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9일 화요일

누가 네 이웃이냐?

 누가 복음 9장의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저는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율법학자는 분명히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물으십니다. 이 비유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강도 만난 자가 네 이웃이다. 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단계 더 나아가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네 이웃인데, 너는 그이웃을 레위인이나 제사장 처럼 대하지 말고, 사마리아인 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단계 더 나아가서 이렇게 행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조금 불만입니다. 네 이웃은 강도 만난 자다 라고 답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죠. 아니 제게는 꼭 그렇게 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의 현실이 이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도 만난 자가 내 이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내 이웃이다 라고 하는 묘한 전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훈훈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분명히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살지 못했고, 레위인 처럼 살아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찬 입네 하고, 선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려 하고, 그렇게 봐주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봤다고 가정해 보죠. 나는 어떻게 했을까?  

1.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그냥 가던 길을 간다. 

2. 사람들이 조금 모여 있을 경우, 겁은 나지 않으니, 사진 몇장 끽고 어떻게 되나 지켜본다. 

3. 911 에 전화하고, 옷을 벗어서 피를 닦아주거나, 지혈을 시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3번 처럼 하기도 어려운데, 감히 사마리아인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저는 남을 돕는 데에 꽤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남자 낚시가는 남자 네명이 탄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차 앞이 심하게 끼그러진 상태로 있었습니다. 제가 탄차에서 열대 쯤 앞에 있는 차였습니다.  영문을 몰라 잠시 차에 있다가 내려서 가보니, 뒷좌석의 두명은 차에서 나와서 길가에 주저앉아 있고, 앞좌석의 두명은 차 본네트가 밀려들어와서 꼼짝도 못하고, 얼굴에는 유리 파편이 박혀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이 수건을 들고 있길래, 그 수건으로 얼굴에 유리 조각을 제거하며 피를 닦아주었습니다. 의식이 거의 없었던 남자에게 힘을 내라고 말하면서 그 남자의 손을 잡았는데, 손이 덜렁 손목에서 떨어지는 거이었습니다. 손목이 이미 꺽여지고, 절단되어서, 아주 일부분만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놀라서 손을 다시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그 사람의 다른 손을 붙잡고 응급차가 곧 올거니까 정신 차리고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지만, 잘려진 손목의 동맥에서도 피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이니, 온 몸의 피가 이미 다 빠져나간 상채라고 느껴졌습니다. 앰블런스와 경찰이 왔는데, 그 사람을 차에서 뺄 수 없었습니다. 트럭 두대가 와서 체인을 걸어서 앞뒤로 당겨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더이상 있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의 하반신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경찰과 함께 차에 싣는 일도 몇차례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고 나서는 말도 안통하니 더 겁이 나서 그냥 지나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머릿 속에 여러가지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한번은 맨해튼 57가 쯤에서 신호가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같이 서있던 여자 노인 분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 듯 쓰러졌습니다. 얼굴이 바닥에  닿으면서 작은 상처도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지만, 우선 911 에  신고를 해서 앰블런스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가가이 다가오더니, 자기 겉옷을 벗어서 노인 분의 얼굴을 받쳐드리고, 손을 잡고 말을 시켰습니다. 몇번 말을 붙이자 의식이  돌아오는지 눈을 가늘게 뜨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저는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고, 911 을 부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는 핑계가 있었지만, 사실 노인을 캐어하는 일과 전화 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대부분이 그럴 경우에 손을 대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에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캐어를 할 겁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램프에서 제 앞에서 열대 쯤 앞서 가던 승용차가 커브에 대응하지 못하고 전복되었습니다. 제 앞에 있던 열대 가까운 차 중에서 다섯 대 정도가 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쓰러진 차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몇대의 차는 현장을 천천히 보면서 그곳을 지나쳤습니다. 전혀 망설임 없이 차를 세우고 달려가는 것은 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완전히 생활화 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도전을 주는 이야기 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도전을 주는 설교 보다,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해야 성도들이 좋아한다구요. 저는 전문 설교가도 아니고,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쏟을 상황도 아니자만, 항상 도전을 주는 설교를 하곤 합니다. 양로원 노인분들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푸쉬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겁을 줍니다. 

이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땅의 크리스찬들이 수많은 감동과 교육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웠지만, 정작 행동은 하지 못하는 크리스찬일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 이라는 말이 떠오를 때면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이웃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 이웃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치대한의 것을 시도해 보려 합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이 이렇게 기록되기를 희망합니다. " 한 아시아인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웃을 헌신적으로 구하고,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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