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참지 못하는 유혹

(쓰다 보니 반말로 씁니다. 용서하십시요!)
어릴 적에 내가 느꼈던 가장 큰 한계는 내가 ‘자위’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다 허락할테니, 그것만 참아라!” 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매번 회개하고도 하루를 참지 못한 날도 있다. 아마 길어야 이십일 정도 참아보았을까? 남들 앞에서 온갖 잘난 척을 다해봤자, 이것 하나 참지 못하는 나는 정말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붙잡고 버틴 것이 있다면, 죄를 멈추지 못할 지언정, 회개를 멈추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이십여년 동안 한번도 자위를 해보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이 무슨 자위냐? 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내 주변을 보면, 결혼 생활 속에서도 자위를 즐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정말 “이것 만큼은 참아야해! “ 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오히려 참지 못한다. 우리는 (거의)참을 수 없다. 기껏해야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만의 합리화나 원칙을 지키는 정도다.
어떻게 예를 들까? 자위라는 소재를 썼으니, 내친 김에 부부간의 섹스에 대한 예를 들자. 와이프와 섹스를 할 경우, 머리 속에 아무 생각이 없어야 가장 컨디션이 좋다. 소위 피가 머리로 몰리지 말고, 몸으로 몰리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면서, 스트레스가 있고, 머리 속이 복잡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되기 시작하면, 섹스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내가 택하는 방법은 내가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연상하는 것이다. ‘와이프와 섹스를 하면서 다른 여자를 떠올린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라는 찔림 속에서 내가 택하는 두가지 변명 같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상상하는 장면 속에 다른 여자의 섹스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것. 둘째는 등장하는 여자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 이런 정도의 자기 원칙을 만들어서 “나는 이정도는 지킨다!” 고 하는 것이 우리다. 우리가 가지는 원칙이 바로 이런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나를 포함해서 룸살롱을 가 본적이 있는, 아니 지금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여자 파트너는 부르지만, 파트너와는 손도 잡지 않는다.” “나는 파트너와 손잡고 부르스는 추지만 엉덩이는 만지지 않는다.” “나는 엉덩이도 만지고, 재미있게 놀지만, 2차는 가지 않는다.” “나는 재미있게 놀고, 2차까지는 가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룸살롱을 가지만, 여자 파트너를 부른 적이 없다.” “나는 내돈 내고는 룸살롱에 가지 않는다.” “나는 룸살롱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남자들만 대답해 보자. 어떤 것이 당신인가? 무엇이 맞는가? 어느 것을 선택해도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예뻐 보이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창녀촌을 즐겼(?)고, 대학교 때는 미아리 텍사스를 백번은 갔을 것이다. 대학교 때부터 룸살롱에 갔다.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없을까 하고, 20대 때에 요정엘 가봤다. 별것이 없었다. 서른 다섯살까지 ‘뭔가 특별한 것’ 을 찾았다. 그러면서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잘하면 끝까지 가겠구나! 거기까지 간 것도 깊게 간 것이지만,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이 없었다면 끝까지 갔을 수도 있다.
그러던 서른 다섯에서 여섯의 일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조금씩 느껴지더니, 삶의 관점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까? 남이 보기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마 집사람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변했다. 변하고부터의 내 삶은 오히려 힘들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삶은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어려워졌다. 물론 변한 결과로 어려워진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안타까운 것 하나는 대부분의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카드, 화투, 게임, 당구… 잡기라면 한가지도 빠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무 것도 즐겁지 않게 되었다. 승부욕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도를 터득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모든 즐거움이 없어진 후에도, 만화는 끊지 못했다. “카드나 화투를 치는게 낫지, 챙피하게 무슨 만화냐?” 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어쩌겠는가? 안되는 걸. 미국에 와서는 만화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TV 드라마를 참지 못한다. 항상 명분을 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와이프와 같이 TV는 봐줘야지!” 그런데, 와이프보다 먼저 TV를 켜서 구박을 받기도 한다. “애 공부하는데, 아빠가 TV 를 켜냐!”

가끔은 참으라고 권면하지도 못할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십여년 전에 신림동의 노숙자 처소에 가끔 간 적이 있다. 30대 후반이었던 내 또래의 친구들이 주로 있었는데, 대개는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노숙자가 된 친구들이었다. 열다섯명 정도가 교회 1층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 가끔 들려서 이런 저런 신앙적인 이야기도 하며, 위로도 하며 지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연발했다. 왜 그러냐고 진정하고 이야기해 보라고 했더니, 자기는 지금 신림동 시장 근처에 있는 찻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그 여자를 데리고 나와서 근처 여관에 가서 섹스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여관을 나오면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자신이 한심하고, 나쁜 인간인지? 괴로와서 술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목수이면서 공사현장에 나가는 그 친구는 돈벌이가 나쁘지 않았고, 숙소에서 1년 가까이 지내면서, 교회도 성실하게 나오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섯시면 숙소로 온단다. 샤워하고, 밥을 먹고, 성경 보다가 지루하면 TV 보다가, 아무리 해도 시간이 가지 않는단다. 술 생각, 여자 생각이 자꾸 나면 예배당이나 기도실로 가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하면서 참는단다. 아무리 참아도 한달을 참지는 못한단다. 시간도 늦었고, 뭐라고 딱이 할 말이 없어서 형식적으로 위로하고 그자리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무조건 참아야지! 신앙인이 사탄의 유촉을 그렇게 견디지 못하다니!”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유혹을 견디겠어? 정 참기 어려우면 해결해야지!” 라고 해야 할까? 답이 없었다. 예수님이라면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을까? “-------“ 답을 안해 주셨다. 아니 알아 듣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대책이 없이 그 친구와 마주쳤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대충 이랬다. “집사님이 잘 참으신 날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셨을 것이고, 집사님의 와이프와 아이도 기뻐했을 겁니다. 집사님이 참지 못하신 날은 하나님도 마음 아프셨을 것이고, 와이프와 아이도 슬퍼했을 겁니다. 죄인과 의인을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아니고, 죽고 사는 일도 아닙니다. 잘못했으면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나, 오랜 동안 한탄과 자책에 빠져있는 것은 사탄이 기뻐할 일입니다. 참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는 유혹만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무서운 마음이 드는 것도 참지 못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참지 못하고, 화가 나는 것도 참지 못한다. 추운 것, 더운 것도 참지 못하고, 배고픈 것도 참지 못한다. 졸리운 것도 정말 참지 못하고, 피곤한 것도 참지 못한다. “공부해야지 잠 잘 시간이 아니다!” “봉사해야지 피곤하다고 포기하면 되냐?” “그 사람을 사랑해야지, 화를 내면 되냐?” 우리가 알면서 참지 못하는 것은 많다. 우리는 못 참을 확률이, 못 참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아이가 내일 중요한 시험이면, 오늘 TV 를 켜는 것은 참아야 합니다. 술을 마셨으면 최소한 대리운전은 불러야 합니다. 모든 콜택시 회사가 대리운전을 해줍니다. 언제 어디서고 전화만 하면 반갑게 달려옵니다. 50불, 80불 아낄 일이 아닙니다. 이 작은 원칙들은 가끔은 사소해 보이고, 자기 변명 같고, cheap 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작은 원칙들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을 쓴 목적은 두, 세가지이다. 첫째는 참지 못하는 것도 있으니, 못참는 것에 너무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 포기하지 않으면 참게 될 날이 있다. 둘째는 참지 못한 다고 해서 끝까지 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자기 만의 원칙을 세워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지켜보자. 셋째는 자기는 쉽게 참아지는 것이 남에게는 정말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러니 남이 못참는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자.

“현대는 유혹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주님이 (유혹 보다)더 가까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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