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8일 월요일

시기심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행동을 리비도라는 성적요소를 통해서 해석하려 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프로이드의 이러한 견해와 해석에 대해 공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제 관심은 '시기심' 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최대의 요인이, 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시기심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시기심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이라고는 대학교 때 3학점 들어본 것이 전부인 저로서는 어떤 학자가 시기심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는 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적어봅니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 심리학개론을 들으면서, 내가 심리학을 꽤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어느 날, 융이란 심리학자를 접하고는 심리학이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포기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리학 근처에 가면 부담을 느끼곤 합니다.

성경을 보면 시작서부터 시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이라고 하는 아담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기하여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의 장남인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유리하게 되구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끊임 없이 자기를 돕는 아브라함을 시기합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와 첩인 하갈의 시기심이 가정에 분란을 만들었고, 야곱은 형 에서를 시기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사울은 다윗을 시기합니다.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시기하는 것에서 비롯하여, 형제와 친족, 그리고 자기를 도와 충성하는 사람을 시기합니다. 이 시기심들은 개인을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며,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기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봐도 이 시기심은 참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 상식, 혈연, 지연 등 모든 것을 뛰어 넘으며 힘을 발휘합니다. 사극을 통해서 무수히 접하는 사건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현대에 들어서도, 장면과 윤보선의 시기심이 박정희의 정권을 만들어 냈고, 김재규와 차지철의 시기심이 박정희정권을 끝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겠습니까? 우스개 소리로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라, 한번 쯤은 스스로의 마음을 비춰봐야 좋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제가 시기심을 느꼈던 사람은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친구 중에, 친척 중에, 같은 교인 중에 있기가 쉽습니다. 누가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할 때, 그 칭찬의 대상자가 나와 별 관계가 없는 먼 사람일 경우엔 편안하게 진심으로 동조를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와 관계가 있는 가까운 사람일 경우, 얼른 맞장구를 쳐보지만, 끄트머리가 편하지 않기 쉽습니다.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나, 일렉트라 컴플렉스를 아시죠? 아들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딸이 어머니를 시기할 진대, 과연 누가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시기심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살아오면서 나는 누구를 가장 시기했나?"  저는 묘하게 친구나, 가까운 선후배를 시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잘되게 하는 일에 꽤나 정성을 쏟았던 기억이고, 친구가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친척이 잘되는 것은 당연하게 기뻐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시기심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꽤 알면서,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일 것입니다. 저는 저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라, 저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들이 저보다 인정받는 것, 저보다 잘 될 것 같은 것에 대한 시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 떠올리기도 챙피한 기억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부끄러운 경험들이 저로 하여금, 시기심을 극복하게 해주는 귀한 힘이 됩니다.

시기심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까요? 시기심이 경쟁심을 유발시켜서 열심을 다할 수 있도록 해줄까요? 시기심은 '선의의 경쟁' 을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의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시기심이 없다면, 사람들이 열심을 다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기심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고,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최선을 다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왔던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나단과 세례요한 입니다. 자기의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나는 망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고 예수님을 영접한 세례요한. 이 두사람이 시기심을 이길 수 있었던 두 열쇠를 저는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나단은 친구로서, 동생으로서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왕위를 포기할 수도 있었고, 다윗을 믿었기에, 마음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낼 정도로, 자신의 명망을 위협할 예수님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깨달음, 자기 삶의 목표를 향한 성실함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두사람이 시기심을 극복한 그 힘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알아도 흉내내기 힘든 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안좋았던 경험이 제 삶의 힘이 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시기했던 경험이, 저로 하여금 비슷한 류의 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줌을 느낍니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을 시기했던 사람이 더 많이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가 시시심을 극복하기 위해 굳게 뜻을 정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시기심을 부끄러워 했으면 합니다. 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결국은 점점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시기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랑이 움직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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