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를 자주 쓰게 됩니다. 얼마 전에 '타워' 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속에서 크리스챤을 아주 비판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지난 번 글에서 영화 '밀양' 에 대해 쓰다가, 내친 김에 영화 '타워' 에 대해서도 써보자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김지훈이라는 비교적 젊은 감독이 만든 이전 영화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광주사태를 소재로 한 '화려한 외출' 이라는 영화로 유명감독이 되었고, 제7광구란 영화를 만들어서 어중간한 반응을 거두었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돈을 들여서 타워 라는 영화를 만들었더군요. 별로 창의적인 감독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평론할 입장은 못되지만, 어떤 수준의 감독인지는 느껴지더군요. 더구나 70년대 중반에 나왔던 미국영화 '타워링' 과 제목이 같고, 소재도 거의 같게 느껴져서 설마 비슷한 영화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정말 실망이었습니다. 컴퓨터그래픽만 화려했을 뿐이고, 소방대원들의 화재진화 기술만 진화했을 뿐이지, 완전히 Remake 라고 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은 영화에 대해 쓰는 이유는 그 감독이 공격한 크리스챤에 대해 변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어떤 작은 교회 장로님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최고급 맨션으로 이사를 합니다. 교인들이 집들이 축하해주러 온 그날, 바로 화재가 발생해서, 십여명 전원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화의 주요 흐름과 관계 없는 변두리, 아니 조미료 역할을 할 정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크리스챤에 대해 악의적인 공격을 했습니다.
먼저 로또에 당첨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떠들어대는 장로님과 교인들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떠들어대며, 기껏 신분상승을 위한 수십억짜리 집이나 사고, 그러다가 결국 죽게 됐지? 라고 말이죠.
옆집 여자에게 무식하다고 모욕을 당하고, 그 집 강아지에게 분풀이 하는 모습을 통해서 장로라는 게 사랑을 베풀어야지, 기껏 사람에게 분풀이도 못하고, 말못하는 짐승에게 분풀이나 해대다니! 쯧쯧쯧...
심방한다고 몰려와서 예의 없이 설쳐대는 모습을 꼴불견으로 표현하여,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우스광스럽고, 함량미달 정도의 존재인 것으로 비난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움직여서 살 길을 찾지 않고, 기도만 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표현하여, 말만 앞세우고, 실행은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 교회에 몰려가 복 주기만을 기다리는 교인들을 공격했습니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소방관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믿고 열광하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교인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방관은 팀과 떨어져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어떤 소리가 들리자 그쪽이 살길인 줄 알고, 얼떨결에 그곳에 이르렀던 소방관이었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할렐루야! 를 외치며 감사하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고맙니다. 아니, 다 죽게 합니다. 참 나쁜 의도를 가진 영화죠?
지금부터 변론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신앙적이기도 하지만, 생활관 때문에 로또를 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챤이라고 로또 사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크리스챤이라고 로또 당첨되지 말라는 법도 없구요.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재수가 좋아서 당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예측능력과 계산능력이 뛰어나서 당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욕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당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당첨금 중에 일부라도 좋은 일에 쓰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장로님처럼 교인들과 친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크리스챤들은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해서, 자기가 살던 동네를 멀리 떠나, 부자 동네로 이사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비교적 신실한 크리스챤이 집을 결정할 때는 새벽기도 가기 편한, 교회에서 가까운 곳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을 못배우고, 무능한 집단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물론 크리스챤 중에도 못배운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 중에는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학문이나 연구분야에서 아주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신실한 크리스챤이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주 소문난 부자들 중에서 크리스챤도 많구요. 하다 못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크리스챤이죠?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집단이 크리스챤인 것으로 표현한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크리스챤들이 열명 정도 몰려다니며 떠들고,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연출한다고 칩시다. 그래봐야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꼴보기 싫은 정도일 것입니다. 만약 조폭 열명이 떠들고 몰려다닌다면, 아니 조금 불량끼가 있는 고등학생 열명 정도가 몰려다닌다고 하더라도,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거나, 공포스럽게 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해도 친한 사람 열명 이상이 몰려다니면, 큰소리 나기 마련이고,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어떤 집단보다도, 크리스챤이 몰려다니는 것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부담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크리스챤이라고 다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죠.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이 놀림받을 짓일까요? 영화 '타이타닉' 을 보면, 죽음의 순간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는 악사,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신앙인들이 나옵니다. 물론 자기만 살겠다고 설쳐대는 악인이 한두명은 꼭 나오고, 그 사람들은 응징을 받게됩니다. 열명은 족히 넘는 크리스챤을 조롱거리로 만들어서 모두 죽게 만드는 감독은 생명의 존엄을 무시한 상식이하의 감독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크리스챤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게 만드는 재난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관련된 사람들의 생명은 고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은 너무 가치 없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나치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감독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거죠. 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어쩔 수 없다구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신경써도 훨씬 그런 느낌을 없앨 수 있습니다.
소방관이 나타나자,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주셨다고,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감격합니다.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소방관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기대를 가지고 감격하는 사람과, 소방관에게 당신이 정말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까? 확실합니까? 하고 불신에 가득차서 묻는 사람. 누가 더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요? 누가 더 소방관에게 힘을 줄까요? 우리 모두는 죽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능력있는 소방관도 장담하지 못하고, 능력있는 의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불과 5분 뒤에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럴 수 있는 것이 크리스챤의 특권입니다.
우스광스럽게 그린 크리스챤의 모습 속에서, 저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우스광스럽게 보이며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으로 변론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영화 '타워' 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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