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인데, 사실 이에 대해 그다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올 부활절에는 이 문제에 대해 자꾸 신경이 쓰였습니다. 누군가가 물어보면 꼭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강박을 가진 저로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깐 생각해보니 1차적인 답은 나오더군요.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만, 로마 정권의 입장에서도 예수님은 반란의 수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이해간계를 가진 그들은 에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처형한 죄인이 이틀 후에 부활했다고 하고 제자들을 만나고 돌아다닌다면 아떻게 될까요? 진상을 파악하려는 사람과, 최대한 빨리 다시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로 사회는 요동을 쳤을 겁니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숭고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니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반드시 모습을 바꾸셔야 했을 겁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를 생각해 봅니다. 역사책에 '예수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부활해서, 증거를 남기고, 40일 후에 육신을 가지고 백여 명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했다. ' 라고 쓰려는 의도는 아니겠죠? 혹시 ㅇ러분들은 이렇게 쓰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사람에게 온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이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전하며 살게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나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마늘 만나실 때는 예수님의 원래 모습을 하셨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의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그의 가르침 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나 대하듯 하며 살아라!" 마태복음 25장에도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요. 불교에서 자주 쓰는 '내게 오는 모든 사람이 부처다.' 라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겠죠.
하지만 왠지 이런 의도가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남은 삶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하고 많을 것을 가르치시고,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계시자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어떤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핫서 승천하실 때까지 그 시간을 예수님은 이전 같이 제자들을 끼고 다니시는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계신 새로운 환경에 처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 안계신 환경에 대한 훈련을 시키셔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위한,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한 준비를 시키셔야 했을 겁니다. 몇 일 만에, 때로는 몇 십일 만에 늘 다른 모습으로 잠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해주시고, 뭔가 느낄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사라지시면서,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뭔가 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 모두가 감람산에 모여서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하셨고, 모두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서 성령을 기대하게 하셨습니다.
저로서는 충분한 답을 얻었습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작은 답이라도 되셨기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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