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의 시작도 2편의 마지막 패러그래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듯 문제가 많지만, 본인이 스스로 선택해서 부여받은 이 육체를 어떻게 컨트롤해서 이세상 삶을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이세상의 삶에서 육체를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 하게 하셨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지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육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육체는 우리의 성공적인 삶에 장애가 됩니다. 자칫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물론 욱체는 휴식도 필요하고, 영양 보충도 필요합니다. 육체는 쉬는 것을 좋아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고, 성적 충동을 따르려 합니다. 이를 자제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는 정신을 따르게 만들어졌고, 정신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따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입니다.
제가 정신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 정신은 혼이고, 의지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이 의지가 온전하고, 올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가족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아주 이기적인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공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인격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지체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또는 특별한 지능을 가진 영재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현재는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된 사교육이 발전합니다. 아마도 기득권이 자기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려고 만드는 장치나 제도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늦게 출발하거나, 남들 보다 뒤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인생 경주를 마칠 수 있게 하십니다. 남들 보다 뒤에서 출발했건, 낮은 곳에서 출발했건, 달리기 어려운 신체를 가졌건 간에,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세상 모든 일,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가장 중심된 특성이 바로 공의 라고 생각합니다. 완전무결한, 완벽한 공의의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경주에서 걱정하거나, 불안할 일이 없고, 핑계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우리에게 '시험장'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영'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요구하십니다. "이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라!"이것이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율법이며, 이 명령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평가하십니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위해 사탄을 만드셔서, 도구로 쓰시기 까지 하시죠.
저의 하나님은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이 섬기는 미신이나, 우상에 질투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평가하시는데,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어떻게, 어떤 방식과 자세로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일을, 또는 나쁜 짓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로 평가하실 뿐입니다.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영의 음성을 듣지 않고, 돈과 권력을 쫓으며 사는 사람도 지켜보시고, 원칙에 따라 심판하실 뿐입니다.
이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하고, 삶을 마치면, 상급을 받고, 반대로 이세상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어둡게 만들면 형벌을 받습니다. 이세상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을 통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하시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도록 작용하십니다. 이렇게 살면, 평안을 얻게 되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거나, 반대로 행하면 '양심의 가책', '최책감' 을 느끼게 하십니다. 본향에서 형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죄와 가책으로 억눌린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사탄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사탄의 사명은 사람들의 삶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겁니다. 왜 실패하게 하냐구요? 죽어서 하늘나라,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죠. 본향에서는 어떻게 살까요? 거기에도 계급과 조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힌두교의 바르나 체제를 보죠. 먹고 사는 일에 관계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브라만 계급 5% 가 있고, 통치자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5%, 그리고 사업을 하고, 농사를 짓는 바이샤 계급이 15-20%, 그리고 이들 밑에서 노동을 하는 수드라 계급과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 계층이 약 70%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이 시스템을 말씀드리는 지 아실겁니다. 정말 오랜 동안 어떻게 보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니 본향의 시스템을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뜻 생각해 봐도, 이정도 구조가 되어야 사회가 돌아갑니다. 본향의 구조도 이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겁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최고의 자유를 누리는 계층이 있고, 일을 하되, 최고의 자유를 누리는 통치자 계층, 어느 정도 자유를 가지고 일을 하는 계층, 자유가 거의 없이 노동만 해야 하는 계층, 그리고 형벌로 지옥을 경험해야 하는 계층이 있습니다. 이세상 삶을 통해 우리는 본향에서의 위치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 곳엔 이세상과 같은 고난과 시련, 번뇌, 걱정과 염려, 두려움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엄청난 수치와' 부끄러움, 끊임 없는 고통,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합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큰 감정은 '후회 일 겁니다. 이세상에서 조금만 잘살았었으면! 그 때, 그 순간에 이랬었으면!. 그때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는! 10년이 될 지? 100년이 될 지? 모르는 삶을 변화 없이, 어떤 선택도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절망과 수치와 후회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선별을 위해 하나님은 사탄을 사용하시고, 육체의 유혹을 주십니다.
본향에서의 나, 내 혼의 모습은 어떨까요? 만약 제가 이세상의 삶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아마도 저는 4~50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겁니다. 6~70대의 모습인 부모님을 보면서, 2~30대의 모습인 자식들, 그리고 어린 손주들의 모습을 보면서 살 수 있을 겁니다. 저의 부모님은 아마도 2~30대의 제 모습을 보실 겁니다. 제 어떤 자식은 40대의 제 모습을 보면서 살 것이고, 또 어떤 자식은 60대의 제 모습을 보면서 살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세상에서도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60대의 제 후배는 제 기억 속에서는 20대로 있습니다. 1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모습 중, 어떤 모습으로 만난다 해도 느낌에 차이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 입니다. 40대 때의 모습도 뵈었고, 50대, 60대, 70대, 80대 까지의 모습도 뵈었지만, 제 기억 속에는 항상 60대의 어머니가 계십니디ㅏ. 본향에 가면 저희 어머니를 만나겠죠? 가족 처럼 같이 살 지? 아니면 떨어져서, 가끔 보며 살 지? 힘들게 사실 지? 평안하게 사실 지? 모르지만, 저는 어머니를 뵈면 60대의 어머니를 볼 겁니다.
젊어서부터 제 삶의 목표는 제가 이세상 삶을 아주 성공적으로 살아서, 하늘나라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어서, 부모님, 가족, 친구, 저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위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세운 지 30년이 되었음에도 , 도움을 주기 보다는 받아야 하는 자리에 갈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갈 길이 먼데, 해가 지면 어떠나? 하며 기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 다시 생각해 보죠! 본향에서 거의 지옥 같은 삶을 백년 정도 살고 있다고.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삶응ㄹ 백년 간 살고 있는데, 세상에 나가서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 겁니다. 정말 기쁘고 각오가 새로울 겁니다. "정말 잘 살아보리라!"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서 시작할지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본향에서는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고, 부분적이나마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세상의 메카니즘을 알기 때문에, 잘생기고, 부자이고, 머리 좋고, 온동 잘하고, 말 잘하고... 이런 자리를 선택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유혹에 빠지고, 크게 실패할 확률이 높은 자리를 피하려 할 겁니다. 어떤 성격을 가지고 사는 것이 더 확률이 높을까도 고려할 겁니다. 몇 개? 또는 몇 십개, 몇 백개의 선택지가 주어질 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최고의 자리를 각오와 함께 선택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완벽한 메카니즘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본향과 전생에 대한 모든 기억이 지워진 체 이세상에 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선택한 자리인 줄 모르고, 불평불만을 하고, 출생을 원망하기도, 비관하기도 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남을 도와야 하는 자리가, 남의 도움을 많이 받는 자리보다 좋은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후광아래 살면서, 운전기사, 가정부, 가정 교사...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부러울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복인 줄 알고, 도움만 받고, 즐기며 살다 가면, 본향에서 어떤 자리에 있게 될 지 ? 저는 지켜야 하는 자리 보다는, 만들어가야 하는 자리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자리이기도 하구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 이란 단어를 주셨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인간의 몸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 단어가 나왔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옵니다. 윤회가 가진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나는 영생을 말하는 것이겠죠. 즉, 윤회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서, 본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불교의 열반이나 힌두교의 목샤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이세상이 만들어지고, 영생에 이른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엘리야 같이 대단하게 살다 가신 분도, 세례 요한으로 다시 오셔서, 목이 잘리어 바쳐지는 죽음을 맞은 후에야 영생을 얻게 되었다면 말이죠.
윤회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공의를 실현하는 완벽한 메카니즘 입니다. 단 한번의 생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이세상에 와서 단 하루만 살다 간 저의 둘째 아들의 삶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가, 하루 만에 거두어 가신 걸까요? 사람의 영혼이 이세상에 오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땅에 오면서 육체를 가진 것입니다. 하루 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본향으로 돌아갔다가, 곧 다시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저는 돌아간 그 아이가 2년 뒤에 다시 우리에게로 왔다고 믿습니다.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살다 간 경우를 생각해 보죠. 10대에 세상을 떠나던, 20대에 세상을 떠나던,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이 생각해 봤는데, 대부분의 불행도 우리에게 선물이 되더군요. 오히려 행운이 우리를 위기로 몰아가구요. 누군가가 세상을 빨리 떠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큰 슬픔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보죠. 세상을 떠난 아이가 부모 아래서 사랑받고, 착하게 잘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갔다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극적인 종말이 아닐 겁니다. 세상 풍파 겪지 않고,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간 것이죠. 어쩌면 영생을 위한 마지막 작은 크레딧을 다 채워서 이세상을 떠난 것일수도 있겠죠? 아이가 더 산다면 우리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더 줄 건가요? 줄 사랑 다 주었으면 돌아올 것을 기대하나요? 당신은 좋은 부모였고, 사랑을 충분히 주었나요? 후회가 된다면 남은 자식들이나, 조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가는 분들을 봅니다. 나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더 잘살아서 자식에게 무너가를 줄 생각을 하면 좋은데, 슬픔 속에서 위축되어서 살다 간다면... 정말로 자식에게 나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죠. 불행은 저주가 아니라, 기회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가족 중에 장애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요. 행과 불행, 모든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뚯입니다.
3편을 이정도에서 마치려 합니다. 4편에서는 부자가 본향에서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왜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지에 대한 주제로 시작하려 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