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8일 일요일

나의 선생님들

*** 이 글은 제 개인적인 과거의 일을 정리하는 차원의 긴 글입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는 남겨야 하나 항상 망설이는데,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써서 남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졸업'이란 드라마를 잘 보고 있습니다. 학원 선생과 교사에 대한 주제도 있고, 스승과 제자에 대한 주제도 있고... 꽤 생각을 하게 하는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저를 가르친 선생님들과 제가 가르친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 기억 속의 첫 선생님은 국민학교 1학년 담임인 백옥진 선생님입니다. 아마 40대 후반 쯤 되셨을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는 편안하고 넉넉하게 1학년 아이들에게 학교에 대해 알려주신 선생님인 것 같습니다. 이어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이 씨 성을 가진 젊고 예쁜 선생님이셨습니다. 항상 웃으며 아이들을 잘 대해 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정년을 앞둔 고구마 라는 별명으로 기억되는 남자 선생님이였는데, 안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 엉덩이를 때리는데 아래 옷을 다 벗기고 때리셨습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구요. 여자 아이들 여러 명을 울게 만들었죠. '늙은 변태' 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4학년 담임은 이 찬무 선생님이셨습니다. 바바리 코트에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고, 싸나이라고 할 에너지를 가지신 선생님이셨습니다.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담임 선생님에게 과외를 했습니다. 4학년과 5학년 때는 선생님 사모님들도 자주 뵈었습니다. 가끔 간식도 가져다 주셨구요. 5학년 담임은 서 명원 선생님 이셨습니다. 검정색 슈트와 조끼 까지 단정하게 입으시고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 모두 얌전하고 정감있는 분이셨습니다. 과외 장소가 금호동이어서 처음에 조금 문제다 되기도 했습니다만, 신당동과 바로 붙어있어서, 걸어가기 멀지 않았기에 9개월간 금호동의 2층 방에서 과외를 했습니다. 

6학년 담임 정 철균은 최악의 교사 였습니다. 남자 여자 아이를 막론하고 성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과외를 할 때도 한명 씩 번갈아 가며 성기를 주물럭 거리며 수업을 했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며 후회가 남는 시절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를 지키기에 급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반이 학교 도서관을 책임지고 있어서, 저는 전체 수업의 절반 정도를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이 오면 책 찾아주고, 여자반 아이들이 가사 실습하러 오면 어지럽히지 않게 단속하면서요. 천성적으로 수업 받기 싫어하는 저는 아무 일 없어도 도서관에서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주 정철균은 여자 아이를 도서관으로 데리고 와서 제가 보는 데서 성추행을 했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아마도 제가 있어서 더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정철균과 절친인 여자 반 담임 이 모 선생이 여자 아이를 정철균에게 보내는 심부름을 시키면, 그 아이를 도서관으로 데리고 와서 그짓을 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할 때 마다 후회가 됩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오금동이란 동네에 살면서 손 상철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신성 학원'이란 곳에 다녔습니다.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쳐서 교회로 인도할 목적으로, 아니면 그냥 선교의 목적으로 학원을 운영하셨습니다, 학원비는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제 하루 용돈이 한달 학원비 정도 였으니까요. 꽤 아이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백영승, 김대중, 임영종, 이대희, 지재붕, 윤국, 김종훈, 박은숙, 박미숙, 강미숙, 이금희...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 거명한 아이들은 모두 인근 학교에서 1~2 등을 다투는 아이들이었더라구요. 손 선생님의 사모님도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소위 시내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니까, 외관 동네 아이들과 수준 차이가 꽤 있었지만, 이 아이들과는 차이를 못느낄 만큼 괜찮은 아이들이었던 기억입니다. 이중에서 나이들어서도 만남을 유지한 아이들이 재붕이, 대희, 국이 인데, 전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일들을 하며 살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손상철 선생님이 하도 푸쉬를 하셔서 오금중앙교회의 겨울성경학교 부흥회에 참석했고, 여기서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손상철 선생님은 제게 있어 큰 감사로 기억되는 선생님이십니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은 설 동기 선생님 이셨습니다. 중년의 미술 선생님이셨고, 교육자라기 보다는 화백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조금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승 영희 선생님 이셨습니다. 윤리를 가르치시고, 교도부 주임을 맡은 엄격해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선생님과는 사연이 있습니다. 학기 초부터 갑자기 당구 바람이 불어서, 학교 윗골목에 있는 만화가게에 있는 당구 대의 쟁탈전이 벌여졌습니다. 종례가 끝나고 가면 당규대를 차지할 수 없었죠. 수업 끝나면 담임의 종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먼저 만화가게로 갔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만화가게에 있는 미니 당구를 쳐봤고, 손님이 끊어지는 밤 늦게 까지 기다려서 당구를 1년 정도 쳤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하는 아이들 보다는 조금 더 잘쳤죠. 한 1주일 정도 종례를 빼먹었을 때,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왜 종례 빠지냐고 물으셨고, 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벌로 1주일간 계속 청소 당번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계속 종례를 빠지고 당구장으로 갔죠. 선생님은 한번 더 제게 한달 청소를 하라고 하셨고, 저는 계속 종례를 빠졌습니다. 두달은 족히 이렇게 했는데, 아무 말씀 안하시더라구요. 여름 방학 시작 조금  전에 당구를 끊었습니다. 한양대 정문 앞에서 당구장을 하는 이영구라는 아이와 함께 밤 늦게 영구네 당구장에서 '벨기에' 당구 공으로 당구를 쳐보니, 미니 당구가 싫어지더라구요. 그리고는 종례에 참석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막가파도 아니고, 완전한 문제아도 아닌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선생님이 저를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제가 가끔은 황당하게 겁이 없기도 하구요. 2학기가 되어서 교내 합창대회가 있었습니다. 전교에 풍금이 2대 밖에 없었고, 학급은 42학급이나 되니, 연습기간 4주 간은 풍금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여졌습니다. 저는 1학개 때의 만행을 만회하기 위해, 사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풍금을 준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부터 4주간 학교에 새벽 5시에 갔습니다. 담넘어 들어가서 숙직실 문 두들겨서 본관 문 열어달라고 하고, 2학년 별관 키 받아서 풍금 들고 교실에 놓고, 키 가져다 드리고 교실에서 혼자 2시간 이상 있었습니다. 나머지 풍금 1대를 가지고는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5시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합창대회는 2등으로 끝났고, 선생님은 교도부실로 저를 오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볼펜을 한자루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는 생각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고 하셨습니다. 커피 마시겠냐고 하셔서, 커피 아주 좋아한다고 하니, 타주시면서, 커피 마시고 싶으면 교도부실로 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기억에 한번 커피를 마셨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 편지 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때 승영희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었습니다. 그리고는 잊어 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종례시간에 정재호 담임 선생께서 저를 교탁 앞으로 나오게 하시더니,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저를 때리시는 시늉을 하시면서, "너는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여자에게서 학교로 편지가 오게 하냐?"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주셨습니다. 자리에 들어와서 보니 선생님의 편지 였습니다. 저는 반갑고, 감사해서 답장을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선생님께 답장을 받았었죠. 이것으로 끝이었지만, 제 학교 생활에서 가장 엇나간 시절을 잡아준 고마운 선생님 이십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은 권 근택 선생님이셨습니다. 40대 중반의 수학 선생님이셨습니다. 당시 제가 영어는 잘하고, 수학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옆반 담임 이 영찬 영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영어는 제가 지초가 제일 잘되어 있다고 몇번 말씀하실 정도로. 사실 저는 영어가 어려웠고, 이 때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 주에 한번 씩 담임 선생님 집에서 수학 과외를 했습니다. 논현동에 있는 영동전화국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집이 었는데, 당시 강남에는 신사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들이 없었는데, 빨리 강남으로 진출해서 이익을 챙기신 안목이 있으신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문제를 풀다가 틀리면 꼬집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다정한 교육자셨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선생님 중에는 체육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많습니다. 제가 피지컬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전동찬 선생님은 학교에 테니스부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셔서, 제가 2학년 때 저희 학년에서 5명 정도를 선발해서 훈련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테니스는 태동기였을 겁니다. 라켓도 안만들었던가? 아니면 한일에서 만들기 시작했던가? 었고, 유명 선수는 없었죠. 학교에 테니스플 쳐본 아이들은 몇명 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반 반장 진호는 테니스를 꽤 쳤던 것 같구요. 늘 치아 교정기를 끼고 다니던 준호도 테니스를 꽤 쳤던 것 같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테니스는 일반적이지 않은 부자들의 스포츠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때에도 골프를 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중 2 때 친하게 지내던 학교 근처에 사는 조 항준이라는 아이 집에가서 골프를 쳐본 적이 있습니다. 집 안에 골프 연습장을 차려 놓고, 골프 공이 아닌 플라스틱 골프공을 쳤지만, 항준이는 꽤 스윙이 좋고, 정확히 임팩트가 됐었습니다. 저는 누나 라켓을 가지고 테니스부에 들어갔습니다. 뽑혔던 건지도? 3월의 7시는 어둡고 추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힘에 대해 자만하는 편이라서 힘으로 테니스를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이 비껴맞으면 손목이 아플 정도로 울리더라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제가 큰소리 친 것을 들키기도 싫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전 선생님이 출장을 가시고, 성함이 '창희' 인가 하는 별명은 '개뼉다구' 이신 선생님이 대신 한주를 가르치셨는데, 정말 대단한 실력자셨습니다. 서브를 넣으면 공이 우리를 지나간 후에야 볼 정도로 빠른 서브도 하셨고, 실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때다 싶어서 그만뒀죠. 한 4주 정도 한 셈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한두번 더 권유하셨지만, 저는 집에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하고 그만뒀습니다. 개뼉다구 선생님은 별망만 그렇지, 제가 아는 멋있는 체육선생님이였습니다. 

또 한분 묘한 체육 선생님이 계셨는데, 김 성광 선생님이셨습니다. 붉은 얼굴의 자그마한 체구의 선생님이셨는데, 도를 닦은 듯한 분이셨습니다. 체육시간에 인체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 중 여러가지가 제 삶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운동과 인체에 대해서 꽤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조금은 한 편인데, 어떤 누구도 해주시지 않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다 맞는 이야기이고, 나중에 논문 등으로도 입증이 되더군요. 서정민(?) 인지 아주 멋있는 체육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핸드볼을 전문으로 하셔서, 중 3 때, 서울 운동장의 실외 핸드볼 코트에 같이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고등학교 때 보니 동일여고의 핸드볼 감독이 되어서, 제가 다닌 영동고등학교에 경기를 하러 오셨더군요. 당시에 우리 학교 체육관이 핸드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체육관이어서 거의 모든 핸드볼 경기를 저희 학교에서 했었습니다. 남자들이 보기에도 멋있는데, 여고에서 체육을 가르치며 핸드볼 감독을 하시니 정말 인기가 많으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얀 바지와 선글래스가 정말 잘 어울리는 기분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멋있는 선생님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물상을 가르치는 박 재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재벌 2세 느낌을 풍기는. 노란색 무스탕 오픈 카를 타고 학교에 오시기도 하고, 경력도 많지 않은데, 연구 주임을 맡으셨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아주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듯한 유학파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아서 집에서 반대하지만 교사를 하신다고 알려졌고, 늘씬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지 화자라는 지리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화려한 색의 정장을 입으시고, 큼직한 선글라스를 끼고 조회시간에 항상 단상 옆을 지키시던 아주 인기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원재라는 젊고 멋을 많이 내는 수학 선생님이 오셔서, 그야말로 폭풍 인기를 끄셨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으신 탓에 계단 밑으로 아이들이 몰리게 만들었던, 아댜룰 갓 졸업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한 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수업시간에 우리 반에서 황당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고,얌전한 편인 김성목이란 아이와 괘 공부를 잘하는 한 아이기 선생님을 죽어라고 따라다녔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선생님도 이 아이들에게 밖에서 만나서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성목이의 옆자리에 있는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선생님의 치마를 손으로 들어올린 것입니다. 선생님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교탁으로 가셨고, 어쩔줄 모르고 잠시 서계시다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순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계산이 있었을까? 아이들은 성목이에게 물었지만, 성목이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 때문이었는지 선생님은 한달 정도 더 계시다가 학기를 마치고는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신 난수라는 영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의 영어를 하셨죠. 목이 조금 길고, 피부가 까마면서 눈이 부리부리한 젊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작고 귀엽게 생긴 복만이를 좋아하셔서 수업 시간 한 시간 동안 "뽕마니" 를 서너번 씩은 불러대곤 하셨습니다. 복만이에겐 괴로운 시간이었겠죠. 한번은 외국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학교 안내를 이 '신난다 (별명)' 선생님이 맡으셨습니다. 정말 진땀을 빼시더라구요. 영어 선생님도 영어로 대화를 하지 못했던 당시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영동고등학교는 꽤 우수한 교사와 시설을 가진 학교였습니다. 선생님들의 절반 이상이 서울대를 나오셨다고 할 정도로. 고 1 담임 선생님은 박정훈 선생님이셨습니다. 독일어를 가르치셨는데, 정말 깔끔한 신사셨습니다. 학교에 붙어있는 집에 사는 친구 준철이네 집에서 4명이 선생님에게 영어 과외를 받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사모님이 지병이 있으셔서 아주 깔끔한 안경 뒤로 항상 우울함이 묻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정 재호 선생님이였습니다.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아주 자그만 체구지만 뭔가 신념이 있어 보이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국영수 선생님 중에 거의 유일하게 과외 수업을 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이셨습니다. 기억하는 추억(?)이 하나 있는데,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꽤 큰 판돈을 건 도리짓구 판이 벌어졌었는데, 열심히 하고 있던 저를 부르셔서 거의 3~4시간 동안 제 무릎을 베고 주무셨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3박4일 동안 한잠도 못주무셨더니 도저히 못버티시겠다고 하시면서요. 나중에 기차에서 내리시면서 "너 쟤들이랑 놀면 다 털린다!" 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포카 빼고는 어떤 게임을 해도 돈을 따는 편이고, 제가 애들 틈에 껴서 노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애들을 불러서 만든 판 임을 모르셨던 것이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니 느끼게 된 것이지만, 저희 어머니는 학교에 자주 오시는 편이셨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항상 담임 선생님에게 과외를 한 셈이구요.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어머니는 선생님들에게 어머니가 다녀가셨다는 표시를 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셨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와 이 문제로 크게 다투고, 학교에 오시면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었습니다. 어머니의 이 불편한 학교 방문은 1년 쯤 뒤인 2학년 여름에 해소가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옆반 담임 선생님인 김 철중 장로님께서 저희 반에 수업을 들어왔다가 나가시면서 "김 성윤이 어머니 다녀가시더라!" 하고 하셨고, 저는 그날 저녁에 집에 가자마자 이를 문제 삼아 어머니께 큰소리를 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제사 처음으로 제 뜻을 꺽고 어머니의 뜻을 따른 기억이 만들어 졌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은 너를 잘봐달라는 뇌물이 아니고, 너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감사를 표시할 유일한 방법이다. 네가 뭐라해도 나는 이 감사를 멈추지 않을거다." 저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래서 나는 학년이 끝났을 때 정말 최대한 성의껏 감사를 표시한다." 고 덧붙이셨습니다. 

옆반 담임 김 철중 선생님은 어쩌면 저를 기억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1학년 때, 학교 교내활동 클럽으로 HY 라는 것을 만드셨습니다. High School YMCA 를 줄인 것으로, 당시 5년의 역사 밖에 없고, 교장이 불교신자인 학교에서 공식으로 기독교 써클을 만든 것이니, 기념할 만한 일어었을 겁니다. 매주 금요일 한 시간의 교과 과정에 이 써클 활동 시간이 있었습니다. 40명 이상의 1~2학년 생들이 가입했는데, 문제는 학교 내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도지 조차 돌릴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과 주요 멤버가 모여서 써클의 해체를 결정했었습니다. 1년 선배인 세정이 형과, 재덕(?)이 형이 주도를 하였었고, 저도 꽤 열심히 참여했었습니다. 김 철중 선생님은 항상 제게 고마워하셨습니다. 수학 수업을 하시면서, 칠판에 문제를 푸시며 아이들에게 "이거 알겠지?" 하고 물으시는데, 한명이라도 대답을 해야 다음으로 나가시는 버릇, 고집이 있으셨습니다. 수업을 하기 싫고, 선생님을 놀리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절대 대답하지 말자고 결의하곤 했는데, 선생님의 편인 저는 항상 대답을 해서 진도를 나가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면 선생님은 "응, 고마워!" 하셨습니다. 제가 우리 반의 짱은 아니었지만, 우리 반에서 저에게 뭐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기에, 저는 편안하게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습니다. 홍철이와의 해프닝은 독실한 크리스찬이길 원하시는 선생님의 교사 역사에 한 줄을 그었지만, 그래도 크리스찬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에 관련된 글이니,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선생님 반인 2학년2반에는 지각생이 많았었습니다. 하루는 조회 시간에 앞으로 지각하는 사람은 빳다 다섯대 씩 맞기로 하자고 하셨고, 아이들은 동의를 했었답니다. 그 다음 날 홍철이란 아이가 지각을 해서 종례시간에 약속했던 빳다를 때리기 위해 홍철이를 앞으로 불렀는데, 홍철이가 나와서 맞지 않겠다고 대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흥분해서 따귀를 때리시려고 했는데 홍철이가 선생님의 두 손을 모두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는 선생님의 손을 확뿌리치면서 "씨팔 학교 안다니면 될거 아냐?" 하고 자리로 들어가서 가방을 싸고 나갔답니다. 홍철이를 응이가 따라가서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게 했고, 흥분을 겨우 진정시킨 선생님을 설득하여 '흑룡강'에서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제가 아는 홍철이는 아주 반듯한 아이였고, 아르바이트도 해서 돈을 버는 아이였습니다. 얌전하지는 않지만, 저와도 꽤 친하게 지냈죠. 응이가 주선한 흑룡강 회담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그 해프닝은 없던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프닝으로 문과의 선생님들은 "이 놈들이 많이 컸네." 하셨답니다. 그리고 획기적으로 문과에서 체벌이 사라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문과 아이들은 2년 동안 체벌 없이 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이 대단한 응이는 당시에도 조계사 학생엽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고, 동국대 승가학과를 나와서 중이 되었습니다. 중이 된 이후에도 몇번은 만났던 기억입니다. 응이와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2학년 때는 다른 반이지만, 제가 종로의 조계사에서 주최하는 기초교리강좌에 참석하고, 응이가 우리 교회의 학생 부흥회에 참석하는 교류를 하기도 했었던, 깊은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안병완 영어 선생님과 김학순 수학 선생님의 과외 팀에 몇달 갔었습니다. 두 분다 명성이 있는 고 3 담당 선생님이셔서, 강남의 여러 학교에서 아이들이 왔었습니다. 안 선생님의 청담동 아파트에서 수업을 했는데, 한번은 서울 고등학교 아이들과 합반 수업을 했는데, 당시 꽤 알려진 김영균 이라는 야구선수가 왔더라구요. 운동 선수인데도 공부를 꽤 잘했나 봅니다. 수업료도 꽤 비싼 편이지만, qualified 된 아이들만 참가할 수 있던 과외였거든요. 영균이는 남자답고 괜찮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균이는 연세대에 진학했습니다. 물론 야구 선수로죠. 당시는 운동선수가 그렇게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실업팀으로는 가지 않더라구요. 실력으로는 충분했는데도. 

고 3 담임 선생님은 이 병석 선생님이셨습니다. 더블 버튼의 정장이 잘어울리시고, 서울대 수학과를 나오셨는데, 수학에 대한 자부심이 많으셨고, 제가 졸업한 뒤에 종로학원의 스타 강사셨습니다. 저와는 꽤 많은 기억을 가진 선생님이셨습니다. 저의 다른 글에서도 등장하셨죠? 학기 초에 우리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 한명을 적어내라고 했을 때부터 저를 주시하셨었죠. 당시 저희 학교 문과의 엘리트 과외가 있었는데, 1반 담임 김효태 선생님이 영어, 우리 반 담임 이 병석 선생님이 수학, 4반 담임 황 홍주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치는 엘리트 과외 였습니다. 문과 4반 중에서 공부 잘하는 6명 정도로 팀이 만들어 졌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완전 엘리트 불법 과외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내신 성적' 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시절이었고, 현직 교사의 과외가 제한을 받지도 않던 시절이어서 누구도 문제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과외는 거의 알려지지 않게 은일하게 운영되었습니다. 담임 선생님 께서 제게도 제안을 하셨지만, 저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거절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수학 시험의 채점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객관식이야 이름 가리고 템플릿 만들어서 갖다 대고,  맞는 숫자 셔서 점수만 쓰면 되는 것이니 편파도 없고,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가끔은 주관식 문제에 대한 채점도 맡기셨습니다. 물론 제 답안지는 선생님이 직접 체크하셨죠. 저는 수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수학을 잘했습니다. 문과에서 수학은 제가 제일 잘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본 고사형 주관식 시험에는 항상 1등 했고, 예비고사형 객관식 문제 때는 저보다 잘 본 애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교무실에서 짜장면을 먹어가며 늦게 까지 채점을 돕곤 했습니다. 

제가 선택했던 기독교반이 없어지고 나서, 제 절친인 정환이가 미술부에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해서, 그림 그리는 재주가 전혀 없음에도 2학년과 3학년을 미술부에서 보냈습니다. 참 잘한 선택인 것 같고, 추억이 아주 많습니다. 미술부에는 두분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곽석손이라는 홍대 미대를 나오신 선생님과 이호기 라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오신 선생님인데, 나이는 이 선생님이 조금 더 많으시고, 학교에는 곽 선생님이 먼저 오셔서 관계가 조금 애매했습니다. 미술반은 조금 독특했습니다. 전기 난로에 선생님과 같이 라면을 끓여 먹는 사이다 보니,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미술을 전공하는 선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드 모델 쓸 돈이 없으니, 펜트 하우스나 블레이 보이 잡지를 쌓아 놓고 같이 보는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홍대 미대 대학원을 나왔던 곽 선생님은 제가 졸헙하고 몇년이 못되어 지방대학 교수로 가셨습니다. 이호기 선생님은 오신 2년 차에 학생주임이 되셨습니다. 몸집이나 인상이 살벌하셨죠. 저희에게는 기분파 선배로 느껴졌구요. 

조 영윤 이란 음악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이 조 깡패 라고 할만큼 분위기를 잡고 다니셨습니다. 제가 1학년 때 부임해 오셨으니 심참 교사인데, 해병대 군악대장 출신이었고, 무게 있는 허스키 보이스로 아이들을 압도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신 중학교라는 소위 촌구석 학교의 음악 선생이었어서, 일신 중학교 출신의 제 불알 친구들과 같이 영동고등학교에 온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자기 경력에서 일신 중학교 교사였던 것이 오점으로 여겨졌는지? 제 친구들을 불러서 이야기 하지도,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힘있는 싸나이 라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배신감으로 바뀌게 되고, 어떻게 한번 혼내 줄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교육관이란 건물이 있었는데, 지하에는 식당이 있었고, 1층은 도서관, 2층은 방송반과 문예반, 신문반, 3층에는 미술반, 미술 수업실, 4층에는 음악실, 그리고 5층에는 전시장이 있었습니다. 이 전시장에는 당시에도 5천만원, 1억을 호가하는 미술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2학년 때, 조 깡패가 학생부 선생이 되어 큰소리 치고 다녔는데, 그때에 전시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간에 열쇠를 열고 들어가서 전시실에 있는 동양화 3점을 액자에서 빼서, 신문지에 말아서 휴지통에 버리고, 건물 밖으로 가서 트레쉬 츄트에서 그림을 가지고 간 겁니다. 당시 제가 옷핀으로 열쇠를 잘 열었던 때여서, 교육관의 엄청 큰 미제 자물쇠를 열곤 했습니다. 미술반에 가려는데, 문이 잠겨있으면 열고 들어가곤 했죠. 신문반 아이들도 제게 와서 부탁하면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수사하는 일을 조 깡패가 맡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소환했습니다. 그것도 수업 시간에 방송으로. 완력으로도 져본 적이 없지만, 말 싸움이나, 논리로도 자신있었던 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조 깡패 선생님과 일전을 벌였습니다. 그림을 제가 훔쳤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모두가 생각하는데, 조 깡패는 영웅심리에 사로잡혀서 제가 범인이고, 자백을 받아내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자백하라는 조 깡패 선생님에게 그렇게 자신있으면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100만원 내기 하자고 크게 걸었죠. 아마 젊은 교사의 4~5개월 봉급 쯤은 됐을 겁니다. 황당해하고, 윽박지르려고 하고 애만 쓰더니 결국은 꼬리를 내리더군요. 그러더니 제가 옷핀으로 열고 들어간 것이 불법이라고, 정학 처리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우리가 그 건물을 쓸 권리가 있는 사람들인데, 필요할 때에 문을 열어주지 않은 소사의 잘못이라고 했고, 교사에게 1개, 학생 대표에게 1개 나누어준 열쇠는 거의 다 분실 되어서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 상태인데, 다시 나눠주지도 않은 것도 학교 측의 잘못이고, 열쇠로 여는 것과, 옷핀으로 여는 것이 무슨 큰 치이가 있느냐고 따져서 결국은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 건 더 있었는데, 제가 고 3 때 학생부의 선생이 되신 류 모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아이들을 많이 괴롭히셨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 선생님을 혼내줘야 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참 독특하고, 황당하죠? 학생이 선생님을 혼내줘야 겠다고 하니 말이죠. 어느 날 아침에 등교를 하는데, 워낙 모자 쓰기를 싫어하는 저였지만 학교 정문 근처까지 왔기 때문에 모자를 썼다기 보다는 머리에 자욱을 남기지 않게 하려고 뒷통수를 가리는 스타일로 세워서 얹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류 선생님이 발로 제 등을 차신 겁니다.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허리가 휘청했고, 모자는 뒤로 날라갔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죽일 듯이 쳐다보니, 선생님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신 듯 했고,  제 눈을 피하며 "너 머리가 기니까 모자를 그렇게 쓰고 다니지. 머리 깍고 학생부실로 와!" 하시고는 황급히 학교로 들어가시려고 했고, 저는 그런 선생님을 붙잡았습니다. 교복을 벗어 보니, 등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습니다. 저는 내 머리가 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모자를 이상하게 썼더라도, 뒤에서 발로 허리를 차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저는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황급히 교문으로 들어갔고, 저는 계속해서 사과하라고 하며 뒤따라 갔습니다. 선생님은 도망치듯이 학생부실로 들어갔고, 저는 그 선생님의 예상을 뒤엎고 학생부실 까지 쳐들어 갔습니다. 자리에 앉은 선생님의 책상을 두 손으로 붙잡고 서서 "사과하세요!"  라고 크게 말했고,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소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공포의 학생주임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공포의 학주는 바로 미술부의 이호기 선생님이셨구요. "야! 임마 ! 김성윤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저는 제 교복 등 뒤의 발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게 뭔지 아세요? 이 선생님이 뒤에서 발로 제 허리를 차셨어요."  유 선생님은 "아니 얘가 너무 머리도 길고, 모자도 이상하게 쓰고, 건들거리며 걷는 것이 ..." 저는 "아니 그렇다고 뒤에서 허리를 발로 차요? 선생이!"  학생 주임은 제게 인상을 쓰시며 조용히 하라고 하셨고, 잠시 생각하더니 "너는 빨리 구내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깍고와서 보여드리고 수업 들어가!" 하셨습니다. 제가 말도 안된다고 하자 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서, 아무리 그래도 선생이 사과하겠냐고 하시고, 머리 안깍아도 되니까, 한시간 쯤 있다가 와서 얼굴 비추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발소에 가서 신문 보면서 30분 정도 있다가 학생부실로 가서 유 선생님에게 "이제 됐죠?" 라고 웃으며 한마디 하고 교실로 갔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잘못을 했고, 상처를 입힌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처음으로 학생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휘어잡는 기분으로 설쳐댄다고생각하고 이런 짓을 했지만, 돌아보면 죄송하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도 체육 선생님들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라는 별명의 이경석 선생님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셨고, 경신고등학교에 재직 중이실 때, 차범근을 발굴해 내셨다고 했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계신 넉넉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선생님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고3 때의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다짜고짜 제게 "너 학교에서 데모 한번 안해볼래?" 라고 하셨습니다. 하도 의외여서 왜 냐고 여쭸더니, 일본이 청와대를 도청한 일에 대해 한국에서는 고등학생들도 데모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뉴스로 나갈 수도 있다고 하셨죠. 저는 고 3 때 학교에서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모임' 을 만들어서 동기 2명과 후배 3~4명 정도가 거의 매주 토론 클럽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데모하면 뭐가 좋은데요? 했더니, 오전에 데모하고 조퇴시켜준다고 하셨습니다. 짜장면도 사주신다고. 애들을 불러모았더니 한 60명 정도 되었습니다. 운동장 본부석에 모여서, 준비해 놓은 플랜카드 몇개 들었다 놨다 하며 30분 정도 하고, 스크럼을 짜서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바로 후문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안하고 바로 만리장 이란 중국요리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하루를 재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별 일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의 절정은 고 2 때의 학교 축제와 매년 6월25일 여의도에서 개최되는 학도호국단 창단 기념행사지만 이 글은 선생님에 대한 글이니...어쨌든 당시에 저는, 아니 우리는 선생님들과 꽤 대화가 되는 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김하곤 교련 선생님은 군인 모자를 쓰고, 군복에 워커를 신고 다니셨는데, 완전히 펭귄을 닮아서 별명이 펭귄이셨습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에 친구들과 모여서 학교 진입로를 보며 떠들고 있는데, 선생님이 지나가시더군요. 저는 "펭귄 간다!" 라고 작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선생님이 들으시고 "김성윤이 ! 이리와 !" 하셨죠. 저는 "가면 때릴거잖아요?" 라고 했고, 선생님은 "당연하지?" 라고 하셨죠. 저도 편안하게 "그럼 당연히 안가죠!" 대답하고 "들어가세요 !" 하며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마쳤습니다. 한번은 한 3개월 동안 하마 라는 별명을 자진 박 재인 수학 선생님 수업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착각해서 박 선생님의 수업이 끝난 줄 알고, 열심히 가르치고 계신 중에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고는 "넌 어디서 오는거냐?" 하시더니, 뭔가 생각나셨다는듯이 "그런데 너! 내 수업시간에 한번도 안들어왔지?" 하셨습니다. 제가 얼떨결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아 ! 저 혼자 공부하는게 더 잘되는 것 같아서요." 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완전히 황당해 하시면서 자기 교직 생활 중에 최대의 모욕을 주는구나 하셨죠. 서울대 수학과를 나오셨고, 정말 수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선생님이셨거든요. 그런데도 때리는 시늉만 하시고는,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제가 있는지 매번 확인할 거라고 하시고 마치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다른 아이들 보다는 훨씬 더 선생님들과 편하게  지냈던 것은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저희 학교에서 저희 학년은 홍철이 사건 이후 많이 변화되어서,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체육 선생님 중에 테니스 전문의 유쾌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학교 이사장님의 사위셨고, 청담동에서 번듯한 테니스 샾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선생을 취미로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속알 머리가 없으신 것만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한 외모와 성격을 가지신 선생님이셨습니다. 핸드볼 감독으로 오신 김갑경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핸드볼 선수 애들을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서 선생님과도 관계가 좋았습니다. 우리 학교 핸드볼 팀을 독보적인 팀으로 만드셨고, 핸드볼 협회에서도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감독일지 몰라도 제게는 동네 형 같은, 사투리가 정겨운, 푸근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작은 키에 단단한, 체조를 전공하신 홍윤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아쉽게도 저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추억도 없지만, 한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 선생님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시절에 고득학교에는 교련 선생님이 계셨죠? 1주일에 3시간 씩 군사 훈련을 한 셈입니다. 학생들의 편제도 '학도호국단' 이라고 하여 한 반을 한 소대로, 한 학년을 한 대대로, 그래서 전교생을 한 연대로 편성했습니다. 전체 학생의 대표는 학생회장이란 이름 대신, 연대장 으로 불리우던 시절입니다. 박금철 선생님, 나동창 선생님, 김하곤 선생님, 박순배 선생님. 학교에 군복을 입은 네 명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겠죠? 

고 3때 하도 공부를 안하니까, 어머니가 수소문해서 대학생 과외선생님을 붙여주셨습니다. 임정열 형과 정영숙 선생님인데, 둘다 저 보다 네살이 많았습니다. 정열이 형은 영동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고, 제가 고3 때, 영동고등학교 동창회장이었습니다. 고대 수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선배였죠.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대학교 때도 ROTC 를 해서 장학금을 받았었습니다. 거의 단벌 신사인데, 겨울에는 분위기 있는 가죽 잠바 하나로 멋과 실용을 겸했었습니다. 동그란 금태 안경에 작지ㅏㄴ 분위기있는 선배였습니다. 형이라고 부르고 지냈고, 또 제가 수학은 잘하는 편이라서, 수업 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정명숙 선생님은 성대 영문과에 다니셨는데, 고 3 때 성대 축제에 가기도 했습니다. 고삐리인 저야 당연히 늘씬한 여대생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고, 선생님은 혹시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과외가 끝나면 밤 꽤 늦은 시간이 되고, 동네가 하도 험하니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서 버스를 태워드렸었죠. 같이 가는 밤 길에 항상 두 팔로 제 팔짱을 끼고 따라 걸었죠. 아마도 교회에서 학생 성가대를 지휘하시던 황재금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정 선생님에게 대쉬를 했을 수도. 황재금 선생님과는 만남부터 짜릿했습니다. 고 2 가울에 지금의 세종대학교, 당시는 수도여자사법대학 운동장에서 성동지방의 감리교회들이 모여서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아주 예쁜 여자 아이들 데리고 오시면서 "회장! 인사해!" 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저 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하고 반갑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여자 아이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는데, 목사님이 "이제부터 너희를 가르칠 선생님이셔." 하셨습니다. 커다란 눈, 볼그레한 얼굴, 빨간 폴로 셔츠에 스키니한 블랙 진을 입고, 숏 커트 머리를 했던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만남은 제게 많은 상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단대 음대를 다니셨고, 단대 음대와 체육과는 매년 우리 영동고등학교에 교생을 보냈습니다. 애들은 음대 여교생을 작정하고 괴롭히고, 체육과 교생들은 이들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하다시피 하는 교생 실습을 하곤 했는데, 제가 고 3인 때에 황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교생으로 온다는 것은 너무나 환상적인 시나리오였습니다. 한달 동안 등하교를 같이 하고, 아이들이 못괴롭히게 보디 가드를 해주면서... 꿈을 꾸고 있었는데, 교생 기간 한달 전에 갑자기 교육부에서 여자 교생들이 남자 고등학교에 교생 나가는 것은 삼가라는 방침을 발표했고, 꿈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는 많은 추억을 쌓았습니다. 우리 동네 천호동은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양아치 동네였고, 제  1년 후배 아이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네를 주름잡아  보려는 야심찬 아이들이었습니다. 문학의 밤, 크리스마스, 부활절 칸타타 연습을 하면서 얼마나 선생님을 괴롭혔겠습니다. 울고 집에간 선생님을 달래서 모시고와 성가 연습을 마칠 수 있게 한 것이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고3 이었으니, 연습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연습 중간 쯤에 들리곤 했는데, 애들이 떠들고 있으면 불러 앉히고, 야단친 후에 선생님 모셔오면 제대로 연습하라고 하고는, 부리나케 고분다리라는 교회에서 10 정도 거리에 있는 선생님 언니 집에 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아니 잡아 끌어서 교회로 오고 했습니다. 제  팔짱을 끼고 따라온 적도 있고, 제가 선생님 어깨에 팔을두르고 재촉해서 온 적도 많습니다. 160 안되는 작은 키에 마른 편이어서 아마도, 고목나무와 매미를 연상하셔도 좋았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선생님을 좋아했고, 선생님은 저를 의지했었습니다. 여름 수련회 때는 선생님이 물에 한번도 들어가지 않아서, 짓궂은 아이들이 선생님을 물에 빠트리려 하는 것을, 보고, 얼른 제가 나서서 선생님을 친절하게 안아서 물로 모시고 간적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다른 여자 아이들 처럼 소리 지르고 조금 저항하셨지만, 저는 가볍게 안고 가서 선생님의 키 보다 조금 깊은 곳에 내려놓았고,  선생님은 당연히 제게 안기셨죠. 잠시 후에는 수영 배우듯이 제 두손을 잡고 물장구도 치고 제 어깨 잡고 물장구 치면서 놀았습니다.  짜릿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입니다. 얼마 뒤인 고3 겨울, 어린 시절 내 삶을 좌우할 정도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선생님을 집에 데려다 드리는 중에, 선생님이 "다음 주 토요일에 언니와 형부가 휴가를 가서 집에 아무도 없는데, 와서 같이 놀래?"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조금 놀라는 듯 하자, 선생님은 집에 혼자서 자본 적이 없어서 무섭기도 하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좋죠!"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1주일 간 별뱔 셍긱을 다했습니다. '나에게만 이야기한 걸까?' '내게만 이야기했지만, 다른 아이들도 같이 오라는 걸까?' ' 나에게만 이야기해서 다른 아이들과 같이 오라고 한건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만 가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장고 끝에 저는 황당한 결정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에게도 말했을거야. 그러니 나도 한두명 정도에게 더 이야기해서 같이 가는 것이 맞아.' 꽤 선생님응ㄹ 좋아하는 표시를 내는 친구 병철이에게 이야기했고, 병철이는 아주 좋아하며 동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선생님 집에는 저와 병철이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병철이의 인사를 받는 선생님의 표정은 묘한 감정이 교차되어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땅을 쳤습니다. 병철이를 쫒아버리고 싶었달까요? 선생님이 준비해 놓은 저녁을 먹고, 간식을 먹으며 게임도 하고, 떠들었지만, 저는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생각 보다 오래 놀지 못하고, 12시를 조금 넘겨서 잠자리에 들었고, 저와 병철이가 선생님 방에서 자고, 선생님은 언니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새벽에 병철이가 선생님이 자는 방 앞에 있던 유리 그릇을 깨드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 결정적일 수 있었던 밤은 지났습니다. 과연 이 밤에 병철이를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갔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문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고, 교사를 하면서 MBC 어린이 합창단을 맡아서 가르쳤습니다. 성악이 전공이었지만 지휘에 꽤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색 정장을 입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봤는데, 역시 아주 멋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안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과 청년부 선배 한명이 선생님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났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두 분에게 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를 기화로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집도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셨구요. 친구들은 몇번 선생님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저는 처음에 한번 가서 보고는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대학생활도 너무 바빴고, 제 주위에는 항상 많은 친구와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쎌폰이 없던 시절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쎌폰이 있던 시절이었다면, 아마도 선생님과 저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도 있었고, 진도를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보다 네 살 많은 두 여자 선생님과의 추억이 있는 셈이네요.  

대학교에서도 많은 교수님들을 마났지만,  저를 기억하고 있는 분이 계실까 생각하면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교수님들에 대해 적어 봅니다. 저희는 1학년을 계열로 시작해서, 2학년 때 자기 전공과목을 선택했습니다. 제 기억에 연세가 꽤 드신 임 규혁 이라는 여자 교수님이 담임 이셨습니다. 이 교수님과는 면담 5분 정도, 그리고 나중에 수업 한 과목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교양 체육 시간에 만난 공 응대라는 교수님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UCLA 에서 잘나가던 분을 초빙해서 '스포츠 과학' 이란 분야에서 앞서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구태의연한 고대 이사진은 격식이 없고, 자우분방한 공 교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반바지 차림으로 운동장이 아닌 교정 여기저기를 뛰었습니다. 조깅 이란 말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죠. 고대에 배구부가 없으니, 아마츄어 배구부를 만들자고 하셔서 저와 몇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고대 배구부' 를 만들었습니다. 일주일에 세번 씩 방과 후에 모여 연습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수생활을 했던 봉인근 이란 아이가 있었고, 꽤 배구를 하는 아이들이 모여서1학년 가을을 배구와 함께 보냈습니다. 숙대 배구팀과 연습 경기를 하기로 했었는데, 공 교수님이 학교 측의 반목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천대학에서 스포츠 과학대학을 만들었고, 거기에 학장으로 가셨습니다. 언론에도 많이 나오시고, 학계에서도 인정받으셨죠. 

제가 다닌 고대 사범대학은 교육학과를 필두로 해서, 국어교육과, 수학교육과, 체육교육과 그리고 가정교육과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저희 때에 영어교육과와 지리교육과가 신설되었습니다. 1학년 때, 국어교육과의 오 탁번 교수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고대 국문과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분인데, 국문과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국어교육과에 자리 잡은 것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으셨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애들에게 야단을 자주 치셨는데,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교수님이 듣게 "오 택번 부교수님 왜 저러신데?" 하며 놀려댔습니다. 성함 중의 한자 '탁' 자를 거의 모든 사람이 '책'으로 읽어서 스트레스를 받으시고, 정교수가 아닌 부교수로 몇년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것을 아는 우리가 교수님께 보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응원가를 술자리에서 10분 만에 작사하셨다는 무용담도 가지고 계시고, 조지훈 교수님을 포함해서, 유명한 교수님들이 서로 제자를 삼으려고 경쟁을 하셨다는 일화가 있으신 재기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하와이 대학을 나오시고, 고대에 영어교육과를 만들자는 프로젝트를 성사기키고 학과정으로 임용된 김 충배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부교수인데, 학과정을 맡으셨습니다. 김 교수님에게 한 학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영어의 시대적 발전에 대한 수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라기 보다는 비지니스맨 같은 느낌의 교수님이셨습니다. 한국에서 첫 수업이어서 어색해 하셨는데, 금새 관록이 붙어서 제가 졸업할 즈음에는 의젓한 학과장 정교수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교육학과 교수님들은 쟁쟁한 분이셔씁니다. 한국의 교육을 책임지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사범대 학장이셨고, 원로교수이신 이 중 교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정환 교수님, 유 인종 교수님, 정 우현 교수님은 전부 학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고대 총장이셨던 김 상엽 총장께서 국무총리가 되셨었습니다. 이때 김 상엽 총리를 도와 총리 비서실장을 하셨던 안 기성 교수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육행정이란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제 절친인 기 용일 교수의 사부이기도 하고, 우리 농구 써클 매니저인 예나의 아버지이기도 해서, 각별한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교수이신 전 성연 교수님도 나중에는 교육계에서 명성이 있으셨습니다. 농구를 좋아하셔서 전국 교육학과 체육대회에서는 학생들과 같이 농구 선수로 참가하시기도 하셨는데, 그러면서 저를 일반 학생이 아닌, 고대 농구선수로 아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희 과에는 홍석이 형과, 원교가 농구 특기자로 고대에 진학한 대 농구선수 였고, 고등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 생활을 했던 용석이 형이 있었고, 그런 용석이 형 보다 농구에 더 자신이 있었던 우리 농구 써클 멤버가 저를 포함해서, 형곤이, 응영이, 준경이, 용일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학교와 농구 시합을 하면 전반전에 보통 40:0 을 만들어 놓습니다. 후반전에는 교수님들과 여자 아이들이 뛰어도, 못따라 올 정도의 스코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전성연 교수님은 저를 농구 선수로 알아서, 제가 수업에 안들어가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계셨었죠. 대학 4학년 마지막 수업을 전 교수님께 들었는데, 시험 바로 전 수업에 들어갔더니, 교수님은 너는 농구 선수가 왜 오후 수업을 들어왔어 라고 물으셨고, 아이들이 제가 농구 선수 아니라고 하자, 황당해 하셨습니다. 제가 시험 때 빼고 수업을 한시간도 안들은 과목이 꽤 되는데, 이 과목도 그런 과목 중 하나였는데, 어쩌다가 마지막 시간에 들어갔던 겁니다. 한학기 동안 수업 한번도 안들어 왔다고 F 주시겠다고 겁을 주셨지만, 시험을 잘봐서 B+ 정도는 맞은 것 같습니다. 

82년도에 '농연' 이라는 농구 써클을 만들어서, 지도 교수님이 계셔야 했는데, 저를 잘 따랐던 1년 후배  매니저인 현영이 어머니가 수학교육과 교수셔서 저희 써클의 초대 지도교수를 밑아주셨습니다. 친구인 호의 아버지도 농업경제학과 교수셔서, 맡아주실 수 있었지만, 현영이 엄마 사공 정숙 교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연구실은 우리 써클으 아지트였구요. 이 아지트를 같이 이용하던 현영이의 언니와 남친이 있었는데, 그 남친이 현재 서울시장인 오세훈 입니다. 사람 일이란 것이 모를 일이죠? 당시는 예비 장모님께 꽤 구박을 받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요. 사공 정숙 교수님은 정말 온 집안이 서울대 출신이고, 돈 많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집안이었습니다. 당시에 사공 일 이란 재무부 장관이 있었는데, 경기고 천재 중 하나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저도 현영이랑 교수실에 있다고 사공 교수님과 마주치면, 항상 흠잡으려고 살피는 눈길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희 써클의 두번째 지도 교수님은 골프로 유명하신 박 영민 교수님이셨습니다. 사람 좋으시고, 능력 있으시고, 정말 나무랄 데가 없으시니 교수님이셨습니다. 물론 각종 운동을 다 잘하셨습니다. 저희 써클에  박 교수님이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꽤 오랜 기간 동안 흔쾌히 저희들과 함께 해주셨습니다. 저희 써클의 세번째 지도교수는 김 성수 교수님이셨습니다. 독일에서 의사 생활을 하시다가, 수포츠 생리학 이란 분야에 꽃히셔서 결국 체육과 교수가 되셨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공 응대 교수님과  김 성수 교수님은 한국의 스포츠 과학계의 두 태두셨습니다. 김 교수님은 사업적으로도 뛰어나셔서 '포카리 스웨트' 라는 이온 음료의 판권을 가지고 어셔서 동아제약과 제휴하여 동아 오츠카 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넘기셨습니다. 가끔 동아 오츠카에 심부름을 가기도 했죠. 우리 서클의 행사에는 포카리 스췌트가 항상 넘쳤습니다. 김 성수 교수님이 태능 선수촌 국가대표의 체력 증진 전문위원으로 계시면서 철분 섭취가 근지구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을 하셨습니다. 국가대표 선수와 같은 또래의 일반 대학생을 표집으로 해서 비교 관찰하는 연구였는데, 철분을 먹으면서 일주일에 두번씩 체력 측정, 특히 근지구력 측정을 하는데, 저희 농구서클 아이들 20명과 국가대표 선수 20명의 사이에 체펵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와서, 국고를 사용한 연구가 완전히 망가졌었습니다. 특히 저희 후배 조교희는 국가대표 선수 중 체력측정에서 가장 뛰어난 점수를 받은 다이빙 선수 보다도 오히려 체력이 좋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저희 서클 아이들이 대부분 국가대표 수준의 운동을 하던 아이들이었음을 모르고 계셨던 교수님의 실수였죠. 저도 심폐기능과 근지구력, 피하지방 등에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점수를 받았었습니다.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교수 중 한분은 사학과 지 동식 교수십니다. '서양 중세사' 를 전공하신 선생님은 가장 큰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셨고, 수업 시간의 절반은 신념있는 목소리로 창문 밖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의 철학을 펼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신념에 찬 모습으로 나의 철학을 펼치고 싶다.' 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노 교수님의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사학과 친구 세철이가 원서 복사한 것 몇 페이지를 들고 와서, 제게 번역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사학과 대학원에서 지 동식 교수님 이름으로 원서 한권을 번역 출간하시고 했다고, 제게 중세의 기독교 사상에 대한 글 두 페이지를 번역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정성을 들여서 번역을 해주었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서양 중세사' 였습니다. 은퇴를 앞두신 지 교수님을 위한 제자들의 선물 같은 의미였었습니다. 영문학과에 김 종건 교수님은 참 독특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아주 대단한 교수라고 해서 보니, 아일랜드의 대문호인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만 연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이 두 단어만 연상되는 교수님인데, 한국의 영문학자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텐데, 그것도 난해하기로 소문난 제임스 조이스를 연구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셨으니 참 대단한 일이죠. 또 친한 선배가 존경하는 김진만 교수님도 독특한 교수셨던 것 같습니다. 단전호흡인지? 기 수련인지를 하셨는데, 대단한 경지에 이르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철학적으로도 인정을 받으셨구요. 그 유명한 김용옥 교수가 은사로 인정하는 분이셨고, 학생들과도 잘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대학원을 정치외교학과로 들어가면서, 당연히 정외과 교수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지만, 사실 저를 기억하는 교수님은 지도교수인 최상룡 교수님 한분, 그리고 어쩌면 괴짜 강성학 교수님 정도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 정외과 교수님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셨습니다. 한국 정치학괴를 이끄는 거두는 모두 저희과 교수님이셨습니다. 한배호 교수은 국제정치를, 님과 한승조 교수님은 비교 정치를, 그리고 김하룡 교수님은 정치 사상의 주류를 이루셨습니다. 당시 서울대의 김학준 교수님이 메스컴에서는 유명했지만, 학회에 오면 저희 학교 교수님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다녀야 할 군번이셨습니다.  이 거두 교수님들의 뒤를 이은 한승주 교수님은 외무부 장관을 지내셨고, 최장집 교수님과 서진영 교수님은 한국 비교정치를 이끄셨습니다. 저의 은사 최상룡 교수님은 동경대 정치학 박사 출신이신데, 글을 아주 힘있게 쓰셔서, 정치가들에게 인기가 있으셨습니다. 오죽하면 김대중, 김영삼 두 대통령 후보가 모두 저희 교수님께 연설 원고를 받아가셨으니까요. 저도 가끔 정치인들의 연설 원고를 전달해 주는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정치학을 전공하는 이유가 정치가의 길을 걸으려는 것임을 아시는 교수님은 저를 몇몇 정치인에게 소개하셨고, 저는 몇분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보좌관 제안을 받았었습니다. 제가 거절하자 황당한 조건까지 걸으셨던 의원님도 계셨구요. 강성학 교수님은 제 친구 유민이의 매형이셔서, 정외과 대학원을 선택하기 전에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 교수셨고, 미국 스타일로 학생들을 격의 없이 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엄청 깐깐하게 점수를 주셨죠. 당시 저희과 대학원 생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졸업 논문 테스트였는데, 여기에서 "다음 번에 내지!" 라는 말을 어떤 교수님이라도 꺼내면 한 학기를 더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이 소리를 듣는 상황이었는데, 열 다섯 분의 교수님 중에서 이 소리를 가장 많이 하시는 분이 바로 강성학 교수님이셨습니다. 당시 저희 교수님 밑에서 논문을 제출하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서 세명 이었는데, 고시 출신 공무원인 용찬이형과, 운동권 출신 OO 형도 이 소리를 듣고 6개월, 1년을 더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논문 준비를 시키면서 최 교수님은 저는 우리 대학원에서 공부를 제일 안하는 사람이고, 논문 준비도 대충하는 것 같은데도 걱정이 안되는데, 두 형들은 걱정이 된다고, 아마 한번 쯤 떨어트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주 황당한 주제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리퍼블릭과 실질주의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두 사람의 정치에 대한 관점이 같다 라는 주제의 논문을 썼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절하게 정치를 하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왕이던, 황제던 자신을 인정해서 정치를 맡겨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논문 발표에서 두 형들이 모두 떨어지고, 제가 들어갔는데, 저는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주제 발표를 하고, 아마도 김하룡 교수님께서 "아주 독특한 시각이구만1" 하고 말씀하셨고, 이를 이어서 강성학 교수님이 여러 교수님들께 동의를 구하시는 말투로 공격적인 질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논문 준비 마지막 미팅에서 지도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교수님은 지금 너희들이 준비하고 있는 이 논문 주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떤 학자보다 너희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고, 그러니 누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알려드린다는 마음에서 말하라고하셨습니다. 길고 꼬여있는 강 교수님의 질문은 사실 귀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이 끝났을 때 저는 아주 편안하게 여쭤봤습니다. "교수님 리퍼블릭 언제 얽어 보셨어요?" 제 질문에 황당해 하면서 어색하게 웃으시더군요. 그리고 다른 교수님들을 쳐다보시면서 "이놈 참 치사한 놈이네요. 지는 논문 쓰느라 달달 일고나서 우리에게 리퍼블릭 내용 기억해 나라고 따지네요 허허." 그러고는 입을 다무셨습니다. 한 1분 정도 흘렀을까요? 상황 잘 판단하시는 저희 지도교수님께서 "더 질문이 없으신 것 같으니, 이 논문 받기로 하시죠?" 하고는 저를 보시면서 "수고했어!"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역사에 기록될 눈문 통과라고 하셨습니다. 질문에 대답 한마디도 안하고 논문 심사를 패스한 것은 제가 생각해도 다시는 없을 기록일 것 같습니다. 최 교수님은 나중에 주일 대사로 가셨는데,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을 이어서 주일 대사를 맡으셨습니다. 참 매력적인 선생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중등부때 김진한 장로님, 최순자 전도사님, 고등부 때, 김병화 목사님,  심우석 장로님 청년부 때 신승도 목사님, 이 분들 중에서 최순자 전도사님과 신승도 목사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와 같은 교회를 다닌 교우시니까 저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실 겁니다. 저는 이분들에게 특별한 학생으로 기억되었을 겁니다. 김진한 장로님은 제가 고등부를 졸업하니까, 그해에 바로 고등부 교사를 하라고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저와 같이 고등부에 있던 아이들이 졸업하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첫해에는 국민학교 1학년을 가르치면서, 아동부 성가대 지휘를 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자 장로님은 다시 저를 부르셔서 아무래도 제가 고둥부 교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하게 권하셔서, 고등부 교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청년부 교사를 하게 된 이유도 심 장로님과 김 장로님 때문이었으니, 교회의 주축이셨고, 중고등부 시절에 저를 지켜보셨던 두 분이 저를 인정하셨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부 헌신예배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데, 당시 김병화 전도사님께서 급한 일로 고향에 가시고, 교사 네분 만  계셨는데, 이 분들이 제게 예배 사회도 보고, 설교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미 어른들을 대상으로 속회 공과 인도도 했었고, 기도회 인도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별로 부담이 없이 주일 저녁 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교회에서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에게 꽤 특별한 학생으로 기억될 겁니다. 

저는 타고난 선생이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가르친 것이 거의 전부지만요. 어떤 아이들이 저를 선생으로 기억하고 있고, 제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을까? 를 생각해 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동부를 가르쳤을 때, 국민학교 1학년 아이 중에는 '상이' 만 기억이 납니다. 언니 상분이와 경순이가 6학년 이면서 어린이 성가대의 주축이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경순이는 교회를 계속 나녔기 때문에 고등부와 청년부에서도 가르쳤으니, 저를 선생님으로 기억할 겁니다. 고등부 교사가 되어 맡은 아이들은 저보다 3년 후배인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었습니다.  성호, 영운이, 찬용이, 승호, 영근이, 인상이 등 열명 조금 넘는 남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꽤 똑똑해 보이고, 개성도 강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성호는 다리를 조금 절었지만, 리더쉽이 강한 아이였고, 승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여러 곡의 복음성가를 작사, 작곡해서 아이들과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그 해, 1981년 겨울에 청년부에서 복음성가집 '한소리' 를 만들어서 팔았었는데, 그 복음성가집에도 승호의 곡이 2곡 들어있었습니다. 영운이는 사교적이고 다재다능해서 서울예전을 나와서 이벤트 회사를 꽤 잘 운영했습니다. 찬용이는 엄친아 였고, 늘씬하고, 지적이고, 기타 잘치는 완벽한 교회 오빠였습니다. 외대를 나와서 효성물산에서 인정받으며 잘다녔던 같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잘 따랐고, 제가 가르치는 내용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르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이 아이들에게 신학에 대해 조금씩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3 때부터 신학대학 다니는 1년 선배들과 같이 '화요 모임' 이라는 모임을 가졌고, 당시 해방신학과, 토착화 신학 등을 공부하며 리버럴한 신학에 몰두했었기 때문에, 꽤 똑똑하게 느껴지는 아 이이들에게도 소개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제가 맡기 전에도 개성이 강해서 통제가 잘안되는 아이들이었는데, 제가 가르치면서 제 말은 잘듣는 아이들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들에게 리버럴한 신학을 가르치자, 이 아이들은 보수적인 어른들의 신앙과 부딪히기 시작했고, 기성세대의 신앙을 비판하고, 논쟁하면서 결국은 통제할 수 없는 아이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후회가 되었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에서 처럼 이 아이들의 삶이 망쳐질까봐 두려웠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의 리더 격이었던 성호는 그의 삶에 꽤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이상한 것은 남자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확실한데, 이 또레 여자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정확치 않습니다. 혜정이 신자 등이 이 또래인지? 아마도 사고 없이 잘 지냈기 때문일거라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을 청년부로 올려보내고 맡은 아이들은 저 보다 5년 후배인 남자, 여자 아이들이었습니다. 흥구, 현중이, 승원이, 혜정이, 경미, 은경이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공부를 잘했고, 일본에 선교사로 간 광현이도 이 또래였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리더인 흥구는 털털하고, 운동을  잘하는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승원이는 공부 잘하고, 단정하고, 얌전한 아이였고, 현중이는 부모님은 교회에 나오지 않지만, 친구를 좋아해서 친구 따라서 교회에 온 아이였습니다. 조금 반항기도 있지만, 항상 친구들에게 맞춰주는 아이였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성격이나, 외모에서 꽤 개성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 맏딸인 혜정이는 친구들 배려 잘하고, 자기 맡은 일 성실하게 하고, 웃으면 눈이 없어지는 흠잡을 데 없는 아이였고, 은경이는 조금 아웃 사이더 경향이 있는, 까무잡잡한 미인이었습니다. 은경이는 저 보다 4년 선배인 성철이 형과 결혼을 했는데, 무려 9년 차이여서, 그 가운데 끼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촌수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제자가 형수가 된 셈이었습니다. 저는 둘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성철이 형에게 가서 바로 선을 그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먼저 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니, 나는 은경이를 제자로 대할거라고 했고, 이후에도 은경이와 선생님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경미는 저를 짝사랑한 제자였습니다. 건대 미대에 진학해서, 저를 도와줄 일이 있어서,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두번 정도 시켰었고, 저녁을 서너 번 정도 사줬었습니다. 아주 깜찍하고, 귀여운데, 목소리는 허스키해서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온 가족에 다 교회에 나와서 큰 언니인 경순이 누나는 저보다 4살 위, 오빠 명수형은 저보다 1년 위, 경자는 저 보다 3년 아래로 다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제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제게 고백을 하더라구요. "선생님! 제가 더 좋은 부인이 될 수 있어요. 결혼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시면 안되요?" 저는 까불지 말라고 하며 가볍게 받아넘겼고, 경미는 슬프다고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경미는 그 때 대학 4학년 이었습니다. 저도 제자로부터 짝사랑을 받은 선생이었습니다. 

1991년부터 청년부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청년부 교사가 되는 과정에 사연이 있었습니다. 저를 중등부와 고등부 때 각각 가르치셨던 심우석 장로님과 김진한 장로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김집사가 청년부를 맡아줘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청년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만, 담임 목사님이 허락치 않으실 거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든 해볼테니 꼭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에 두분 장로님이 또 저를 부르시고, 똑깥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똑같이 말씀드렸구요. 목사님은 이번에도 강력하게 반대하셔서, 첫번째 미팅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두분이 제게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시키겠다고 결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주 뒤에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내셨습니다. 두분은 저를 청년부 교사로 임명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셨답ㄴ다. 교회에서 가장 주축을 이루는 두 장로님께서 이정도로 나오시면 어쩔 수 없으셨겠죠. 목사님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부임하셨는데, 그 때부터 성경의 해석을 가지고 거의 매주 논쟁을 벌였습니다. 3개월 정도의 논쟁 끝에제게 백기를 들으셨고, 제가 26 살 때는 교사, 성가대가 목사님께 반기를 들었는데, 그 때 제가 주동이 되어 목사님과 대립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경우에도 저와 대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문제가 많은 청년부를 제가 맡게 되면 벌어질 일에 대해 상상도 하기 싫으셨을 겁니다. 후에 제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구요. 어쨌든 저는 단독으로 청년부를 맡아서, 청년부를 가르쳤습니다. 6년 정도 청년부를 가르쳤는데, 1년 후배인 윤숙이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와 10년 정도 차이 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준홍이, 준석이, 동현이, 수현이, 현정이, 김진한 장로님 딸, 현진이 등이 었는데, 남자 셋, 여자 넷이 항상 몰려자녔습니다. 그리고 저를 잘 따랐습니다. 제가 청년부를 맡았을 때, 나이가 조금 있었던 아이들은 제가 고등부에서 가르쳤을 때, 있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정희와 동생 준규, 호성이와 동생 선윤이, 한의사가 된 성환이와 성욱이, 목사님 아들 휴재 등이 기억 납니다. 준규는 사업을 했는데, 저와 도움을 주고 빋기도 했습니다. 성환이는 아주 뛰어난 아이였습니다. 전교 1등하는아이였는데,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주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학은 경원대학에서 한의대를 만들면서 생활비까지 주는 장학생이 되어서 결국 한의사가 되었습니다. 성환이가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개업을 해서, 침을 자주 맞았던 저는 한번 가봤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반말을 하고, 성환이는 제게 선생님이라고 하게 되는데, 왠지 다른 횐자들이 듣기에 거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가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친한 친구인 성욱이는 한약을 전공하고, 성환이는 침을 전공했었습니다. 어쩌면 둘이서 같이 하고 있을 수도. 휴재는 신학대학에 다니면서도 청년부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미국에 유학해서,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을 방문하면 교회에서 설교도 하곤 했습니다. 예배 끝나고 문에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제가 가자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 하더라구요. 제가 휴재 옆에 없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뉴저지연합교회에 출석하면서 중고등부 교사를 8년 정도 했습니다. 영어가 안되기 때문에, 초기에는 반을 맡지는 않고, 에배를 돕고, 교사를 도우면서, 땜빵 교사를 했습니다. 한번은 땜빵으로 12학년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국말을 못알아듣는 아이들을 위해서 누가 통역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주성이란 아이가 하겠다더군요. 제가 감탄할 만큼 통역을 잘했습니다. 두살 때 미국에 왔다고 들었는데, 정치가가 꿈이어서 한국어를 따로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월터, 재희, 웨슬리, 준모, 영석이, 자빈이, 브라이언, 청, 석이, 윤이, 태훈이, 웅이, 매튜 같은 또래였는데, 제 딸 정연이도 같은 또래였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수연이, 에린이 등이 생각납니다. 이 아이들과 아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월터와 재희, 웨슬리는 특별히 많은 시간을 같이 했습니다. 몇년 전에 어느 장례식장에서 월터를 포함해서 몇 아이들을 만났는데, 월터가 '우리들의 영원한 선생님' 이라고 하더군요. 이 아이들과 같은 또래 거나, 비슷한 또래에, 교회가 있는  잉글우드 타운의 흑인, 스패니쉬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쳤습니다. 농구를 잘하고, 좋아하는 재희, 월터, 영석이가 있어서, 흑인 아이들과도 농구를 대등하게 했습니다. 아 아이들이 9학년 일 때부터 가르쳐서, 아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나서도 1년 정도 더 가르쳤습니다. 이때 가르친 아이들 중에 몇몇은 길에서 저를 만나면 코치라고 부르며 와서 인사를 하곤 합니다. 조셉, 티샨, 말릭과 형 등은 아마도 저를 선선생님으로 기억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에 교회에서 한국어반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희경이와 연우, 다희가 기억에 남습니다. 태희와 말썽꾸러기 태희 동생, 선우와 형숙이, 원경이, 바이얼린을 위해 유학 온 주연이와 천재성이 엿보이던 동생 주훈이도 기억이 나네요. 제 아들 준규 또래의 아이들도 여럿을 가르쳤는데, 아마도 그 아이들에게는 제가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친구 아빠였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은 Norwood 의 은혜 양로원에서 사역을 합니다. 저는 양로원에 계신 분들에게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으로 호칭을 듣지만, 저는 최선을 다해서 이분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이분들에게도 저는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도움을 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것이 저의 꿈이자 소원입니다.

이 글은 제 삶을 돌아보는 회고의 글이지만, 저는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들께는 '선생님께 감사하며,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제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르친 제자(?)들에게는 너희와 보낸 시간 동안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너희들이 누군가에게 좋은 제자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너희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하는 선생님이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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