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시간에 영화 '밀양' 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영화를 본 것이 꽤 오래 전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저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시는 것을 보고, 밀양이란 영화에 대해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2007년에 밀양을 보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관망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어떻게 대응할까? 하지만 적절히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공격은 도저희 방어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도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소그룹모임과 통성기도, 각종 기도모임 등을 희화화 했습니다. 기복신앙과 중보기도, 치유의 은사를 조롱했고, 목사가 신도들과 상담하는 것을 장난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결정적으로 죄와 죄의 용서, 그리고 구원의 관계를 미궁 속에 밀어넣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공격했습니다. 밀양은 전도연과 송강호라는 당시 최고의 배우를 등장시켜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실질적으로는 이창동 감독의 심중에 있던 기독교와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기독교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공격하면서 그는 자신있었을 것이고 흡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기독교계에서, 아니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대응할까? 를 예상했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저도 어떤 작은 모임에서 통성기도를 하면서, 영화의 장면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기도하지 못한 적도 몇번 었었습니다. 울분에 찬 몇몇 기독교인들께서 블로그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이창동 감독을 공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현명한(?) 기독교는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큰 상처를 입지 않는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현명하게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이 '잠잠한 현명함' 에서 두가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모습은 맹목적성입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가도 자신이 신봉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합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맹목적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황당한 사이비종교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왜 그 부분에서는 저럴까 ? 일종의 이런 맹목적성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기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목사 아래서, 의심을 가져도 안되고, 따져서도 안되는, 완전무결한 성경을 보며, 보지 않고도 무조건 믿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길들여진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모습은 자기들의 본심과 주요 전략을 들켜서 아무 소리 할 수 없게 된, 교계나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사실 감탄했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교회나 교인들의 모습을 그릴 때, 그의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가장이나 강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를 표현할 때도, 꽤 점잖고, 합리적이고, 스마트해 보이게 그렸고, 교회의 모습이나, 길거리 찬양, 소그룹 모임, 성도들의 대화 등도 의도적으로 평균 이상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좋은 모습을 만들어 보여 주면서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죠. 교회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어필했고, 어떻게 사람들을 기만하는지? 어떻게 성도들을 교회로 몰입시키는지? 또 그렇게 떠들어대는 '사랑' 에 실상 내용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숭고한 사랑이, 여주인공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평범한 남자주인공의 인간적인 얼치기 사랑 보다도 힘이 되지 못한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공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의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 약해진 마음에 파고들어 위안을 주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 위로라는 것이 궁극적이거나, 본질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결국은 일시적인 도피처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아전인수적인 측면을 공격합니다. 여주인공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어졌습니다. 그녀가 슬픔이 복받혀서 참지 못해 오열하는 모습을 기독교는 성령의 임재로 자신의 최악을 깨달아서 눈물로 회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조소했습니다.
교회에서 모범적인 장로가 여주인공에게 성적으로 쉽게 유혹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양면적인 생활을 공격합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척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욕망적인 교인들, 아니 오히려 교회라는 집단을 통해 성적만족을 찾으려는 교인들이 많은 것처럼 끌고 갔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한 장소로 제공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했습니다. 만일 "교회에 나가는 너희 놈들, 성적 관심이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주십시요!" "주십시요!" 만 외치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만 외치는 기복신앙에 대해 공격했습니다. 복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라고, 기도하면 주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 만약 기도한 것을 주시면 "이렇게 했더니 주시더라!" 라고 간증하는 모습. 만약 기도의 응답이 없으면, 믿음이 약해서 그러니 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바쳐야 한다고 독려하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들어주시지 않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니 그것을 발견하고 감사하라!" 고 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공격했습니다.
살인을 하고도, 물론 죄 값을 치루고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환한 표정을 짓는 모습. 계속 나쁜 짓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을 얻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순적이고, 뻔뻔한 모습을 공격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기독교의 은혜로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만심과 착각, 자기기만을 지적합니다. 기독교를 통해 위로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여주인공은 오히려 더 큰 충격과 상실감으로 인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집니다. 홀로 남겨진 주인공을 통해, 결국 기독교는 나를 속인 것이고, 나는 기독교를 통해 위로받기를 원했지만 내게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당시 저는 이창동 감독의 공격에 나는 어떻게 반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습니다. 오랜 기억을 되새기며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상처입어서 위로와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감싸안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위로와 힘을 얻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물론 상처입은 모든 사람이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치유되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노력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란 이름 아래서, 다양한 교회가 존재하고, 수없이 많은 신앙의 모습이 존재함을 직시했어야 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복신앙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지만, 삶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신실한 기독교인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교회 장로 쯤 되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초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기독교를 너무 높게 본 것이겠죠? 노력하고, 실패하고, 또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겠죠!
영화는 어떤 순간에 주인공을 위하던 기독교가 완전히 손을 놓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적절히 반영한 것은 아닙니다. 남자 주인공이 포기하지 않았듯이,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는 기독교인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겠죠.
교회에 다니는 어떠한 사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또 성도들간에 완전한 사랑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어떠한 상처도 치유되고, 성도들간의 사랑이 완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니!!!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이렇게 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주인공이 짧은 시간 내에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일 때, 같이 신앙생활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여주인공의 신앙이 성숙되려면 아직 멀었고, 초기의 들뜬 신앙이라는 것을 앎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교도소에 가서 아들의 살인자를 만나려는 것을 말립니다.
여주인공이 자기모순으로 인하여 극단적 행동을 하게 하고, 정신병원에 가게 한 것은 이창동 감독의 가정일 뿐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원수를 용서하려고 애썼던 그녀의 노력은 결국에는 삶의 변화로 열매를 맺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기독교와 원수를 용서하려고 노력한 주인공의 노력이, 비록 일시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여질지라도, 과연 가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이 비난받을 일일까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용서는 주인공이 자신을 용서하는 것, 자신이 용서받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유한 척한 자신의 행동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마음이 찟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용서받았고, 평안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았고, 확신했을 겁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고 값없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두번째 용서는 살인한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더라도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는 용서를 빌었고, 값없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세번째 용서는 여주인공이 살인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녀 자신이 값없이 용서를 받았듯이, 그녀도 그 살인자를 값없이,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했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자신이 그를 용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자기는 값없이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살인자는 자기의 기준에 합당하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용서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진심으로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은 값없이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이 용서의 감격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감격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은 남을 용서할 일이 없습니다. 내가 남의 죄를 논하고, 정하고, 용서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용서와 은혜의 본질입니다. (쓰다보니 바로 지난 번에 쓴 글과 내용이 겹치는군요. 이 부분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공격을 통해서 저는 기독교와 우리 신앙의 모습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공격하고 욕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졌습니다. 한가지 바라기는 그가 자만심에 가득차서 기독교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독교를 공격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영화의 내용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 처럼 가정하며 써 본, 이상한 글을 마칩니다.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영화 '밀양' 과 기독교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2개:
예수도 하느님도 없다 중생들아~유태인이 왜 머리좋은지 알지?그옛날옛날에 성경이란걸 만들어서 종교를 만들었지...기발했어 정말
댓글이 달린 줄 몰랐습니다. 늦게 봐서 죄송합니다. 예수도 하느님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 무엇이 있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머리 좋은 유대인들이 돈벌이를 하기 위해 성경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을까요?
그들의 머리가 좋다고 인정하신다면, 그들이 섬기고, 믿었던 대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