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는 소위 '팔복'에 대한 설교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몇가지의 아주 중요한 복을 받는 여덟 가지 방법에 대한 설교라고 해야 할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해 연구하고, 쓰시고,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복만 가지고도 몇 주 씩을 설교하시다 보니, 정작 듣는 사람에게는 머리에 남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1년 전 쯤ㅇ 저희 집에서 와이프 교회의 순모임이 있었는데, 그날 주제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였습니다. 순장인 와이프가 교회에서 준 자료를 읽으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라고 물으니신앙생활 수십년 씩 하신 여러분이 계셨음에도 얼마간 대답이 나오지 않으시더군요.
예수님의 첫 설교, 그 유명한 산상설교의 첫 문장에 대해서도 머릿 속에 정의가 안되어 있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몰라서 대답을 안한 것은 아니시겠죠? 하지만 어떤 것은 머릿 속에 외우듯이 떠올리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을 맞아서, 양로원 노인 분들에게 팔복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해드려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헬라어부터 찾아가며 준비해 봤습니다. 성경 본문부터 시작해 봅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보시다시피 이 구조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 어떤 복을 받는다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어떤 복을 받는가에 대해 촛점을 맞추지 않고, 어떤 사람 또는 어떻게 하는 사람에 촛점을 맞춥니다. 예를 들어 애통 이란 무멋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해통하는 자인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해서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죠.
1. 심령 (프네우마) : 하나님의 영, 세상적인 것도 아니고,
내 내면의 것(프시케) 도 아님.
혼 (푸시케 : 인간 내면의 의지,
생명, 감정) 과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가난 (프토코스
: 가난과 겸손을 뜻함. ) 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적,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 그렇게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à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팔복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것입.
2.애통 (펜때오) : 내면으로부터 나오는깊은 슬픔
애통하는 자는 단순히 슬퍼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큰 잘못이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깨닫는 슬픔이고, 이를 회개하는 자를 말합니다.
또,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찌할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자 입니다. 또 이 땅의 정의를 위해서 애쓰며 힘들어서 눈물
흘리는 자입니다. 어쨌든 이 애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애통입니다.
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께 눈물로, 아픔으로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애통을
mourn 이란 단어로 쓰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제가 알기로 이 단어는 남의
슬픔을 애도하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아서요. Sorrow 라는 단어여야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애통은 단순한 슬픔, Sad 나 Grief, Melancholy 가 아님을 생각하세요.
3. 온유 (프라우스) : 온화하고 겸손한 심성을 뜻함.
부드러운 심성, 온화한 미소, 뭘 해도 받아줄 것 같은, 화내지 않고, 흔들리거나
갈등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는 것. 온유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온유한 자’를 ‘양보하는 자’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한가지 의문이 들죠? 이 세번째 복은 ‘땅을 기업으로
언든’ 복인데, 양보하는 자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죠.
가지려면 싸우고, 뺐어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양보하는 자가 가진다는 것일까요.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축복. 이삭이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6~7번이나 양보하고도, 큰 민족을 이룬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흔들리지 않으려면 내면에 확실한 것,
믿는 것, 확고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외유내강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남을 돕고, 양보한 만큼 하나님이 보상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지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죠.그 보상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주어집니다.
à 온유한 자는
따듯하고, 부드럽게 남을 돕고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4. 의 (디카이오시네) : 도덕적, 종교적 의로움.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위치, 처지에 있다면
더욱 그럴겁니다.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사람.
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5. 긍휼 ( 엘레이모네스, merciful ) : 자비로운, 동정심이
많은.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 동정심이 많은 사람인데, 실제로 이를 행위로 옮기지 않는다면? 놀랍게도 성경의 ‘긍휼’ 이란 단어는 불쌍히 여길 긍과 구제할 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이 긍휼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는 마음 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저럴 줄 알았어!” 하고 싶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마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 참 힘든 형벌을 당할텐데… 불쌍하네 !” 하시게 해서는 안되잖아요.저는 가능하면
여러분이 주위에 Empathy 가 아주 많으시고,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하시는분 가까이로 가실 것을 권합니다. 가까이서 보시고, 느끼시고,
같이 행하실 수 있을 겁니다.
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돕는 사람입니다.
6. 마음이 청결 (카타로이 데 카르디아이, Pure in heart )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것, 둘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큰 축복이죠. 하지만, 세상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힘있게 세상을 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진실한 회개하는 것, 둘째는 계속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기도하는 것, 셋째는 남과 세상을 깨끗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à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계속적으로 회개하며, 자신 뿐 아니라, 남과 세상을 위해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7. 화평 ( 이레노이 ) 하는 자 ( 포이로이 ) 화평케 하는 자 :
이를 위해 먼저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의 모든 분쟁의 주범인 시기심을 없애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겠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도 없애야 합니다. 내 생각을 충분히 주장하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고, 그 사람의 주장대로 되어도 잘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이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분쟁과 반목이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회사, 우리 교회. 그리고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à 화평케 하는
자는 남을 시기하지 않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반목하지 않고
하나가 되기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8. 이 여덟번째는 조금 개념이 다릅니다.
여기서의 ‘의’는 네번째 의 와 같이 '디카이오시네' 입니다.
그런데 큰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이 아니라 ‘핍박받은’ 이라는 겁니다. 다른 모든 복이 현재진행형 이었는데, 여기서는 과거형 입니다. 과거에 예수 믿느라 힘든 시기를 겪었다면, 하늘나라 갈 것이다라고 위안을 주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샢습니다. 과거의 나의 잘한 것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기억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앞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 마태는 당시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핍박받고, 순교한 성도들, 동료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다음 절로 이어져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쓴 것이죠.
마태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팔복’ 은 우리가 진정한 복을 받기 위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준 일곱 가지 삶의 지표입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팔복에 대한 설교를 들을 경우에, 나는 저 중에서 어떤 삶이 가장 와닿는지 선택하셔서, 꼭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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