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5일 금요일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

어느 날 창세기를 읽다가, 뜻밖의 문구가 눈에 띠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셔서... " 두 곳에서 이 문구를 볼 수 있었다. 과연 어느 장면에서일까?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였다.
요셉은 어릴 적에 잘난 척을 너무 많이 했다. 물론 아버지 야곱의 편애가 이를 유발시키긴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지나친 잘난 척의 결과로 그는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그나마 장남인 르우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첫번째 형통은 바로 이부분에 나온다.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하셔서 노예 생활을 잘 하게 하셨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형통이다. 이보다 더 한 형통이 바로 두번째 형통이다.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에게 최선을 다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아마도 다른 노예들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모두 그렇고 그렇게 잘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충성과 절개(?)를 지켰다. 요셉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주인을 위해서.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강간 미수로 몰리고, 주인의 분노로 왕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나님의 두번째 형통은 바로 이부분에 있다.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하셔서 감옥 생활을 잘하게 하셨다."
첫번째야 요셉의 잘못이 있었다 치자! 하지만 두번째는 요셉은 최선을 다했지 않는가? 아니 최선 이상을 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요셉에게 주어진 보상이 바로 감옥 생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형통이라고 하셨다. 이런 형통을 누가 원하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요셉에게 기회가 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 한번의 기회를 바로 잡았다. 요셉은 원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소망을 붙잡고 있었다. 주어진 그곳에서 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어땠는가? 여러분 모두가 아시듯이, 요셉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다. 모든 것을 회복했다. 특히 어릴 적에 자신이 상처를 주었던,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형제들과 극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주 완벽한 연출이고, 주연으로서 요셉은 누구도 하지 못할 연기, 아니 역할을 보여준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요? 혹시 불평 불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형통의 축복이 주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행동이, 마음 가짐이 어떤 것일지?
담담하게, 잠잠하게, 돌아보며 하나님의 형통을 음미해 보실까요!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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