 하나 얻어서, 연결만 해주면 되는 비지니스였기에 안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이 회장님은 여러가지 비지니스늘 같이 해보자고 하셨다. 트럭기사들이 자고 가는 추풍령 휴게소에 한번 가면 몇명의 트럭 기사들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40명 정도의 기사와 운송계약을 맺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3~4번 내려가서 20명 가까이 되는 기사와 계약을 했다. 그리고 운송을 시작했다. 나와 이 회장님은 50대 50을 가진 파트너 관계였는데, 매일 전화해서 뭔가를 하라고, 해달라고 하셨다. 매일 대우 이야기를 하셔서, 일부러 업무를 보는 사람을 삼성물산 관리팀에서 일하던 선배로 앉혔다.  한 한달에 한번 쯤 티격태격했다. 아니 내가 한달에 한번 쯤 "회장님 ! 제가 회장님 직원이 아니라, 파트너 입니다." 고 따졌고, 그러면 한 주 정도 조용하셨다. 대우의 물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체 물량의 1/3 정도를 운송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아남전자의 물량이 더 많았다. 어느날 회장님이 조금 더 지켜보고 나아지지 않으면 정리하자고 하셨다. 나도 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회장님이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갔더니, 이회장 씨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부터 장관을 하시게 될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다. 비서관이던 보좌관이던. 제가 벌려놓은 사업이 많아서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지 말고 생각해 보고 답하라고 하셨다. 나는 롯데위 선욱이 형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항상 내편이다 시피하는 선욱이형은 무조건 들어가라고 했다. 경제부처 장관의 평균 임기가 1년2개월 이니, 회사를 1년간 선후배에게 맡기고, 1ㄴ녀 동안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고 해보라고. 분명히 내 삶에 도움이 될거라 했다. 회장님께 전화해서 해보겠다고 했다. 당연히 이회창 후보가 될 줄 알았다. 회사일을 분담시키고 준비를 했는데, 뜻밖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됐다. 운송회사도 정리했고, 그 후 회장님과는 한두 차례 안부 전화한 것으로 인연이 끝났다. 

우리 회사가 부도가 나고, 주변에 힘든 사람이 많았는데, 그때 정말 힘든 상황들을 넘어가게 해준 돈이 이 방식에서 나왔다. 어떻게 처음 연결이 되었는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어떤 중소업체 제품을 가지고 건설교통부에 납품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담당 국장을 찾아가서, 이 제품으로 결정을 해주면 사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국장님은 한마디 안하셔도 내가 가운데서 알아서 다 해드리겠다고. 나를 믿어도 되는 것이, 돈을 주고 받은 것이 알려져서 피해를 보게 된다면 나도 국장님 만큼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니, 내쪽에서 안좋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위력적임을 알고 있었다. 근본 없는 장똘뱅이에게 돈 받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들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김 국장이 소개했는데, 자기가 주관하는 입찰에 참여한 업체 중에서 대상이 2~3군데로 좁혀졌는데, 접촉해 보시고, 좋은 업체를 소개해 주시라고.  보통 담당이사나 오너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서치를 좀 해보고, 업체에 연락하면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내 기준으로 도와주고 싶은 업체를 연결해 주었다. 업체에 내게 커미션 얼마를 줄 수 있냐고 물어서, 그들이 줄 수 있다고 하는 금액보다 항상 낮은 금액을 받았고, 내 몫으로 1/3 이나 절반 떼고, 주일 오후에 강남의 호텔 커피숖에서 롤 케익 담은 쇼핑백 밑에 캐쉬를 넣어서 주었다. 해당 공무원은 내게 돈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나도 얼마를 준다, 얼마를 받았다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김 사장과 쉬는 날 커피 한잔 마시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들 했다. 나는 업체에서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만든 돈이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내 채권자들의 가족 병원비, 애들 학원비, 생활비 등으로. 

회사가 부도나는 과정도 이상했다. 중국에 투자한 상태에서 IMF 1년 전부터 급격한 경기 침체가 있었다. 담당자들에게 시즌 별로 판매 예상량을 받고 있는데, 담당자들의 예상물량이 크게 줄었다. 적자가 누적이 되면서 이를 막으려면 많이 팔아야 하기에, 영업을 더하라고 푸쉬했는데, 이 푸쉬가 안좋게 작용했다. 영업은 안되는데, 예상량만 많이 보고하게 된 것이다. 1997년 추석 시즌을 대비한 수입물량을 150만불 정도로 잡아야 했다. 최소 이만큼은 들여와서 팔아야 1년 간의 적자를 만회할 수 있었다. 은행에는 백만불의 크레딧이 있었다. 수입하고 3개월 후에 대금을 지급하면 되었다. 부족한 50만불을 사채시장에서 빌리려 했는데, 와이프 친구의 남편인 정사장이 벤처기업으로 선정되어 정부의 자금을 받게 되었다고 4억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사채보다 조금 싼 이자를 지급하기로 하고 편하게 LC 를 오픈했다. 제품이 들어오고, B/L 을 찾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담보를 달라고 했다. 당연히 담보는 없었고, 결국은 당좌수표를 발행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어음이나 당좌를 써본 적이 없었는데, 거래 은행 지점장님에게 가서 당좌 발행해 달라고 했더니, 강력하게 말렸다. 나는 1장만 필요하다고, 20장 중에 열아홉장은 지점장님이 가지고 계시고 한장만 달라고 해서 받아왔다. 그리고 3억을 빌리면서 4억짜리 당좌를 주었다. 기분이 굉장이 안좋았다. 정 사장이 회사를 만들고 처음 제품을 만들어서 못팔고 있을 때, 내 주위의 관계된 사람에게 소개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나는 2천만원 어치를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주었었다. 몇달에 한번 씩 와이프 친구들과 같이 가족 모임을 하는 멤버여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었다. 우리가 수입한 제품을 받을 9월 중순에 달러 환률은 790원을 넘지 않았었다. 백만불은 8억으로 결제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3개월 뒤인 12월21일에 우리는 백만불을 21억으로 결제해야 했다. 그리고 수입한 제품들은 팔 방법이 없었다. 부산 근처의 보세창고에 들여놓고  비싼 보세 창고비를 내야 했다. 12월에 은행 결제를 할 수 없었다. 연체 이자를 내면서 두달이 지났는데, 제품은 전혀 팔릴 상황이 아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시 회사는 개인에게 30억 정도의 자금을 빌려쓰고 있었다. 물론 이중에 전문 사채도 있었다. 두세군데의 사채업자에게 전화만 하면 다음 날로 3억 정도는 빌릴 수 있었다. 채권자들을 모아서 상의를 했다.  현금화가 가능한 모든 것을 정리하면 15억 정도가 되는데, 이를 가지고 채권자들의 절반을 지급할 수 있고, 만약 채권을 1년만 유예해주면 은행에 결제를 해서, 계속 비지니스를 할 수 있다고 했더니, 정 사장이 나서서 사람들을 설득했고, 한명의 이견도 없이 모두 회사를 유지하자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해서 은행의 부채를 갚았다. 항상 안고있던 이자 부담이 없어져서 한푼도 없었지만, 오히려 편안해 졌다. 잘 추스려서 움직이기 시작한 때에 정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는 당좌수표이니, 이것이 부도나면 내가 형사입건이 된다고 하면서 자기 것은 갚으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맘대로 하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전화를 옆에서 들은 친구가 참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지금 정유회사에 결제할 기름 대금 3천만원이 있으니 이것 가져다 주고, 1년간 기다려 달라고 얘기 하라고 돈을 주며 등을 떠밀었다. 이 친구도 내게 2억 이상 채권이 있는 친구였는데,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었다. 3천만원을 들고 정 사장의 회사로 찾아가 주면서 1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이런 것을 서류로 받아놓는 성격이 못되었고, 이런 약속은 당연히 지킬 것으로 믿었다. 정확히 한달 뒤에 정사장은 다시 연락이 왔고, 다시 돈을 안가져 오면 당좌를 돌리겠다고 했고, 나는 드디어 욕을 참지 못했다. "야이 새끼야 맘대로 해!" 라고 했고, 정 사장은 당자를 돌렸고, 회사는 부도가 났다. 이로 인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발생했다. 채권자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해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사실 이들은 회사가 부도가 나자 자금을 회수할 방법이 없게 된 것에 더 흥분했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것을 써서 회사를 살렸는데, 회사 까지 무너지고, 사람까지 잃게 되었다. 당좌수표 부도가 나자 무엇 보다도 구속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다.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긴장을 많이 하고 경찰조사와 검사 조사를 받았는데, 모두 아주 정중하게 대해주며 기소유예를 해주었다. 정 사장은 다시 사기죄로 나를 고소했다. 조사를 한  형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정 사장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고, 세번을 불러서 조사를 해서 고통을 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정 사장은 김포에서부터 강동경찰서 까지 세번이나 와서 조사를 받았다. 나는 우호적인 가운데, 경찰 조사를 받고, 이어서 동부지청에 가서 정중하게 대접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물론 혐의가 없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골판지 박스를 만드는 회사도 차렸다. 홈쇼핑 시대가 될 것이고, 튼튼한 개별 포장이 필요할 시대가 될 것으로 봐서, 포장에 대한 특허를 2개 출원하였다. 처음에는 기계를 들여놓고 직접 만들려고 했는데, 필요한 박스의 종류가 다양해서 기계 구입은 나중에 주력 아이템이 결정되면 하기로 하고, 제지공장으로부터 원지를 구입해서, 하청공장에 넣어주고, 납품을 받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1년도 채 되지 못해서 IMF 를 맞았고, 회사는 클로즈 했다. 태국산 나무 제품이 꽤 퀄리티가 좋다는 평이 있었다. 고대 교우회 사무총장인 선배에게 물어서 태국에 있는 동문들을 소개받았다. 월간조선 객원기자로 있는 대학교 11년 선배인 안주현 사장님과 에이전트 계약을 하고 태국으로 갔다. 당시 태국은 한국 사람들이 섹스 관광이란 것을 많이 와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안 선배가 어레인지해 놓은 업체들은 정말 좋은 제품을 가지고 있었다. 안 선배는 선교사 직도 맡아서 하고 있었고, 예약해 놓은 호텔도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엄숙한 호텔이었다. 태국을 총 3번 갔는데, 술집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태국의 업체들을 돌면서 놀란 것은 첨단 장비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활 소품과 나무 액자, 그리고 범랑 그릇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특기 범랑 공장은 세계 최대의 범랑 공장이었다. 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Siam Steel  의 자회사로,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쉬은 것은 거의 모든 제품을 유럽 브랜드의 OEM 으로 수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액자 공장도 장비와 제품 퀄리티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제일 큰 바이어는 미국 최대의 카드와 기프트 업체인 Hallmark 였다. 물량을 받기도 어려운 회사였는데, 안 선배의 능력인지? 우리 회사를 좋게 봤는지? 좋은 조건으로 제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액자는 꽤 많은 물량을 들여왔는데, 사실 판로를 생각하지 않고, 제품에 반해서 수입을 결정했기 때문에 판매에 어려움이 있었다. 잠시 팔다가, 당시 아트 박스와 모닝 글로리 두 회사에 제품을 넘기겠다고 했더니, 서로 달라고 했고, 좋은 조건을 제시한 아트 박스에 전체 물량과 거래선을 넘겨주었다. 생활 소품을 만드는 공장은  공장은 크지 않은데, 자체적으로 나무 건조설비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최대형 습식 싸우나를 연상시키는 시설이었다. 엄청난 가스가 소모되었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3일 인가 하는 빠른 시간 내에  목표 건조율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시설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공장에서 만든 과기 세트를 3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뒤틀림 없이, 크랙 없이 잘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건조 덕분인 것이다. 당시에 Dansk 라는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었는데, 정말 탐나는 제품이어서, 수입을 했다. 좋은 제품이었지만, 회사가 너무 여러가지 일을 벌려서 이 제품들을 판매하는 데에 신경을 쏟지 못했고, 태국과는 1년 정도 밖에 거래를 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경제가 호황을 맞고 있었던 것 같다. 기업체 들은 직원들에게 절기 마다 선물을 지급했다. 또 소비자를 위한 판촉행사가 넘쳤다. 기업체 직원 선물 초창기에는 단연 우리 할로겐 스탠드가 탑 이었고, 보험회사들의 고객 선물에도 특히 삼성생명의 고객 사은 선물의 탑 도 우리 스탠드였다. 이런 관계로 특판 시장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러던 중에 주유소 고객 선물이라는 아주 큰 판촉물 시장이 생겼다. 처음에는 주로 티슈를 나눠주었는데, LG, SK 그리고 쌍용 정유가 경쟁을 하면서 포인트 적립 시스템을 도입했고, 보험회사가 주던 선물 수준으로 다양하면서도 규모가 커졌다. 처음에는 LG 나 SK 정유의 카탈록에  몇가지 제품을 공급하는 정도였는데, 우리는 한발짝 더 나아가 쌍용정유의 사은품 시스템 전체를 맡는 계약을 따냈다. 쌍용정유의 마케팅 담당 부장님도 고대 선배셨는데, 보통 업무 중에 전화를 못받는 경우가 많은데, 무조건 받는 전화가 내 전화라고 , 그만큼 자기네 회사에서 우리 회사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티슈, 화장지, 페이퍼 타올, 라면, 식용유 등의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었는데, 당시 우리의 구매력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최대의 바이어였던 이 마트 보다 평균 5~10% 싼 가격으로 공급을 받았다. 제조업체로서는 고정 고객을 통해 회사를 운영할 모든 비용을 뽑아야 하지만, 특판 제품에는 재료비와 인건비만 고려해서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마트 보다  싸게 사는 것은 당연했다. 기업체 직원 선물로 가전 제품이 주를 이루자 우리는 LG전자를 파트너로 했다. 본사 특판팀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쪽의 제품이 더 싸게 들어오는 경우가 생기자, 특판팀에서 LG전자의 최우량 대리점 3곳을 소개해 주었다. 서울 경기지역에 있는 대리점 중에 세곳은 1년 매출이 천억원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회사였다. 이 세곳의 대리점 사장은 LG 전자의 부사장이 직접 만난다고 했다. 기억나는 이름은 금성 파라 대리점인데, 서울 서부지역과 연계된 경기도 지역 위주의 영업을 하지만, 전국에 다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특판팀에서 줄 수 있는 최선의 가격 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제품을 받아가고 있던 세 대리점 사장을 만나서 딜을 했고, 이 중 두곳과 거래를 했다. 사장들을 설득하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지역 매장을 돈 경우도 있다. 가끔 가전제품 매장에 앉아서 기다릴 때도 있었는데, 그때 지소득층 가족들이 함께 와서 TV 나 냉장고, 에어컨 등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것이 참 좋은 비지니스다 라고 느꼈다.돈 많은 척, 잘난 척 하는 사람들에게 비싼 가전제품 파는 것 보다, 어린 자식들 데려와서, 선풍기, TV 사주는 모습, 기뻐하는, 행복에 겨운 아이의 표정과 이를 보는 부모의 표정을 보며 가슴 벅찬 기억이 있다. 이런 기분을 미국에 와서 친구네 운동화 가게에서 일하면서 느꼈다. 나이키 운동화를 사기 위해 돈이 생길 때 마다 운동화 가게에 와서 적립을 하며, 신발 한번 더 신어 보고, 금방 다시 오겠다고 하는 모습. 스패니쉬 부모가 자식들에게는 좋은 신발 신기려고 데리고 와서 부담가는 돈을 지급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 당시 기업체 직원 선물 시장이 얼마나 규모가 커졌냐 하면, 우리는 회사가 지정한 몇 곳에 직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쇼룸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회사에게 10만원을 지급하기로 하면, 보통 10만원에서 30만원 정도에 이르는 제품 중에서 직원들의 인기 투표를 통해 선정된 제품들을 5~10가지 정도로 준비해서 전시해 주었다. 직원들은 들려서 제품을 보고 고르는데, 보통 시중에서 20만원 짜리 냉장고는 40% 정도 할인된 12만원으로  공급가가 정해지고, 직원이 이것을 고르면 개인이 2만원을 추가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40% 할인이란 어떤 곳에서도 받우리에게 비밀취급 교육도 하지 않고, 이것 노풀되면 큰일 납니다. 라는 하을 수 없는 할인이어서, 직원들은 무조건 비싼 것을 선택했다. 회사는 10만원을 주면서 거의 17만원 짜리 선물을 주는 셈이니, 모두가 윈윈 이었다. 당시 정부기관 공사에도 납품을 했는데, 국정원에도 했다. 3시즌 정도를 납품을 했는데, 조금 황당한 것은 당시 24,000 명 정도 되는 국정원 전직원의 집주소가 우리 회사에 있었고, 전국에 각종 이상한 이름으로 운영되는 국정원 사무실 주소가 다 있었다. 어떤 선물은 사무실로, 어떤 선물은 집으로 배송해야 했으니, 당연했지만, 노출되어선 안될 정보임에는 확실했다. 직원  추석 선물 정도면 한 회사의 직원이 2만명인 경우에 보통 20만원 짜리를 선택한다고 하면 한 회사에서 4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셈이었다. 가전체품으로 직원 선물을 하던 시절에도 우리 회사가 가장 앞서 나가 있었다. 

갤러리아 백화점을 유명하게 만든 것에 크게 기여한 후배가 았다. 한화그룹 공채로 입사를 해서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숙녀의류 부분을 맡아서 정말 일을 잘했다. 숙녀의류가 인기를 끌면서 갤러리아 백화점이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몰려오게 된 것이다. 백화점 업계에서도 꽤 유명해져서, 업체에서 받는 뇌물과 선물의 구별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도 했다. 업체로부터 한푼도 뇌물을 받지 않았다. 그의 전략은 매출이 떨어지면 바로 매장을 철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업체들은 최선을 다했고, 유명 브랜드라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바로 철수를 시켰다. 그러다 보니, 신규업체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는데, 근본이 없는 신규업체를 정리하다 보면 트러블이 있었고, 이 트러블 때문에 가스총 소지 허가를 받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했었따. 한화그룹이 김승연 회장을 부인에게 지분이 넘어감녀서, 한화그룹 인사님장으로 있던 이세흠 선배가 갤러리아 백화점의 점장으로 왔다. 명품관과 생활관을 각각 같은 과 후배가 맡고 있었으므로, 편한 자리였다. 내 후배는 세력 다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회장 사모편의 사람이 되었다. 그룹에서 사모의 세력을 쳐내는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다. 내 후배가 철수시킨 업체들을 불러서 뇌물을 받은  사실이 있나를 물었다. 거의 모든 업체가 이바닥에서 뇌물 안받는 유일한 친구라고 답을 했지만, 한 업체가 니물을 받고 쫓아냈다고 없는 사실을 말함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갤러리아 백화점을 키운 공로를 무시할 수 없어서, 갤러리아 백화점의 모기업인 한양유통 본사의 부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모양을 취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백화점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고, 그 중에서 후배는 오너가 직접 운영하는 작은 백화점의 책임자로 가서 백화점을 키우는 것으로 결정하고 사당동의 태평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 있으면서 내게 어떤 프러젝트를 들고 왔다. 일본 고등학생들이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오고 싶어하는데, 서울 근처에 묵을 호텔이 없다는 것이다. 수퍼마켓과 대형 푸드 코트, 기념품 매장과 우명 브랜드의 아웃렛 매장을  지하와 1,2 층에 가진 대형 호텔을 만드는 것이었다. 과천대공원 역에서 서울대공원 입구까지 지하보도를 만들고 그 중간에 호텔이 위치하도록 계획했다. 서울시의 땅을 이용하면서 윈윈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프로젝트였다. 자금을 댈 곳도 쉽게 물색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시장인 이명박 시장은 나와는 여러가지 연결 고리가 있었지만, 좀더 확실한 라인을 만들려고, 이명박 시장과 대학동창 이면서 이명박 시장의 대선 선거 캠프를 맡았던 조홍규 의원을 통하기로 했다. 조횽규 의원은 당시 민주당 3선의원 이었고, 대학 써클의 친한 후배의 아버지였다. 프로젝트를 본 조 의원은 성공가능성 99% 라고 했다. 기획안을 구체화하고, MOU 를 만들어 이명박 시장의 싸인을 받는 것으로 준비했다. 기획안은 이명박 시장에게 전해졌고, 싸인할 날짜를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 의원이 잠시 미루자고 했다. 이명박 시장의 큰 비리가 밝혀져서 곧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 같다고 했고, 누가 되더라도 이 프로젝트는 성사가능한 것이니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고. 짐작하겠지만 이 프로젝트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명박 시장의 비리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오히려 조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정치인 3인 중의 하나로 지목되어, 스스로 모든 자리에서 내려오고 칩거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했는데, 시기적으로 선후는 조금 혼동이 된다. 정말 좋은 프로젝트였고, 시기도 좋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해외 수학여행지로는 한국이 최고였고, 그들은 호텔비를 충분히 낼 수 있었고, 구매력도 좋았다. 서울시의 땅을 사용하면 공사비만 부담하면 되는데, 호텔과 매장은 일본 수학여행이 없어도 아주 분위기 좋은 호텔이고, 유명 브랜드 아웃렛 매장은 당시 성남시 외곽에 조금씩 만들어 지기 시작했는데,  서울대공원 입구에 만들어진다면 전철도 연결이 되어 있고, 주차장도 좋으니... 대형 푸드 코트에서 각국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멀리서 온 사람은 1박2일 코스로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도 기회를 만나지 못하면 실현되지 못하는 교훈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연락이 왔다. 정우영 이란 친군데, 아버님이 호남 분이신데, 박정희 정권에서 인천시장과 부산시장을 지내셨다. 당연히 호남 공직자의 대부이셨다. 호남 정치인에게도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신데, 부산시장을 마치면서, 사단법인 한국장묘협회 라는 것을 만드셨다. 취지는 일제시대 때, 일본은 한국인의 기운을 꺽기 위해, 대형 공원묘지를 가장 악지형이라 할 수 있는 망우리와 벽제에 맏들었다. 친구 아버님은 풍수가 좋은 곳에 공원묘지를 만들어야 많은 사람들이 평안할 수 있다고 보셨고, 이 협회가 정부로부터 한가지 권리를 얻어냈는데, 국유지의 10% 에 공원묘지를 만들 수 있는 권리였다. 당시는 사설 공원묘지의 가능성도 없었던 시절이어서 이 큰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했는데, 장묘사업이 활성화 되기 시작하자,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장묘협회의 이 궐리를 뺐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협회를 뺐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시도가 자신이 그렇게 밀어주고, 자신에게 인사를 하던 호남 정치인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힘들어 하셨다. 흠이 되는 부분은 20대인 친구가 그 협회의 이사로 등록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배신감으로 인해 힘들어 하시던 친구 아버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 협회으의 이사인 내 친구는 같은 사안으로 두번의 특검 수사를 받고, 정신질환이 생겼다. 그리고는 법적으로 한정치산자를 만들어서 장묘협회 이사직으로부터 해임시켰다. 이 모든 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움을 주었던 김대중 정권의 핵심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풍상을 겪은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자기가 잘아는 분이 사업 파트너를 찾는다고 해서 나를 소개하려고 한다고 했다. 김혜영 회장이라는 우리 보다 스무살 가까이 많은 분이셨는데, 자식 둘을 잘 키우시려고 온갖 일을 마다 않으시고 사업을 해오신 분이셨다. 한편으론 세련되고, 온화한  크리스찬 사업가의  모습을 다른 한편으론 산전수전 다 겪은 사기성 짙은 장삿꾼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나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셨고, 나는 그 모습을 받아들였다. 김 회장이 제안한 사업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이화 관광호텔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모텔과 작은 호텔들이 불황으로 도산하고 있던 시절인데, 이 호텔은 기아산업, 기아자동차 공장을 끼고 있어서 그나마 어느 정도 운영이 되고 있었다. 본관과 별관 두 건물로 되어 있는 250 방 규모의 별 4개 짜리 호텔이었다. 아주 싼 가격에 인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고, 투자할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나의 일은 이 호텔을 인수해서 어떻게 수익성을 갖추느냐 하는 것이었다. 호텔을 가보고 머리를 짜낸 결과, 호텔식 요양원으로 기획을 했다. 본관은 1층에 응급 의료 시설을 갖추고, 부부 방과 싱글 방을 두고, 별관 기존의 비지니스 호텔로 운영을 하는데, 요양원의 부모님을 뵈러 와서 하루 묵고 가는 용도로 운영하는 것으로 했다. 혈압, 혈당을 재고 주사를 놓을 수 있는 간호사 한명이 24시간 상주하고, 인근 종합병원과 연계하는 것으로 , 호텔 주방과 식당, 커피숖, 로비를 활용하면 수준 높은 프라이빗 요양원으로 수익성이 충분했다. 이 기획안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큰 프로젝트가 생겼다고 해서 가보니, 당시 고건 총리의 비서와 같이 와있었다. 고건 총리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할 것인데, 대선자금을 모으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3년간 모아서 1천억 정도의 자금을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자금을 세탁하는 비용을 20%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메인이 되서 하고, 친구의 조카가 당시 한국에서 네번째로 큰 연예기획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조카의 회사도 활용하는 것으로 했다. 고건 총리는 양심적인 공무원의 표본 처럼 되어 있었지만, 고건 총리의 부인은 한국에서 교육 치맛바람을 일으킨 주범 중의 하나라고 할만큼 활동적이었다. 고건 총리가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분이 친구의 아버님이었고, 고건 총리와 김  비서관을 연결해준 것도 친구 아버님이셨다. 고건 총리와 김 비서관은 20년 넘게 함께 하셨고,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몇일 전에 둘을 불러서 식사를 하시면서, 두 사람이 내 앞에서 내 아들을 끝까지 돌봐줄 것을 약속하라고 하셔서, 두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친구와 친구 어머니를 계속 챙겨주었다. 당시 나는 부도난 후에 새로 투자를 받아 창업한 택배회사가 정상화 막바지에 자금난을 겪고 있었던 상황이라  돈이 필요했고, 부도난 후에 채권자들에게 얼마씩이라도 계속 지급하고 있던 상황이라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제안을 받고, 롯데호텔의 선배를 만났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쉽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롯데 그룹에서는 매달 현금으로 3억을 두명의 대선 후보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정말 댓가성 없이, 아무 말도, 조건도 없이 가져다 준단다. 선배가 아는 한 10대 그룹은 무조건 3억 이상을 주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 외에 삼십대 그룹까지는 가만있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오히려 10대 그룹 보다 더 많이 하는 그룹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30대 그룹에서 주는 돈만 받아서 자료 있는 돈과 자료 없는 돈으로 잘 만들어서 전달해 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다. 대선 후보에게 들어가는 돈이 2~3천억 정도라고 했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가 왔는데, 수원 경기도청 청사 옆에 건물을 짓는 사람인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건설교통부의 국장이 소개했다고 했다. 납품에 도움을 주고 커미션을 받는 일이라 생각하고 가서 만났더니, 황당항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고건 총리의 대선 자금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고...  현재 도청 옆에 개발하고 있는 건물이 수원시와 경기도, 환경부, 건설교통부에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총리실에 허가서가 들어갈 건데, 총리실 허가에 보통 6개월이 걸리는데, 4개월만 빨리 나오게 해주면  1백억을 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하도 황당해서 프로젝트 규모가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5천억 이라고 했다. 전체 예산의 2% 를 인허가를 빨리 받는 일에 쓴다는 것이 아주 황당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총리실이 하는 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자기가 알기로는 가장 큰 돈을 받아먹는 곳이 총리실로 알고 있다고 했다. 총리시리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불알 친구가 생각이 났다. 정말 한푼도 안받을 친구인데, 어쩌면 이 친구도 많이 받고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개발업자에게 나는 고건 총리의 대선자금 관리자가 아니라고, 혹시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면 해주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하지만 개발업자를 만나고 나서 나는 대선 자금 관리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서 내 친구를 이해시키느라  애를 많이 썼다. 

IMF 로 내 주력 사업인 무역회사가 부도나고, 중국 공장 정리하느라  힘들었고, 부도로 인한 법적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새로 시작한 사업은 택배업이었다. 묘하게 재력가인 매형이 나를 데리고 친구 회사에 갔는데, 그 회사가 삼영택배, 삼영 익스프레스 였다. 삼영택배는 아주 초창기 회사였고, 성공한 택배회사 였다. 나는 홈쇼핑에 관계하면서 택배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는데, 매형 친구분과 이야기 하면서 사업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초기 택배회사는 구조가 단순했다. 지역을 담당하는 지사와 지사에서 물건을 받고, 지사에 배송물건을 내려주는 본사의 구조였다. 본사가 운영하는 중앙물류쎈터는 지사에서 물건을 수거해서 물류쎈터에서 배송지 별로 분류하여, 다시 지사로 물건을 보내주는 기능을 하는데, 보통 중앙물류센터를 충청권에 설치했다. 제품을 수거하는 지사는 고객이 지불한 택배비의 40% 를 가지고, 본사가 30%, 그리고 배송지사가 30% 를 가진다. 당시 레귤러 화물의 경우 택배비가 3,000 원 정도였으니, 각기 1,200 원, 900원, 900원 씩 나눠갖는 셈이었다. 나는 손이 많이 가고, 광고가 필요한 일반 고객을 포기하고, 대량으로 물건을 보내야 하는 제조업체, 홈쇼핑 업체들 만을 고객으로 하였다. 그리고 중앙물류쎈터를 전체 물량의 50% 를 차지하는 수도권에 두었다. 화물을 수거하는 지사와 지사로부터 물건을 수거하는 본사의 수거 트럭의 일이 없어졌고, 수도권의 물건이 서울에서 수거되어, 충청도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낭비가 없어졌다. 고객들은 경기도 안성의 울이 물루쎈터로 자체 차량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물건을 입고했고, 우리는 입고한 물건에 송장을 출력하여 붙치고, 분류하여 배송지 지사로 보내기만 하면 됐다. 수거지사가 가졌던 40% 와 수거 트럭의 비용 10% 가 줄었기 때문에 원가가 절반이 된 셈이었다. 우리는  이 컨셉에 맞춰 택배회사 이름을 B2C 택배로 했다. 서울지역 배송은 기사를 모집하여 본사에서 직영했고, 지역 지사들은 기존에 택배 지사를 하고 있는 곳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했다. 지방의 배송지사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하루에 지역 전체를 도는데, 우리 물량이  얹어지니 무조건 득이 되었기에, 지사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본사 배송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에 33개의 지사를 두게 되었다. 배송비는 기존 이용하던 택배비 보다 20~30% 정도 낮은 금액으로 영업을 했다. 사업의 틀을 만들고 KOEX 소회의실에서 투자설명회를 했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투자자가 있었다. 한전을 대신해서 한국 전체 가구의  70% 를 검침하는 회사의 오너였다. 당시는 오너의 아들이었지. 4억 이라는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했고, 회사 지분의 40% 를 가졌다. 자기네 검침원들이 하루에 3시간 반 밖에 일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남는 시간을 가지고 어떻게든 수익을 증대시켜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택배 화물을 배송하기에는 뭔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 회사를 위해서 LG 폼쇼핑의 카탈록을 배송해 주는 일을 맡았다. 기존에는 전부 우체국을 통해 보내고 있었는데, 150만부 정도가 나가면서도, 천부 정도 보내는 요금보다 특별한 할인을 받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귀찮아 한다고 했다. 150 만부를 받아와서, 45만부는 우체국에서 보내고, 나머지 105만부튼 검침원들을 통해 배달했다. 2,500 명의 직원이 1인당 400 부 정도씩 배달하는 것인데, 한 부당 100 원 정도해서, 한달에 개인이 4만원 정도를 더 벌어가게 되었다. 몇달 했을까? 어느 날 김성훈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뉴스 보라고 해서 보니, 전기통신 보호법인가 뭔가에서 한전의 검침을 대행하는 회사가 본래 목적 아닌 부업을 할 수 없다고 법을 제정했다. 역시 한전은 대단한 회사였다. 조금이라도 불똥이 튈 것 같은 것은 막강한 힘으로 사전에 봉쇄를 했다. B2C택배는 성공하지 못했다. 택배란 것이 장치 산업이어서, 배송 물량과 관계 없이 시스템을 움직이기 위해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배송 물량으로 인한 수입이 이 시스템을 돌리고 남으면 남는 돈 모구가 순이익이 되고,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그 미치지 못한 부분이 그대로 순손실이 된다. 물류 쎈터  운영하는 비용, 11대 이던 물류 쎈터에서 지사로 배송을 하는 간선 트럭 비용, 그리고 지사에 보내주는 최소 비은 꽤 컸다. 서비스를 개시해서 1년 내에 매출이 시스템 유지비의 80% 를 충당하는 수준까지 갔고, 그 다음 1년에 조금 더 늘어서 90% 에 육박했는데, 투자금 포함해서 전체 예산 10억 정도로는 더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배송지사에 대금 지급이 늦어지자, 몇몇 지사가 이탈하게 되었고, 이를 커버하기 위해 다른 택배회사에 위탁하면서 별도의 비용을 써야 했다. 2년 만에 휴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것이 중량물 배송 택배 였다. 혼자서는 배송할 수 없는 가전제품, 가구 등을 배송하고, 설치해 주는 일까지 하는 사업 모델이었다. 때마침 딤채 라는 김치 냉장고가 대 히트를 쳐서 회사를 만들자 마자 물량이 쏟아졌다. 가구 회사들의 호응이 좋았다. 장수 돌침대도 배송하게 되었고, 유행이던 의료기기 침대의 배송이 많았다. 미건의료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의료기 침대를 배송한 것 같다. Home Theatre  바람이 불어서 이를 배송하고 설치해 주는 일도 했다. 음향 교육은 꽤 까다왔지만 돈이 되었다. 빠르게 고객이 늘어서 이번에는 1년도 되지 않아 시스템 유지비의 90% 에 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업을 위해서 투자를 한 아주 친한 써클 선배와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었다. 선배와 나는 공동대표였고,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이 관리를 하며 상무직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날 미팅에서 선배가 내가 당분간 회사에서 손을 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회사 시스템도 내가 만들고, 전국에 지사도 내가 모집했고, 영업도 90% 를 내가 하고, 본사 직원도, 간선 차량 기사도 다 내가 뽑았는데, 내가 없이도 회사가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해놓은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고, 워낙 친한 선배와 친한 친구에게서 배신당했다는 것도 나를 평소와는 다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내게 손해를 끼치고 두번이나 도망갔던 후배도 거리낌 없이 받아주고, 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3초만 지나면 참는다고 후배들이 이야기할 정도로 이해심이 넓고, 포용력이 있는 편이었다. 꽤 자신감이 있는 내 친구들이 내게 와서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다른 건 다 따라가도 내 포용력을 못따라가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 회사에 이사로 있었던 후배가 자기가 어느 정도 투자할 자금이 있으니 나가서 새롭게 회사를 만들어서 경쟁을 하자고 했다. 분류세터를 책임지던 선배도 함께 했다. 그래서 유일한 중량물 배송회사가, 둘이 되었다. 시장은 빠르게 늘어났고, 새로 만든 회사는 채 1년이 되지 않아, 이전 회사를 추월했다.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는 물량이 모자랐고, 우리 회사는 자금이 모자랐다. 어느날 선배의 회사에 있는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듀 회사를 합치면 최선 아니겠냐고 했다. 선배도 그걸 원한다고 했다. 포용력을 자랑하던 내가 나를  잃었다. "XXX 말라고 그래 ! 한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면 다 죽여버릴 줄 알아 !" 내 친구는 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고 그냥 나가 버렸다. 안 참아도 될 일에 참아서 주위 사람들을 열받게 만드는 것이 나였는데, 참아야 할 순간에 이상한 짓을 했다. 둘이 다시 합쳤다면, 아마 모두가 행복해졌을 것이다. 홈쇼핑 회사도, 관계되는 가구, 가전 회사들도. 두 회사는 얼마간 경쟁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왔다. CJ 택배와 현대산업개발, 그리고 용마산업이란 회사에서 우리 회사를 인수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세 회사가 거의 동시에 제안을 해왔다. 알찬 갑부인 용마 레미콘을 선택하거나,  사업 다변화를 꾀하던 현대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런데 CJ 를 선택했다. 회사를 가장 빨리 넘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택배란 사업은 장치 산업이라서, 손익분기를 넘기기 전까지는 다 돈으로 막아야 했고, 손익분기를 넘기면 그때 부터는 다 남는다고 해도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당시 손익분기의 90% 가까이 가 있었지만, 적자를 돈으로 메우기 위해 매일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CJ 는 아주 적극적이어서 상담을 시작한지 2달이 되지 않아 최종 인수금액과 우리가 6개월을 근무할지? 1년을 근무할지? 의 결정이 남아있었다. CJ 택배의 인터넷에 4/15 일부터 중량물 배송을 시작한다고 고지 광고까지 나갔다. 그런데 CJ 에서 수가 협상 회의 일정을 미루었다. 속절 없이 4/15 일이 지났고, 내부 문제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4/20 일 경에 담당자에게 내용을 들었다. 선배 회사에서 면담을 요청해와서, 만났더니, 우리 회사가 재무상황이 안좋아서, 한달 이내에 서비스를 중단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면 비용을 치루지 않고도 시스템을 그대로 인수할 수 있다고 하는 말에, 한 두달 기다려 보기로 했다고 했다. 결국 나는 자금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 미국에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게 되었고, 그 사이에 회사의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못돌아갔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얼마 전에 고건 총리의 대선자금 보다는 덜 흥미롭지만, 재미있는 일이 한가지 더 있었다. 나보다 두살 많은 이수암 이란 선배가 있었는데, 내 친한 친구의 대학 사진부 선배였다. 어쩌다 친구와 같이 한번 만났는데, 나를 아주 좋아했다. 선배의 아버님은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고, 장인어른은 전기통신공사 사장이셨다. 집안에 돈이 많아서, 공부 안하는 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IMF 나기  1~2년 전 정도에 만난서, 내가 한국을 떠나기 까지 나의 많은 부분을 챙겨주었다. 이 선배가 아는 개발업자가 있었는데, 20대 초반에 남태령 고개 넘어 과천들어가는 오른쪽에 5층 짜리 아파트 4 동을 지어서 완전히 대박이 났단다. 아버지가 건축업차였고, 이 선배 아버님의 건물을 거의 다 이분이 지었서, 이 선배 보다 한 살 적은 이 개발업자와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너무 어려서 큰 성공을 해서, 실패도 많이 경험했는데, 인생을 건 마지막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서초구 포이동에 군인공제회관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군인공제회에서 7천억을 대고, 전체 1조가 조금 넘는 개발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분양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금이 부족해서 이 선배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했고, 이 선배는 자금을 대는 대신에 분양의 총 책임자를 나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내가 전체를 컨트롫 하면서 내 커미션을 1% 로 책정하는 것으로 제시했는데, 자금이 급한 개발업자는 이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직 땅을 파지도 않았기 때문에 치소  3년 뒤의 일이지만, 분양은 땅을 파기 시작하면 바로 시작된다고 했다. 강남의 유명한 분양팀들과 바람잡이 들이 벌써 다 동원되었다고 했다. 1조만 잡아도 1%는 1백억 이었다. 내가 채무가 많은 걸 아는 이 선배는 그래서 채무로부터 빨리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나를 소개한다고 했다. 내 채권자들에게 분양물건을 담보로 주면  되지 않겠냐고, 기막힌 방안을 제시했다. 1억의 채무가 있는 사람에게 2억 짜리를 담보로 주고, 2억에 분양해서 자기 돈 1억 찾아가게 하면 꿩먹고 알먹고라고. 나는 어차피 분양하는 대로 커미션을 받을 것이니, 전체 커미션 1백억 중에 1~20억 미리 던져주는 것은 표시도 나지 않는다고. 나른 위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오게 되었다. 

나를 잘 본 선배는 또 있었다. 아리랑 공구라는 잘나가는 공구 수출회사가 Altwell  이라는 다단계 회사를 만들었다. 합법적이니 다단계 회사였고, Amway 에 이어 랭킹 2위인 회사였다. 젊은 히장은 아주 반듯한 사람이었다. 아는 선배가 이 회사의 총괄 상무로 있었는데, 이 회사에 몇가지 제품을 공급했었다. 내가 부도가 나고 힘들어 할 때, 보자고 해서 갔다니 한달에 이자가 얼마나 나가냐고 했다. 나는 이자만 천만원 정도 나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월에 천만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알트웰에 30명 정도의 다이아몬드 멤버가 있는데, 논현동 본사 건물 맨윗층에 그 멤버들에게 각가 개인 사무실을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 서른 명을 관리해 주는 일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 서른명은 매월 최소 3천만원 씩은 가져간다고 했다. 아침에 매일 미팅을 하면서 두시간 근무하고, 일주일에 두번 저녁에 세미나 해주는 것으로 월에 천만원 주는 것으로 회장님과 논의가 됐다고 했다. 이것으로 이자는 내고 가면 편하지 않겠냐고? 자기가 회장님 설득하느라, 애를 썼고, 다이아몬드 멤버 중에 몇명은 나를 알고 있어서 설득이 가능했다고 했다. 우리 제품을 공급하면서 제품 설명을 하느라, 세미나를 몇번 했는데, 거기에서 나를 좋게 본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감사했지만 거절했다.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고, 시간을 고정적으로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 한살의 나이에 준비 없이 미국에 왔다. 회사의 운영자금을 만들기 위해 3개월 간 미국에 다녀갈 계획이었는데, 미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와이프와 아이들도 한달 뒤에 미국으로 들어왔다. 미국에 친척은 없었다. 뉴욕에 상렬이, 영일이 덕규가 살고 있었고, LA 에 의성이 익보, 종철이, 만이가 살고 있었다. 영일이는 중학교 때 절친, 상열이는 중,고등학교 절친, 덕규는 대학교 절친, 익보는 대학교 절친, 의성이는 대학교때부터 절친으로 5년간 사업도 같이 했던 친구다. 이 다섯 명에게 한국에서 가장 친한 친구 한명을 꼽으라고 하면 4명은 당연히 나일 것이고, 덕규는 진하라는 친구가 있어서 내가 두번째일 정도로 내 절친의 거의 전부가 미국에 있었다. 하루 전에 결정한 미국 행이어서, 나는 뉴욕행 티켓을 끊었고, 공항에서 뉴역에 있는 상열이와 덕규에게 전화를 했다. 뉴욕의 세 친구는 경황 없이 공항에 마중을 나왔고, 이 세 친구의 집에서 각각 열흘 씩 묶었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뉴저지의 Palisades Park 에 작은 방이 3개 있는 렌트 집을 구했다. 뉴욕에 자리 잡은 이유는 그냥 덕규와 상열이가 더 편안했기 대문일 수 있다. 의성이는 내가 자기 있는 곳으로 안오고 뉴욕에 자리잡은 것에 대해 많이 섭섭해 했다. 

미국에 오면서 와이프와 약속을 한 것이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직장에서도 세일즈를 너무 잘해서 밀려났고, 두번째 직장에서도 세일즈를 잘해서 밀려났다. 첫번째 직장이 네일살롱에 페디큐어 췌어를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한국에서 제품을 들여왔다. 한 네일살롱에 보통 3~4만불 정도를 납품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영업이었다. 그리고 이 회사 사장의 방식은 세잉즈맨에게 기복급과 인센티브를 주는데 기본급이라야 교통비와 식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어떤 세일즈맨도 팔지 못했다. 네일살롱 주인은 큰 금액을 지출하다 보니, 사장과 직접 거래하며 가격 흥정을 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일즈맨은 카탈록을 돌리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는데, 영업 시작하자 마자 이것을 간파했고, 전략을 세워서 마진과 커미션을 다 가질 생각을 하지 않고, 회사가 줄 수 있는 최저가를 제시했다. 그 가격을 제시하기 전에 살롱 오너에게 다짐을 받았다. "회사에 연락해서 흥정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 최저 가격을 제시하겠습니다." 안지켜도 되는 약속이지만, 그러겠다고 한 고객들은 거의다 약속을 지켰고, 나는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나는 먼 지역을 맡겠다고 하고, 커네티컷과 롱 아일랜드를 맡았다. 커네티컷에 영업을 하러 다닌지 3개월 쯤 됐을 때, 커네티컷에는 네일협회가 없어서 불이익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로부터 3개월 동안 준비하여 커네티컷 안인 네일협회를 만들었다. 나는 수석 부회장을 맡았다. 협회를 만들면서는 커네티컷에서 영업을 하지 않았다. 협회는 정말 좋은 뜻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영업에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사장은 나를 불러서 회사의 영업 방침이 바뀌었다고 했다. 인센티브가 없어지고, 기본급을 조금 올려주는 것으로. 그만두라는 이야기 였다. 내가 조금 더 고객을 확보하면 한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비지니스를 할 것으로 보고, 화근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직정을 찾았다. 네일살롱에 프로덕을 판매하는 회사였다. 그 회사 제품이 괜찮아 보여서 찾아가서, 영업을 하기로 계약을 했다. 기본급 없이 인센티브만 받는 것으로 했다. 딩시 네일업계는 제품을 팔고, 월말에 인보이스 보내면 그 다음 달에 체크를 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처음 조건은 제품을 판매하고, 살롱 오너로부터 인수증에 싸인을 받아오면 30% 를 받는 조건이었다. 첫달을 정말 열심히 했다. 2백불 정도의 제품이어서 커네티컷 네일살롱 중에서 조금 규모가 있는 곳은 다 쓰게 했다. 계속 리필되는 제품이니까, 처음 쓰게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었는데, 내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오너들이어서 거의 다 그 제품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달에 백군데 이상에 제품을 팔았다. 한 살롱에서 매월 평군 50불은 커미션이 들어올 것이니, 6개월 동안 5백 곳 장도만 영업을 하면 꽤 큰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올 상황이었다. 한달이 되어서 정산을 받으러 갔더니, 수금이 들어와야 커미션을 준다고 했다. 제품을 주면서 돈을 받아다 준 곳도 있어서 그럼 그것이라도 달라고 했더니, 미수금이 내 커미션 보다 많기 때문에 못준다고 했다. 그 분들의 계산에 의하면 내가 매월 백 군데 씩 어카운트를 늘려가면 나는 어카운트를 늘려가는 과정에는 한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한푼도 받지 못했다. 이분 들은 내가 거래를 터준 살롱에서 꽤 돈을 벌 것이다. 이분들이 제품을 개발해서 2년 정도 동안 총 2백 곳도 어카운트를 늘리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한달에 백 곳에 어카운트를 열었다. 미국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는 나를 수용하지 못했다. 결국 사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와이프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네일살롱 운영 컨설팅 이란 것을 시작했다. 6개월 정도를 계약해서 운영을 진단하고, 단점을 줄이고, 강점을 강화해서 살롱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일이었다.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윤재라는 뉴욕 네일협회의 대모 라고 불리우는 분 때문이었다. Flushing 에 있는 페디큐어 췌어 쇼룸에서 근무를 했는데, 살롱을 새로 오픈하고나, 리노베이션을 대대적으로 할 경우에 페디큐어 췌어를 결정하는 것은 주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오너들이 방문했다. 나는 췌어를 소개하면서, 그분들의 여건을 듣고, 어드바이스를 했다. 미국에 온지 두달 도 안된 사람에게, 네일 살롱이란 것을 본지 한달 밖에 안된 사람에게 그 분들은 컨설팅을 받은 셈이다. 내가 강조하는 다섯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해하고, 그중에서 두가지만 따를 수 있으면 100% 성공한다고 외쳤는데, 실제로 그랬다. 어느날 60대 중반의 여자 분 두분이 오셔서 페디큐어 췌어를 보셨다. 살롱을 오픈하실 거면 어드바이스를 해드려도 되겠냐고 했더니, 두분이 서로 쳐다보고 웃으시곤, 설명해 달라고 하셨다. 두분에게 3시간 넘게 어드바이스를 해드렸다. 두 분중 한분이 다음에 다시 와서 한번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냐고 하셨다. 다음 주에 오셔서 역시 3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이 네일살롱을 여러개, 오랫 동안 하셨고, 이십년 전에 뉴욕 네일협회를 만드셨고, 수석부회장을 8년이나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이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잘못 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을 자기만 듣고 마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이것을 비지니스로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이로부터 1년 뒤에 결국 네일살롱 컨설팅 비지니스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커네티컷 네일협회를 만든 상태였고, 뉴욕 네일협회에서 경영 세미나도 몇번 개최했다. 뉴욕 네일협회 회장님은 네일업계에서는 내 말이 법이라고 자주 말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컨설팅을 시작한 초기에 수입이 적었기 때문에, 저녁에 빌딩 야간 청소도 했다. 피나클 캐어 라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오래 할 수 없었다. 남들이 2시간에 하는 것을 4시간 동안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가서 대청소를 해주고 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6시에 시작해서 11시에 끝날 일을, 새벽 2시 까지 하고 오곤 했다. 나를 고용한 오너가 일을 시작할 때, 3개월은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교육하는 데에 쓴 시간이 메이크업 된다고 했다. 3개월 되는 날에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너무 열심히 하셔서 이 일에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만두는 내게, 보너스를 주었다. 3개월 간 4곳의 청소를 했는데, 첫 주에 컴플레인 한 건 나오고 그 이후는 한번도 컴플레인이 없었다고 했다. 서로간에 감사했다. 이 오너는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에 부인에게 네일 살롱을 차려주고 싶다고 내게 전화를 했다.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한 것인데, 나는 이 분의 전화번호가 메모리되어 있었기에 통화를 시작하면서 "혹시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고 물었더니 잠시 멈칫하다가 "제가 아는 분 맞으시죠? 오래 전에 같이 일한 적 있는" 참 반가웠다. 당연히 성심껏 상담을 해드렸는데, 와이프 분이 결국은 자신 없다고 하셔서, 일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컨설팅 비지니스는 너무 순조롭게 되어 갔다. 당시 뉴욕, 뉴저지, 커네티컷에서 연 1백만불 이상의 매상을 올리는 살롱이 십여 곳 이었는데, 이중에 8 곳이 내게 고정적으로 컨설팅을 받았다. 커네티컷 네일협회도 만든지 1년 만에 개선이 필요했던 라이센스 법이 개정되었다. 우리 협회도 주정부에 편지를 보내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내려져서 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협회는 타운에 있는 양로원에 봉사를 가고, 같은 타운에서 경쟁관계에 잇는 살롱 끼디 정기 미팅을 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살롱 간의 소통을 통해 과잉경쟁도 막고, 직원들의 이동에도 원칙을 정했다. 3~4년 정도 열심히 했고, 내 컨설팅의 변화가 생기면서 손을 뗐다. 컨설팅에 생긴 변화는 너무 진심어린 어드바이스를 하다 보니, 어드바이스를 안받아 들이는 사람에 대해 화도 나고, 실망하게 되고 하면서, 돈을 받고 남을 돕는다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컨설팅을 봉사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수입을 위해 야간에 콜택시 운전을 했다. 낮에 일하고,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운전을 했다. 한마음 콜택시 라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한인 콜택시 회사 중에 가장 오래된 거의 유일하게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회사였다. 12대의 차가 모두 링컨 이었고, 직원들은 검은색 정장만 입어야 했다. 운전이 편안했던 나는 이 회사에 들어가서 기록을 갈아치웠다. 들어간지 3일 만에 고객을 모셨고, 3개월 만에 VIP 를 모시는 운전자가 되었다. 스무명 되는 기사 중에 VIP 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5명 정도였다. 모두 20년 넘는 경력의 기사였고, 참 모든 면에서 잘한다 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삼성, 엘지, 현대, 한솔, 씨제이, 아모레, 한아름 등 주요 회사들이 고객이었다. 다른 콜택시 회사는 리무진으로 등록이 되지 않은 차들로 운영을 했고, 우리 회사는 모두 등록된 차량에, 보험도 제대로 들고 운행을 했다. 당연히 요금도 30% 정도는 비쌌다. 한마음 콜택시의 사장은 김 주환 이라는 독특한 친구였다. 코트라 임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국민학교 때 미국에 와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잘생기고, 공부도 잘해서 유 시카고 경제학부를 나왔다. 대학교 때, 최태원, 노소영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노소영에게 누나라고 하며 친하게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봤다. 큰 스탠드 바와 룸살롱을 운영하면서 콜택시 회사를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65년   생이었는데, 자기 보다 나이가 많은 기사들에게는 형님이라고 부르며 리더쉽도 좋았다. 야간에는 보통 7~8명이 근무를 했는데,  대부분이 룸살롱 앞 파킹 랏에서 기다리다가 디스패처의 콜을 받았다. 일한지 3개월 쯤 되었을 때, 사장에게 건의를 했다. 룸살롱에 방이 많던데, 맨 가에 있는 방 하나를 기사 대기실로 주면, 쓸데 없이 차에 시동 걸어놓고, 에어컨 히팅 틀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사장은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부터 야간 타임 기사들은 아주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다.  콜 받아서 나갔다 오면 그 근처의 유명한 간식 거리를 사가지고 와서 함께 파티를 벌렸다. 룸 살롱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음료나, 군것질 거리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모두들 사장 보다 내게 고마워했다. 몇달 더 지나면서 나는 사장에게 서비스 요금을 올리자고 건의를 했다. 사장은 가뜩이나 다른 곳 보다 30% 가 비싼데 더 올려도 되겠냐고 했고, 나는 내가 책임지고 각 회사 담당자나,, 대표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지사장들의 콜이 오면 내가 모시러 갔고, "저희회사 서비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면 하나 같이 "한마음의 서비스가 최고니 우리가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 나는 "가족 분들도 가끔 이용아히는 것 같던데요?" 라고 물으면  "가족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공항에서 맞이해 줄 때는 VIP 가 된듯한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미국의 리무진 서비스 회사는 A,B, C 등급이 있는데, A 등급 회사의 기사들은 하루에 $5~700 정도 수입을 하고, B 급 회사의 기사들은 $3~500 정도, 그리고 C 급 회사의 기사는 $2~300 을 법니다. 저희는 얼마나 벌까요? 저희으 ㅣ서비스 퀄리티는 A 급 보다는 차량이 조금 떨어지는데, 이것 말고 기사들의 수준은 A급 이상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조금 받는 사람은 시간 당 $11, 많이 받는 사람이 시간 당 $15 을 받는다고 이야기 하면, 깜짝 놀랍니다. 자기들은 꽤 많이 내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적게 돌아가네요 라고 말을 한다. 요금을 20% 올려 주시면 저희가 훨씬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손님과 가족들을 모실 거라고 말하면 거의 다 긍정을 하고, 도와 달라고 간절히 말하면, 밑에서 기획안 올라오면 결제하겠다고 한다. 20% 인상을 강행했는데, 십여군데의 주요 거래처 중에서 CJ 와 한솔 만 빠져나가고, 다 협조를 해주었다. 한마음 콜택시 25년 역사에 첫 요금 인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서프라임 사태가 발생하기 1년 전, 한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처남이 미국에 왓다. 누나와 매형이 고생하니, 자기가 돈은 없지만, 자기 회사 주식을 담보로 해서 1백만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사업을 하시던, 집을 사시던 알아서 하시라고 했다.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네일 학원을 하나 차리고, 좋은 Nail Spa 두 곳을 차리기로 했다. 처남이 돈을 보내줄 때, 어차피 이자가 나가는 돈이니 절반 먼저 보내라고 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50만불을 먼저 받아서, 학원을 오픈하기 위해 장소 구하고, 살롱을 할 장소를 구해서 동시에 작업에 들어갔다. 살롱 한 곳을 꾸미는 데에 40만불 정도 들어가는데, 살롱 공사의 2/3 가 진행되고, 네일 학원의 2/3 가 진행되었을 때, 서프라임 사태가 터졌다. 주식은 곤두박질하고, 처남이 했던 주식 담보 대출이란 것이 없어졌다. 후반부에 들어와야 할 50 만불이 못들어오게 되었다.  학원을 포기하고, 살롱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지만, 살롱만 하더라도 10만불이 모자랐고, 오픈하고 운영자금까지 하면 최소 15만불은 있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도 한 은행에서 10만불을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와이프 이름으로 크레딧 카드를 만들어 5만불을 충당하려 했다.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크레딧 카드로 4만불 정도 한도를 만들어 썼고, 은행 론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렌트에 부담이 더해져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랜로드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돈을 들여놓은 것이 아까우니, 3개월의 기간을 주고 살롱을 매매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자 하는 살롱은 기존의 평범한 살롱과 달라서 쉽게 매매가 어려웠다. 랠로드는  밀린 렌트도 받지 않았다. 50만불 이라는 큰 돈이 들어와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 4만불의 카드 부채만 남았다. 처남에게는 이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와이프의 크레딧은 망가지고, 급여 차압도 들어왔다. 나는 이 부채를 7년이 걸려서야 갚을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말했다. 돈은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한다고.. 맞는 말일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나는 같은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미국에 온지 3년 쯤 된 어느 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파킹 랏으로 가는데, 누가 뒤따라 와서 나를 불렀다. 안성민 이란 친구였다. 한국에서 대학교 때, 숭실고등학교 나온 친구들이 많았다. 성민이는 숭실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친구였다. 중고등학교 때, 금호동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친구였는데, 아버님이 버지니아의  어떤 대학에 교수로 계셔서, 가족이 이민을 왔다. 미국에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비지니스를 하다가, 아버님이 포항제철그룹 부회장으로 스카웃이 되어 한국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결국 28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다시 왔다. 그리고  절친이 있는 우리 회사로 와서 2년간 함께 했다. 그리고 독립해서 판촉물 회사를 운영했는데, 차량용 방향제를 만들어서 꽤 성공을 했다. 하지만 유행을 타는 제품이어서 회사는 규모를 키웠는데, 매출은 급감했다.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고, 성민이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나보다 5년 정도 먼저 미국에 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는 스카프를 파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직접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꽤 성장을 했다가, 서프라임으로 인한 불경기로 비지니스가 위축되었다. 이 시점에 나를 만났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 말을 아주 존중해주는 친구였다. 직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줄이라고 어드바이스를 했더니, 직원을 줄이는 대신에 가끔 시간 내서 도와달라고 했다. 쇼에 나가거나, 일년에 두번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세일즈를 하는 데 같이 가달라고 했다. 내가 하는 컨설팅 이라는 직업이 시간 활용이 편했기 때문에,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가고, 주요 도시 세일즈에도 두번 동행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사업은 나를 만나기 1년 전부터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1년에 스카프만 천만불 가까이 매출을 했었는데, 몇년 사이에 3~4백만불로 떨어졌다. 창고에 재고가 4~5백만불 정도 쌓였고, 부채가 2백만불을 넘었다. 내게 조언을 구했고, 나는 몇개월 동안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찾았다. 파산 신청을 하고, 팔 수 있는 재고 절반만 가지고 나가서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과, 부채를 분할 상황하면서 회사를 끌고 가는 것 중에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5년간 부채를 갚아나가는 방안이 좋겠다고 했다. 내 판단 때문 만은 아니지만, 성민이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채를 갚아 나갔다. 5년이 지나서 부채는 갚았지만, 회사는 너무 어려워졌고, 집도 팔아야 했다. 나에게 한 두번 그때 파산 했어야 했는데 라고 하소연을 했다. 나는 지금도 같은 조언을 한다. 앞날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당당한 선택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이 친구는 묘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부모형제 간에도 돈 거래는 안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친구에게 몇번 돈을 빌리려 했고, 그때 마다 같은 소리를 들었다. 사실은 이 친구도 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상황임을 알기에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음을 안다. 너도 급하면 돈 빌리러 다니는 걸 아는데, 그때는 그 원칙이 적용 안돼냐고 빈정대지만, 이 친구는 자기의 원칙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와서 같은 교회에서 한 권사님을 만났다.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지만, 나보다 나이로는 9살, 학년으로는 10년이 연배셨는데, 미국에 자리 잡은 엘리트들과 같이, 경기고, 서울대를 나오시고, 종합상사 주재원으로 나오셨다가, 놀러앉으신 분이다. 한화에서는 김승현 회장의 바로 밑 동생과 친한 친구셔서, 가만히 있어도 사장은 된다고 할 정도로 촉망받는 분이셨는데, 미국 생활이 아주 만족스러우셨단다. 미국에서 이 분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컨설팅 비지니스에도 도움을 주셨고, Construction 회사를 오픈할 때도 같이 하셨다. 한국으로 고철을 수출하는 일을 알아보다가, 고등학교 동창 성주의 처남이 한국에서 알루미늄 스크랩이 필요해서 을 구하는데, 이곳에서 자동차 엔진을 분해해서 알루미눔 스크랩을 한국으로 보내는 비지니스를 하기로 하였다. 네명이 동업으로 하여. 한국에 있는 처남이 구입자금을 먼저 보내주었고, 이를 가지고 뉴욕,뉴저지, 커네티컷, 펜셀베니아의 야드 들을 돌며 스크랩을 구했다. 스크랩 얃라는 곳이 처음 보는 묘한 비지니스였다. 한번 시작하면 대대손손 편안해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회사들은 대를 이어서 하고 있었다. 특히 마피아가 힘을 썼다고 하는 비지니스 분야여서, 할아버지 마피아, 아버지 마피아의 사진을 붙여놓은 곳도 있었다. 강을 끼고 있는 스크랩 야드도 꽤 있어서, 바지 선을 이용하여 항구로 고철을 운송하기도 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맣은 양을 사려고 하면 더 높은 가격을 치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소량 구매 보다 대량 구매일 때 더 싼 가격을 받는데, 이쪽 분야는 완전히 거꾸로 였다. 알루미늄이 1 톤 필요한 사람은 톤 당 2천불을 주고 산다고 할 때, 매월 1만톤이 필요한 사람은 톤 당 $2,500 에 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큰 바이어가 가장 비싸게 원자재를 공급받는 것이 고물 비지니스이다.  스크랩을 사서 모아놓을 수 있는 공간과 돈만 어느 정도 있으면 모아놓을 수록 돈이 된다. 롱 아일랜드에 Gershow 라는 스크랩 야드가 있다. 자동차를 슈레딩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회사인데, 거래를 가끔 했었다. 이 야드의 뒷마당으로 가면 자동차 바퀴 옆에 붙어있는 로토 라는 쇳덩어리를 산처럼 쌓아놓았다. 10년 전 쯤에 갔을 때, 한 30만톤 된다고 했다. 왜 안팔고 쌓아놓느냐고 했더니, 전세 고철이 톤당 550불 정도 갔을 때 팔았어야 했는데, 현재는 200불 선이어서 팔지 않고, 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빨리 파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고철 값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톤당 천불이 넘었다. 10년 전에도 30만톤 이었으니, 아마 50만톤 이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200불에 팔 수도 있었는데, 천불을 훌쩍 넘겨서 팔게 되었으니 톤당 최소 800불을 번 것인데, 50만톤이면 4억불을 번 셈이다. 스크랩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기적 같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장은 꽤 폐쇄적인 시장인데, 그래도 뉴욕의 중군인들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미국 내의 모든 스크랩 메탈의 70% 가 중국으고 가고 있으니, 이들에게는 좋은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친구와 처남과, 장로님과 나의 동업 구조가 깨어졌다. 가족 간의 문제로 인해 내 친구와 처남이 결별했는데, 친구의 처남이 내게 자금을 보내줄테니, 공장을 차려서 자동차 엔진을 직접 분해해서 알루미늄을 공급해 달라고 했다.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딜레머에 빠졌다. 바이어가 공장 차릴 자금과 제품 구매할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는 제안은 매력적인데, 당분간 친구에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친구가 곧 알게 될 확률은 90% 이상인데 친구의 처남은 당분간 이라고 하고, 자기가 나중에 밝힐 수 있게, 우리는 친구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참 애매했지만  처남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이 사업은 쉽지 않았다. 엔진을 분해하는 전문가가 많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전문가가 되기 까지 수업료를 많이 내야했다. 크고 허름한 창고 이면서, 오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춰야 했다. 덤프 트럭이 들어와 엔진을 쏟아야 했고, 분해한 알루미눔을 실을 수 있는 콘테이너 로딩 덕도 필요했다. Newark 의 험한 동네에 창고를 얻었다. 랜로드는 러시아 마피아가 확실해 보이는 친구였는데, 오히려 편안했다. 위험한 동네지만 막상 우리도 까만 친구들과 한국 사람들 열댓명이 섞여서, 작업복 차림으로 다니니,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친구의 처남이 친구에게 오픈하고, 친구는 나에게 삐져서 거의 십년 동안 이 일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통화하거나, 만나도 풀리지 않았다. 사업은 이렇게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갈 수 있는 선택을 할 만큼 유혹적이지만, 그것을 희생하고 얻는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와 파트너 장로님은 꽤 손해를 봤다. 그리고 거래처에 20만불 정도의 빚을 졌다. 비지니스를 축소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장로님이 남고, 내가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가 떠나고 얼마 후에 공장을 정리하였고, 장로님은 전문가로서 브로커 역할을 해서, 잃은 것 만큼은 아니어도, 꾸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친구의 처남은 한국에서 알루미눔 스크랩을 수입하는 큰 손이 되었고, 장로님은 미 동부지역의 서플라이어로 알려졌다. 나는 부업이던 건축업을 주업으로 하게 되었다. 

2010년에  네일살롱 컨설팅 광고를 보고 박 종익 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네일 살롱을 차리기 위해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온지 몇년 안되는 친구였는데, 독특한 이력을 가진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육상을 해서 한체대를 나왔는데, 삼성그룹의 스포츠 주식회사에 들어가서 럭비 팀을 관리하다가, 선수들을 위한 Physical Therapy 를 배우고, 체력 증진을 위한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럭비 국가대표팀의 코치가 되어서, 최초로 일본을 꺽고 아시아 챔피언이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낸 친구이다. 운동과 인체에 대해서 누구 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이 친구의 열정과 노력으로 선수들의 체력이 현저히 좋아지면서 이루어 낸 결과였다고 확신한다. 이 친구의 형은 88 서울올림픽 체조에서 최초로 메달을 딴 박종훈이다. 큰 누나가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스포츠 마싸지 전문가였기에, 미국에 와서도 마싸지 라이센스를 받았다. 네일 살롱 비지니스에 필요한 라이센스 였기 때문이다. 이 친구를 1년 정도 컨설팅하고, 조용한 부자 동네에 큰 네일살롱을 오픈하게 해주었다. 내가 최초로 직접 공사를 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살롱 이익금의 10% 를 받기로 하고, 프리미엄 네일살롱으로 구상을 했는데, 오픈 한달을 앞두고 자금의 문제로 인해 레귤러 네일살롱으로 오픈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조건도 없이 손을 뗐다. 그리고 이 친구의 노력으로 살롱은 성공의 길을 걸었다. 5년이 지나고, 이 친구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계속 있었고, 자신도 프리미엄 살롱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서, 돈은 자신이 댈테니, 이익금을 절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동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안할 이유가 없었고, 뉴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Summit 이라는 타운에 살롱을 차렸다. 살로을 오픈하고, 또 의견이 갈라졌다. 나는 요금에 팁을 포함하는 것으로 했는데, 이 친구는 그건 고객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리고 내가 책정한 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운영자금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 친구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해서 팁을 별도로 하고, 가격도 낮추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낮춘 가격도 불안하다고 더 낮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이 친구가 원하는 수즌은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가격을 인하했다. 두번 낮춘 가격에서 더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절대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친구는 자기 자금을 회수해 달라고 했다. 40만불을 투자했는데, 20만불만 회수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이 친구의 지분은 50% 였는데, 당시 살롱의 가치는 30만불 정도 밖에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금을 뺀 이 친구는 오레곤에 가서 대마초 농장을 했다. 3년 정도를 산 속에 파묻혀서 열심히 했는데, 절반의 실패를 했다. 지금은 재배는 포기하고, 농장을 팔기 위해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 조지아에 가서 후라이드 치킨 집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이 친구에게 나는 뉴저지로 와서 다시 네일 살롱을 하라고 권했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95% 이상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나가고, 살롱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주 뛰어난 매니저가 살롱을 살려나갔다. 한 2년 전부터는 걱정이 어벗는 살롱이 되었다. 그리고 고객들은 우리 살롱이 프리미엄 살롱이라고 인정한다. 우리는 스스로 뉴저지 최고이 네일 살롱이라고 말한다. 고객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살롱이라고. 가격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아마도 내가 겪어 본 사업 중에 가장 어려운 건축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치거나, 비지니스를 오픈할 때, 사람들 마다 기대치가 다르다. 인간 본성을 너무 들여다 볼 수 있는 비지니스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예산이 부족하니, 비싼 자재 쓰지 않고, 디테일 별로 없이 평범하게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만 해달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퀄리티를 따지고, 조금이라도 비싼 자재를 쓰려고 안간 힘을 쓴다. 트러블이 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겪은 고객 중에 절반은 감사하다고 하고, 절반은 형편 없다고 불평을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점수는 80점이다. 이를 90점으로 올리려면, 상당한 노력과 트레이닝이 필요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대부분의 건설회사들이 70~80점 사이에 있다고 본다. 물론 가끔 아주 작은 영역에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90점 짜리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같거나, 유사한 작업을 계속할 경우에 퀄리티가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어떤 고객을 만나느냐가 그 회사의 평판을 좌우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건축 분야에서는 이 문제가 아주 첨예해서 많은 트러블이 발생을 한다. 십여년 동안 나는 이 분야에서 많은 실패를 했다. 4~5명의 고객에게는 심하게 컴플레인을 들었다. 모든 다툼에서 나는 뒤로 물러서서 손해를 봤다. 이제는 다투지 않는다. 그냥 손해를 보면서 어느 정도의 요구를 들어주고 끝낸다. 우리와 안맞는 고객일 뿐이라고 단정하면서. 럭셔리 하우스 공사도 꽤 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서민을 위한 집을 짓는 건설회사가 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우리 스스로가 고객이 되는 공사를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 2~3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니, 그때 까지는 고객응ㄹ 상대하느라 힘든 시간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결론을 내리려 한다. 사업을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사업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크리스찬 사업가로 성공하고, 수많은 간증을 하고 다닌,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 회장을 나는 잘안다. 그는 매일 회사에서 직원들과 새벽기도를 드리며, 직원들에게 꿈을 주었지만, 결국은 자기 가족만 부를 누리고 있다. 직원을 모집하면서 기독교인 우대한다고 했다가, 아주 힘든 경험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찬 오너가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직원들이 바라는 기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오너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면, 직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누가 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반대로 직원이 크리스찬인 경우는 남들 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가 쉽다. 진정한 크리스찬 이라면 남들과는 많이 다르게 사업을 해야 한다. 결국 남들 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수많은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 였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과 욕심에 의한 선택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 선택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서 고생을 했다.' 많은 돈을 잃고도, 명예도 잃었다. 물론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도 많이 안좋아 졌을거다. 

하지만 크리스찬도 사업을 해야 겠지?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크리스찬 사업가라는 힘든 자리에 네가 들어오면 좋겠다. 성공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 땀 흘린 열매에 감사하고, 그 이상은 내것이 아닌, 사탄의 유혹임을 깨단는 것이 크리스찬 사업가이다. 그렇게 사업을 한다면 1년을 하면 1년 만큼 영광을 돌린 것이고, 감사하게 10년을 하면 10년 만큼 하난님ㄲ 영광을 돌린 것이지. 끝으로 한 친구 이야기를 더해야 겠다. 박기전이라는 내 해운회사 직장 동료가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 온 친군데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눈 이야기가 있다. 자기는 가난하게 살아서 겁날 것이 없다고 했다. 언제든지 월세 단칸방으로 이사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와이프에게도 항상 그렇게 이야기 했다. 이 친구 두 아들 도진이 도영이의 이름을 내가 지어줄 만큼 친했다. 연락은 하지 않고 지내지만, 이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의 이름을 치면 인터넷에서 상황을 볼수 있는데, 25년 간 꾸준하게 그때 시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게 살았다. 어쩌면 좁은 한국에서 살아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보다 훨씬 지혜로운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크리스찬 사업가로 사업을 하려면, 항상 긴장해야 한다. 평안할 날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직원들과 친구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힘들 때는 오너가 총대를 메야 하지만, 열매는 같이 나누기를 원한다. 참고로 나는 내 파트너들에게 회사가 아무리 성공해도 우리가 가져가는 주급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항상 확인한다. 가지고 있는 지분이 가치를 가지겠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주식 상장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 파트너들이 가질 것은 돈은 아니고, 명예와 보람 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너무 간절하게 돈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기에 어떨까? 돈을 위해 나를 찾는 것이니...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진의는 개 같이 벌으라는 것이다. 나중에 정승 같이 쓰면 다 용서되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벌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정승 같은 마음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크리스찬이니 돈을 벌면 사랑을 베푸는 일에 쓰겠습니다. 그러니 돈을 벌게 해주세요 !"  이런 기도 뭔가 많이 어색하지? 사랑을 베풀면서 돈을 벌기는 어렵다. 죽기 살기로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은데, 정직하게, 양보해 가면서, 소송도 하지 않고,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한 말은 개 같이 돈을 번 사람에게 주는 좋은 말이다. 돈을 벌기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면, 좋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크리스찬으로 사업을 시작하면 사탄의 아가리에 한 발을 짚어넣었다는 마음 가짐으로 해야 한다. 실감이 잘 안나지? 눈 한번 질끈 감으면, 큰 돈이 들어올 수도 있다. 거짓말 해야 회사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도 있다. 마귀에게 절 한번 해서 천하만국을 가질 수 있을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크리스찬은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힘든 일을 시작하려는 너를 나는 응원한다. 그리고 축복한다.  

끝으로 네게 가장 중요한 두가지를 말하려 한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크리스찬 사업가의 가장 큰 힘은 결과에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과가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그냥 일만 하면 된다. 조금 적게 주시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조금 많이 주시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적게 주실 때도 감사하고, 많이 주실 때도 감사해야 한다. 이 감사에는 내가 없어야 한다. 내 능력이 무시되어야 한다. 내 노력만 생각하면 된다. 내가 쏟은 시간, 땀과 눈물만 생각하면 된다. 어떤 누구도 능력이 뛰어나서, 잘나서 성공하지 못한다. 모든 결과에 내가 빠지고, 하나님만 있으면 너는 성공한 것이다. 

둘째는 어떤 사람도 너를 성공하게 만들거나, 실패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을 들어서 네게 시련을 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을 들어서 네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에 담담해라. 그 사람을 보지 말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도 없고, 어떤 사람을 떠받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내 긴 사업 이야기에는 모두 하나님의 행하심이 들어있다. 네가 직접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수많은 실패와 부끄러운 간증이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요즘 눈이 안좋아서 오타를 잘 보지 못하니, 이해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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