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영화 짐승의 끝? 을 보고

'짐승의 끝'  참 묘한 제목의영화죠? 최근 한달동안 한국영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 다운로드 받아서 집에서 봤죠. 오늘 안보는 척하며 후다닥 본 영화가 바로 '짐승의 끝' 입니다. 중간에 몇부분을 띠엄띠엄 봤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본 미국영화 Devil's Advocate 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사탄을 연상하게하는, 아니 사탄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청년이 한 여자를 선택합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며 변변한 직장 없이 아르바이트 정도의 일을 하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청년은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휘하여 관계를 갖습니다. 여자는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가!" 라고 한마디만 하면 언제든지 없어져 준다고 하는 데에도, 여자는 "가!" 라고 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 여자는 사탄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해산이 가까와지자 어머니가 계시는 강원도 산골로 보이는, 시골집으로, 서울서부터 택시를 타고 가게 됩니다.

이때, 모자를 눌러써서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바로 그 청년이 그 택시에 합승을 합니다. 얼마쯤 가다가 그 청년은 다짜고짜 택시 기사를 향해서 말을 합니다. "아저씨는 털털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야. 얼마 전에 한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와이프와 별거상태에 있지! 그 잘못이란 것이 열여섯살 먹은 여자아이와 원조교제를 한거잖아? 그럼 어때? 남들도 다 하는데, 그리고 아저씨는 평생에 딱 한번 한거잖아?  그런데 문제는 주기로 한 20만원을 주지 않은거야. 여자아이는 돈을 달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했고, 재수 없게 와이프가 그 전화를 받게 된거지. 그리곤 별거에 들어갔어, 딱 한번의 잘못으로 큰 일을 당했지만, 당신의 잘못은 바로 돈을 주지 않은거야!" 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나는 아저씨를 사랑해! 이건 아저씨를 사랑해서 해주는 말이야!"

그리고는 뒷좌석의 여자를 향해 말합니다. "아가씨도 그렇게 살지마! 전단지에 마그네틱을 붙이는 일을 하냐? 그게 돈이 얼마나 된다고, 차라리 편의점 알바를 하는 게 낫지! 남의 눈치 보고, 할말 하지 못하고 살지 말고, 할 얘기는 하면서 살아! 이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잠시 후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거야. 모든 전기가 없어질거고, 차도 핸드폰도 작동하지 않을거야. 충격이 커서 너는 정신을 잃을 지도 몰라. 네가 잘 견딜 수 있어야 할텐데! 이사람 저사람이 와서 뭐라고 하겠지만, 너는 차라리 이 택시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어. 그래 그게 가장 좋겠다. 차안에 있어. 너를 사랑해!"

그러더니 몇 초 후에, 지각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물리적 충격이 있고, 여자는 정신을 잃습니다. 택시기사가 여자를 깨웁니다. 여자는 깨어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만, 택시기사도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차도, 핸드폰도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으니, 가까운 휴게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올테니 기다리라고 하곤 황급히 가버립니다. 영화 속에서 말하려고 하는 변화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는 우연히 워키토키를 발견하는데, 워키토키를 통해서 청년의 음성이 들립니다.뭐라고 표현할까요? '유일한 소리'  뭔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 어두운 세상의 빛과 같은 구원의 소리여서, 이것을 따르는 것이 맞을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소리를 따르지는 못합니다.

부모가 없어져 버린, 초등학교 5학년생이 나오고, 젊은 날라리(?) 커플, 산골에서 거동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정신장애가 있는 듯한, 사냥총을 가진 중년 남자 등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태령휴게소라는 피난처를 찾습니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이 생각하며. 경험과, 지식, 지도와 안내표지판... 모든 것을 동원해서 찾아 헤메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아무도 휴게소에 가지 못합니다. 2km 전방에 태령휴게소라는 확실한 표지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지 못하죠. 그 과정에 기회가 주어지면, 악한 본성이 드러나서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 합니다. 물질욕, 성욕 등등 을 말이죠. 법, 도덕 등의 규범이 흐트러집니다. 사탄인 청년은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죽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 사랑의 한계는 여기까지야!" 청년의 이 소리에 저는 등골이 오싹해 짐을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벌자로 설정된 큰 백곰 같은 짐승에 잡아먹히고, 어떤 사람은 사냥꾼의 총에 죽고, 어떤 사람은 자살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청년이었겠죠. 영화는 여자가 이틀 정도를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택시 옆에서 애를 낳게 되고, 청년이 나타나 자기 애를 빼앗아 안고 사라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탄의 기준. 하나님의 음성과 사탄의 음성.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이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탄은 열여섯살짜리와 원조교제 한 것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을 나무랍니다. 여자를 도와준 중년남자는 여자가 자기에게 성적만족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산골에서 거의 평생 여자를 안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권리가 있고, 여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해주는 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5학년 짜리도 여자에게 음욕을 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둘이 있을 때에 주도권이 초등학생에게로 넘어갑니다. 야구배트를 들고 여자를 위협합니다. 몇번이고 여자를 범하고 싶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도덕적관념이 그를 막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개를 여자가 잡아먹은 것을 알고는 그것에 대한 보상, 벌로 여자를 범합니다. 여자는 물론 자기 태아를 위해서 꼭 고기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개를 잡아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하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탄의 기준을 따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가진 본성과 한계를 잘 알죠! 하나님의 기준은 따르기 힘들기 때문이죠. 작가는 사탄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모든 관념이 붕괴된 세상에서 아무도 '좋은 사람' 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탄의 음성을 들으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영화 속의 사람들처럼, 좋은 사람인척 하고 싶은 본능, 그것만 벗겨지면 그 속에는 사탄에 의해 지배되기 쉬운 우리의 본심이 나옵니다.

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제 판단의 기준, 행위의 기준을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말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나를 참아주실지 ?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 사랑의 한계는 여기까지야!" 


댓글 1개:

Unknown :

제가 댓글을 남기는 지금으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글이네요.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라는 것이 감독이 의도한 메세지도 있지만 관객의 해석 역시 영화에 일조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일배우분을 악, 사탄으로 보셨는데요. 저완 상반되는 감상이었기에 그런 감상도 존재할 수 있겠구나 하고 또 굉장히 흥미로운 글인가 싶습니다. 어쩌면 그게 '짐승의 끝'이란 제목에 잘 어울리기도 하는 것 같네요. 저를 비롯해서 여럿 관객 분들 후기로 극 중 박해일을 사탄이 아닌 신으로 설정된 것이라 보시는데요. 이 신은 일련의 사건으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연옥에 가게 된 인물들을 속 순영을 위한 구세주라고 인식합니다. 이상한 것은 왜 순영만을 구해주느냐.. 연옥 속 인물들은 각자의 삶에서 그리고 연옥에서도 죄를 짓게 되는데요. 그 죄로 인해 말씀해주신 하얀 이빨을 가진 백곰같은 신의 사자를 통해 심판을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신(이라고 하겠습니다)의 대사 중 총을 쥔 사내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며 당신도 잘 살아보려고 그런 것 아니냐고 그럴수도 있다며 오히려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신은 인간 행동의 방관자로 자신의 자녀들을 지켜보다가 연옥에서 사자를 보내어 사랑하는 자녀들이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심판하는 것이죠. 그 중 순영만은 결국 생존하게 되고 가지고 싶은 것 있으면 다 말하라고도 하는데 이는 순영이 끝내 신이 내린 시련을 통과했기에 이런 특혜가 주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백반집에서 모두 힘들게 산다고 하며 결심을 한 듯 노트에 사다리를 만들고 학생의 도움을 받아 사다리타기로 선택된 순영을 구제할 대상으로 선정하고, 자신의 아이를 잉태시킴으로서(구원) 죄인들 사이에서 순영을 구제의 대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 영화 말미에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하죠. 기력도 잃고 지친 산태인 순영이 홀로 길바닥에서 출산까지 하는 말그대로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겨울날 본인도 얼어죽을 지경인데도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준 순영에게 "그러라고 준 담요가 아닌데.. 나는 네가 아이를 지우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순영이 신의 아이를 가진 것부터 시련이 시작되고 순영은 끝내 그 시련에서 결국 자신을 희생해 아이를 구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에 그려지진 않았지만 가지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순영이 연옥을 헤매던 것이 극이 그려지기 이전의 사건으로부터의 꿈이나 혹은 사고현장 같은 곳에서 다시 깨어나게 되고 현실로 돌아가 소원들을 보상 받을 것이라 느끼게 해줍니다. 그렇게 짐승의 끝이란 영화는 기이한 색채를 띄는 가장 값싼 묵시록 속 구세주의 구원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