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3일 토요일

(교)기독교의 주요 개념

기독교의 주요 개념 몇가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제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저는 책을 네종류로 구분해 봅니다. 있어서 해가 되는 책, 있으나 마나한 책, 있어서 좋은 책, 꼭 필요한 책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꼭 필요한 책임에 분명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힘을 얻고, 진리를 발견하고, 삶이 변화되어 위대한 삶을 산 위인들이 만들어 졌습니다. 기독교인이던 아니던, 아니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을 부정하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이렇게 위대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완전무결하다, 성경은 신성하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 그자체이다. 라고 주장하여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성경을 옹호하느라, 많은 적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보신 분이라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쓰여져 있고,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말씀과 업적이 들어있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가 있고, 우리들을 위해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이를 해석하여 우리에게 적용시켜준 설교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각성시키는 예언도 들어있죠. 저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때때로 성경은 부모님처럼, 선생님처럼 제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완전 또는 완벽 그 자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영감을 받았던, 지시를 받았던 성경은 사람이 쓴 책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편찬했고, 사람이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시지만,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오류가 없는, 완전한 책이라면 초기의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원문 그 자체만으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어설픈 인간의 능력으로 번역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성경에 저자의 감정이 들어있고, 저자의 무지함이 나타나고, 부분적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성경이 가치 없어지거나, 기독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턱대고 완벽하다고 주장하며, 믿으라고 고집하며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기독교를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고, 우리 인생에 대해 알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위해서 너무도 충분한 책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성경의 어느 구절에 이렇게 써있으니, 이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단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뜻과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그 문자만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에 맞는 구절을 찾아내어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중에, 성경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써있으므로 성경은 진리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인용하는 그 구절 속에 들어있는 Scripture(성경)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The Bible 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본인이 쓴 서신들을 가르친 것도 아닐 것이구요. 지금처럼 66권의 책이 다 편찬되어지고, 그것에 성경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후에 하나님이 에필로그에 직접 '이 책의 모든 기록엔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인지… 바울이 수차례 언급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모든 성경’ 은 과연 어떤 성경을 가르치는지? 아시다시피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바울이 죽은 지 이백년이 훨씬 지난 후에 편찬이 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느라고 수고하시는 크리스챤 여러분, 여러분이 성경을 지켜야지 성경이 살아남을 정도로 성경은 나약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성경은 빛을 발하고, 그 위대성이 입증되는 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성경을 위해 변론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못합니다. 성경의 무오류성을 주장하시려는 분들은 혹시 여러분의 어리석음으로 성경의 권위에 손상을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시며 여러분의 주장을 멈춰주시고, 성경 읽기를 권유하시며 주님의 행하심을 지켜보십시요. Catholic 교회가 생기고 1600년 동안 사제(신부)가 무오류하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이를 해석해주는 사람도 오류가 없어야 했었겠지요. 사제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가요? 사제가 오류가 있다고 인정하면, Catholic 이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사제가 오류가 있다고 인정하는 현대에도 Catholic 교회가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해를 주지도 않습니다.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사제는 똑같은 한계를 지닌 인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성경을 통해서 영감을 얻지만, 성경은 여러 명의 저자가 쓴 책일 뿐 입니다.’

요즘은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도 과거의 전통적인 ‘축자영감설’ 에서 벗어나, ‘유기체적 영감설’ 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기체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분들도 하나 같이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말들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지만, 사람이 썼기 때문에 저자의 한계가 드러나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에 오류는 없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죠.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저는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고 주장하는 한, 성경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천지창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나를 '하나님' 이라고 부르라고 돌판에 새겨주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라는 호칭의 유래도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창조주를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라고 부르듯이, 영어를 쓰는 민족들이 부르는 God 와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은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유대인들이 부르는 여호와와는 꽤 많이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가끔은 여호와라고 부르며, 이 두 호칭을 동일시 하는 데에 그다지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반면에 중동 민족들이 창조주를 부르는 호칭인 '알라' 와 하나님을 동일시 하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경기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듯이, 각기 민족들은 임의로 호칭을 정하여 창조주를 부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라와 여호와를 접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도인 각 민족들이 부르는 창조주가 호칭만 틀린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성서를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섬기는 창조주에는 각 민족들의 문화와 정서, 그리고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만드신 분이 아니고, 크리스챤만을 만드신 분이 아니고, 우주와 만물과 만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경배를 받아야 할 존재이십니다. 좀더 확장적으로 생각해 보면, 수천년간 창조주를 '알라' 라고 불러온 중동민족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수천년간 하나님이 그들로부터 무시와 외면을 당해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라' 라는 이름으로 그들로부터 경배를 받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그들도 알라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분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이세상 어떤 것이든, 어떤 나라의 역사든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곳에서 창조주를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관여하셨다고 믿는 분도 아무도 없으시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민족의 역사책에서도 하나님의 관여하심을 볼 수 있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저는 충분히 존중합니다. 그들의 역사는 창조주와 함께 하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민족, 대단한 자긍심을 가질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실 것이고, 어느 민족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신 방법이 ‘Big Bang’ 인지? 어떤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또 창조주가 전체적으로 진화의 방식을 택하셨던, 부분적으로 진화하게 하셨던 제게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UFO 가 있던 없던, 지구 밖에 생명체가 존재하던, 안하던, 저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점점 더 넓은 우주를 발견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점점 더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크리스챤만을 만드셨다고 믿는 사람, 하나님이 평평한 지구를 만드셨고, 해와 달과 별이 지구들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사람, 그 주장에 반대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킨 그들이 범한 어리석음을 우리가 다시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도 크리스챤을 당하지 못합니다. 나만이 진리이고, 나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불쌍한 존재로 보는 크리스챤들이 많습니다. 저는 다른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또 조금 알고 있는 내용이 틀린 것 같다고 생각하여 비판할 생각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지닌 배타성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주변을 보시면 기독교가 지닌 배타성에 질려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불교는 잘못 되었으니 기독교로 오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불교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나, 나는 기독교에서 진리를 발견했는데 와서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 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기독교인 보다 다른 종교인들이 더욱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창세기에는 두가지 창조론이 쓰여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가 다른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고, 첫째날에 낯과 밤을, 둘째날에 하늘을 사이에 두고 하늘 위에 물과 하늘 아래 물을 만드십니다. 셋째날에 하늘 아래 물을 모아서 육지와 바다를 만드십니다. 육지에 채소와 열매 맺는 과일 나무를 만드십니다. 넷째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십니다. 다섯째날에 물에 물고기와 하늘에 새를 만드십니다. 여섯째날에 땅에 육축와 짐승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남녀)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는 땅과 하늘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비도 내리지 않고, 안개만 있는 공허한 상태에서, 초목과 채소 조차 없는 상태에서, 흙을 빚어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만드시고,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가서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동물들의 이름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담이 잠든 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한대 빼내어 여자를 만드십니다.

모세가 왜 두가지 다른 창조의 이야기를 써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 두가지 창조의 스토리가 한가지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거론한 성경에 대한 관점을 창세기의 1장부터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궁금해 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우주 만물과 사람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가?’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누가 만드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만드셨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하나님

천지창조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한국사람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님’은 우리 민족만의 단어 입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이라 불러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유대 민족은 ‘여호와’ 라고 부르고 있고, 그 유명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연히 ‘여호와’ 라고 부를 것이고, 대부분의 영어권 나라들은 ‘God’ 라고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은 한분이십니다.

이분은 누구실까요? 그분의 특성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우주만물을 왜,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떻게 운영하시는지?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다.' 라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라는 특성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실수를 자주 하시고, 하나님이 괴로워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은 창세기 6:6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The Lord was griev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is heart was filled with pain.’ 저는 성경의 이부분이 하나님을 잘못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글 번역은 더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겪으면 마음 아파하시며 바라 보신다고 믿습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가면 바로잡기 위해 벌을 내리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후회하거나, 근심하시지 않으십니다. 나쁜 인간들을 보고 분노하시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행실을 하는 인간들이 받을 벌이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행복해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받게 될 형벌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저 "쯧쯧" 하시며 바라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기준을 가지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신의 자녀와 당신의 자녀가 아닌 사람. 물론 당신의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도 끊임 없는 기회를 주시겠지만, 당신의 자녀에게는 관대하시고, 참으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바라보며 기뻐하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당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시는 분이시지만, 그를 위해 어떤 액션도 하시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위의 모든 사람에게 강권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따르게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시면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섬기시도록 하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이미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냥 놓고 보셔도 충분하실 정도로. 하나님이 실수로 쑤나미로 20만명을 죽이셨을까요? 하나님이 아차하다가 카트리나로, 911로 많은 사람을 죽게, 힘들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실수로 전쟁을 막지 못하셨을까요? 정답은 No!!! 겠지요!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몰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즉 창조주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여러가지 노력들을 합니다. 부르는 호칭이 무엇인지에 관계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만큼 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에 줄을 섰다는 것과 관계 없이 어디에 서있던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은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읽으면서 노력하지 않고, 그저 설교 말씀에서 이목사님, 저목사님, 이사람, 저사람이 하는 말만 들으며 덜 노력한 사람에게는 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덜 알면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손해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혜가 바로 최고의 지식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글을 혹시 읽으시는 분이, 감리교에 서계시던, 장로교에 서계시던, 이단 종교에 서계시던, 천주교에 서계시던, 불교에, 유교에, 유대교에, 회교에 서계시던 모두는 창조주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어떻게 부르던 그 호칭을 잘못 선택했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저는 감리교에서 모태 신앙을 가지고, 40여년간 하나님을 부르며, 성경에서, 기도하는 중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간구했습니다. 가끔은 성경을 통해, 내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깨달으며 성숙해지기도 했고, 가끔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폭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어떤 설교를 듣는 중에 깨달음을 얻기도 했고, 힘들게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가까워질수록 이 세상의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짐을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잘 듣는 자식에게 더 큰 요구를 하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일반적인 것이든, 제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것이던 간에, 명령하시는 것들을 잘 이행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부족한 존재지만, 그래도 제가 깨달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 라는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이를 부정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이 말씀을 믿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더 깊이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개체입니다. 한 개체의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살아계시면서 예수님은 수십차례에 걸쳐 아버지를 부르셨고,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된 능력을 가지셨고,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왜 이 예수님을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다른 종교인들이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니까, 예수님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는지? 어쨌든 모르겠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라는 말씀을 잘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이 한 주체에 붙여진 두개의 이름이라는 말씀은 절대 아니시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시고, 같은 뜻을 가지시고, 같은 목적을 가지시고, 같은 일을 하신다. 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니,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당신이 지금 말하는 것이 당신의 생각이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요?” 라고 의문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명쾌하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고, 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에게 해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김새가 같다는 뜻은 아니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으니,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마찬가지다. 라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라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직접 본인이 하나님과 동체가 아님을 말씀하셨고, 또 능력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이 언제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때와 시는 나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이 지나가는 것이 내 뜻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름을 직접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도대체 왜 기독교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일까요? 셋이 각기 다르고, 다른 기능을 한다고 하면 왜 안되는 것일까요? 이름 자체가 ‘하나님교’ 가 아니라 ‘예수(기독)교’ 이기 때문일까요?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성령이던,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이던, 성령은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의지, 기운 등일 뿐인데, 우리가 이 성령을 하나님인 것처럼 섬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과연 어떤 기분이실까요?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성령님이여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을까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야 십자가가 의미있고, 부활이 의미있기 때문입니다. 신으로 오셔서 인간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가신 것이라면 은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한 명의 뛰어난 인간이라고 하면 또 권위가 떨어져 보일 뿐더러, 인간 한명의 죽음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강조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여건 속에서 저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시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게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저는 예수님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폄하와 비난에 화를 낸적도 많고, 싸우기도 했었지만, 왠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고, 다른 분들께도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해야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며,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던,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예수님을 옹호하기 위해서 말싸움 하는 것은 정말 여러 관점에서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차후 구원에 대한 글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입니다만, 이를 가지고 다른 종교를 윽박지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몸소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과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온 천하만민을 죄로부터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가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깨우치시며,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길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너무도 충분하게…

"예수님은 이 땅위에 천국을 가르치시고, 천국생활을 가르치시고, 또 그것을 몸소 보이시고, 그리고 온천하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이십니다. "


성 령
성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니, 세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만드시면서부터 우리 안에 불어 넣어주신 ‘기운’이고, 둘째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예수님의 ‘힘’ 이고, 셋째는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과 하나님의 사자들 입니다.

어떤 책에서는 예수님 승천 이후에 성령이 사역하신다 라고 쓰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실 때,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쉬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하신 것을 아실 겁니다. 이는 분명히 성령일 것입니다. 또 저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분명히 외부에서 임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성령은 우리를 뜨겁게 태우기도 하고, 어떤 성령은 우리를 촉촉하게 적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를 힘차게 움직이게 만들고, 어떤 때는 우리를 침착하게 생각하게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기도 하고, 우리 밖에 계시기도 합니다. 또 임하시기도 하고, 떠나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자주 경험할수록 우리의 신앙이 성숙된다고 생각됩니다. 성령의 임재도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잘 가꾸고 발전시키는 사람과 잃어버리는 사람, 여러 종류가 있겠지요.

일단 모든 사람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어 주신 생기야 말로 하나님의 기운, 성령인 것입니다. 이는 항상 인간 속에 함께 있습니다. 이 성령이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챤에게나 Non 크리스챤에게나, 구별 없이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양심의 소리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자연의 소리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를 이성의 소리라고도 했습니다. 뭐라고 불리우느냐에 관계 없이 저는 이를 성령의 소리라고 확신하고, 모든 인간에게 항상 외쳐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나, 사자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저는 그들도 성령의 범주안에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고… 혹시 아브라함에게 대접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들, 야곱과 밤새도록 싸운 사자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존재이고, 이들의 능력은 어떨까요? 저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하나님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온 자들, 하나님의 임무를 받고 온 자들, 하나님의 곁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땅에 다녀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들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규정하긴 에매모호하지만 저는 이들을 다 성령으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삼위일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사자들, 천사들까지 합쳐서 사위일체나 오위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일체라고 주장하는 지에 대해 깊게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흔히 은사로, 능력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의 말씀을 하게 하시고, 지식의 말씀을 하게 하시고,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병을 고치게 하시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시고, 예언을 하게 하시고, 영들을 분별하게 하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방언을 통역하게 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 성령의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골고루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사가 가진 기능이자 목적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이것 저것 다 내려주시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게 어떤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다른 사람을 더 유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신중히 생각하고 은사를 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가지 은사만 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야로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가지 은사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말하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사람으로 인해 주변사람이 위의 것을 느끼게 되면,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실한 신자라 하면서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면, 이웃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성령적인 사람이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물론 인간적이란 말은 이상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만 인정을 받고, 사회는 세속적인 것이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세상은 사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큰일 날 생각이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왜 적대시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엔 많은 나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힘든 것입니다. 세상을 극복하는 것과, 피해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 크리스챤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 직원이 있다고 합시다. 이 회사는 잔업도 가끔 있고, 야근도 가끔 있으며, 직원 회식도 자주하는 회사입니다. 교회 모임이 있다고, 잔업을 할 수 없다고 하고 간 사람이 어쩌다가 회식은 참가했다고 하면, 그 직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빠질 수 없는 교회 모임 때문에 잔업을 할 수 없다면,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표하고, 양해를 구한 뒤, 자신의 몫 이상의 부분을 교회 모임 후나 그 다음날 새벽에라도 와서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책임지기 어려운 일, 모두가 힘들어 하는 일에는 교회를 핑계대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으로서의 처신이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또 많이 들리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크리스챤들은 책임감이 약하다, 아니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해도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회개하면 다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들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선한 양심의 소리, 이것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계속 행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고, 스스로 판단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시는 도구입니다. 저도 간혹 습관적으로 “성령이시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본질적인 인간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창조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손으로 빚어지고, 생기가 불어넣어져서 만들어진 그 때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선악을 알게 되고, 생명나무를 빼앗기고, 고생하여야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 바로 그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성경에는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비참한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저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그 이후의 인간에 더 정이 갑니다. 아니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실락원 이후의 인간이라고 확신합니다.

에덴동산의 인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는데, 왜 인간들은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어 놓으셨어?”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원래는 에덴동산에서 완전하게 살도록 해놓으셨는데, 인간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것이지.” 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원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개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거의 완전하게 살아가도록 에덴동산이란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셨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죄(원죄)가 들어왔다. 스스로 자초해서 오늘날과 같은 불완전하고 힘든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죄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항상 죄를 범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원죄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이 가진 죄성은 극복하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원죄를가지고 태어났다고 판단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좁은 길’ 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정의하려면, 하나님이 인간을 왜 만드셨는가? 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보시기에 좋으려고… 사랑하려고… 사랑 받으려고…

하나님이 만드신 본질적 인간은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유혹에도 약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며 바르게, 기쁘게 살 수도 있고, 시기와 질투에 가득차서 남에게 피해를 주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모든 선택은 본인에게 달려 있고, 모든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합니다.


구 원

예수님으로 인해 온천하 만민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이전에는 구원이 없었을까요? 노아를 떠올려 봅니다. 모세를 떠올려 봅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떠올려 봅니다. 욥을 떠올려 봅니다. 다니엘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잘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위인들.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사하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과 마가복음 2장,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중풍병자에게 병을 고쳐주시는 말씀 대신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8장에서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그리고 마가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8장에서 소경 거지 바디메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면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문둥병자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 18장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구원의 약속이지, 예수님 십자가만으로 구원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기준, 파라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기준의 변화가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시는 극적인 요소를 동반한, 이로 인해 인간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함으로 사랑을 배울 수 있게 해주신, 창조 후 최대의 이벤트인 것입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14장6절의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2.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이땅에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어떤 쪽이 더 가까울까요? ‘말미암지 않고’ 라는 표현을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은 ‘구원’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봐도 되겠지요. ‘말미암지 않고는’ 이란 단어를 ‘예수를 믿어야만’ 이라고 해석할 경우, 과연 ‘믿는다’ 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을 따른다.’ 라고 해석하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공관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를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라면, 바울의 글의 관심은 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생각을 담은 주관적인 글이구요. 비슷한 관점에서 요한복음 역시, 교회를 위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해석하고, 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구원이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구원하시지 않을까요?

공관복음에서 제가 만난 ‘믿음’ 이란 단어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 입니다. 아주 구체적이고도 전적인 신뢰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과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굉장히 추상적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다면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과연 예수님에 대해 얼만큼이나 알고, 예수님을 믿고 있겠습니까? 부분적으로만 안다면, 부분적으로만 믿게 될까요? 예수님은 아마도 그의 공생애를 통해 우리가 살면서 당하게 될 모든 국면에 대한 해답을 주셨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꽤 많이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구원은 예수님이 하신 것인데, 왜 목사는 자기가 한 것인냥 그러냐구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사님들이 이와 비슷한 말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구원을 받으라!" 고 말하기도 하지요. 자기의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감동을 주었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죠. 죄로부터의 해방은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이 해야 할 일이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이 해야 할 일이죠.

기독교가 원죄와 자범죄를 구별한 것은 참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죄를 용서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 자범죄는 또다시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십자가가 모든 죄를 다 사한다고 하면 이를 악용해 마음 놓고 죄를 저지를 가능성있는 사람들을 방지하고자 생각해 낸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학설, 주장들을 만들어내는 근거가 참 단순하고도, 유아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 정말로 큰일날 이런 생각이 대부분의 진실을 왜곡, 또는 호도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그 놀라운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1.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2.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축소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래서 저는 구원받으라! 고 외치는 모든 사람을 우습게 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은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죄를 회개한다’ 고 하지 않고, 우리가 ‘잘못한 것을 반성한다’ 고 합니다.


크리스챤
언제부터인가 ‘크리스챤’ 이란 단어가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크리스챤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물론 ‘따른다’ 는 말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순종하며 따른다. 라는 의미인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른다. 라는 의미인지명료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모두다 부담스럽긴 마찬가지 입니다. ‘제자도’ 라고 번역된 유명한 책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같이 지고 죽으란 뜻이라.” 라는 글을 읽게 되면서 그 부담감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즐겨부르던 ‘신자되기 원합니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 가사를 보면 신자가 되는 길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거룩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을 ‘교인’ 이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챤과는 조금 다른 의미인 교인은 작은 노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주일에 가족과 함께 나들이 삼아서 가볍게 다녀만와도 교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노력이 투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와 크리스챤

크리스챤 이란 이름보다 더 부담스런 이름, 그것은 제자(diciples) 입니다. 저는 이 ‘제자’ 가 얼머나 어려운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되라고 한번도 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자 훈련, 제자 훈련… 온통 제자 훈련들을 합니다. 현대는 제자훈련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것 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이 구절이 이방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게 하라! 라는 명령으로 보이는 것은 어쩜입니까? 모든 민족에 제자를 삼으라고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민족에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란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예수님의 제자’ 가 되어야 또다른 ‘예수님의 제자’ 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50년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히 주위를 둘러봐도 제자 비슷한 사람도 볼 수 없는데, 왠 ‘제자훈련’ 시키는 사람도 많고, ‘제자훈련’ 받는 사람도 그렇게 많은지요?

성경공부라는 좋은 이름도 있고,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교육을 할 수도 있지만,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유행처럼 ‘예수님의 제자’ 를 훈련시키겠다고 하니…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 여건을 갖추고, 하버드 의대생을 교육한다고 하는 것과 진배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훈련시키실 수 있는 정도의 문패를 걸고 훈련시키시면 고맙겠습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좁을 길을 걷는 사람들, 제자는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교 회
구약을 보면, 성전이 있고, 회당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 당시에도 교회의 기능은 죄의 용서와 감격,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세상에 대한 깨달음과 교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이후로 교회는 많이 바뀌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직접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대신 지내 줄 제사장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들 대언해 줄 제사장도 없어졌죠! 제사장 대신에, 성도들이 서로 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간증하고, 하나님의 깨달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간에 대접하며, 섬기는 좋은 공동체의 모습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집사를 세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과 만나며 빠른 시간 내에 교회는 망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사건으로만 존재하고, 다시금 제사장이 섰습니다. 사제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은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교는 성령으로 뜨겁게 발전했습니다. 신교의 목사들은 공동체의 리더로 존경받으며, 성도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들이 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스스로 선언하며, 제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 축복권이 있다나요. 목사의 말을 어기면 하나님의 말을 어긴 것이라나요.

목사들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주인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듯이 희생하며,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소망, 사랑과 위로가 넘쳐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교회는 성도가 주인이어야 합니다. 더이상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P.S. 이상에서 제가 주장하는 글들은 여러분들의 고정개념을 깨려고 하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 확대해석한 부분, 과장하거나, 극단적으로 말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을 조금 멈추어 생각하시게 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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