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5일 일요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33절의 이 말씀은 제가 좋아해서 제 쎌폰의 첫 화면에 오랜동안 들어가 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했기에, 무엇을 구했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을까요? 6장25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먹을 것을 구했을 것이고, 입을 것을 구했을 것이고, 이런 것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목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시면서 저들도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핀 들꽃을 보시면서 저 들꽃도 하나님이 입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영화로왔던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저 들꽃 만큼 입지 못했다고 단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들을 하나님이 기르시고, 하나님이 입히심을 확언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창조하신 너희들 일까보냐?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즉" 그러니까 너희들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너희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너희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너희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든 것을 너희가 얻는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방법은 그런 것들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을 구하면, 다른 것들은 구하지 않아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잘아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걱정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존재가 못되는 것을 아시기에, 먼저 구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구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질문이 있어야겠습니다. 바로 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구하는 것일까?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마친 후에 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땅에서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이 땅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복해서 설명하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려면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義란 무엇일까요? 왜 그냥 '義' 가 아니고 '하나님의 義' 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義가 아닌 다른 어떤 '義' 가 있을까요? 하나님과 대치되는 것이 '세상' 일 수도 있고, '나 자신' 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적인 義, 내가 중심이 되어 판단하는 義, 나를 부각시키는 義 를 쫒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라고 한정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일까요?  라는 질문에 저는 "불의하지 않게 사는 것" 이라고 답하곤 합니다. 저 스스로 '義' 가 무엇인지? 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흔히 '불의' 라고 하면 대단하고 큰 잘못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서 나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단어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불의한 생각을 하고, 자주 불의한 선택을 하고, 가끔은 불의한 행위를 합니다. 본인이 불의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 로마서 3:10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첫단계는 내가 불의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지? 불의한 선택을 하지는 않는지? 를 수시로 생각해서, '불의' 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불의하지 않는 것 정도에서 머무른다면 뭔가 부족함을 느끼실 겁니다. 다음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당연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에서 만큼은 '불의하지 않는 것' 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글을 읽으시는 분께 꼭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의롭게 살지 못할 지언정, 불의하게 살지는 말자!' 그리고 수시로 '오늘 나는 불의하게 살지 않았나?' 를 자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서 시작해 보시죠! 그리고 가끔, 아니 자주 쓰러지더라도 '이게 쉽지 않은 일이네.' 라고 스스로 위로해 가며 끝까지 가보시죠!

쓰고자 했던 내용보다 많이 산만하게 글이 진행되었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시 정리할까 하다가 그냥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세상 것들을 통한 근심과 염려는 없앨 수 없습니다. 다음 절인 6장34절을 보면 오늘 일만 염려하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덧붙이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을 덧붙이시면서 적당히 염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평범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배려가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어떻게 줄여야 하냐면, 불의하게 살지 않았나를 가지고 고민하면 됩니다. 사랑을 베풀었나를 가지고 고민하면 됩니다. 그러면 염려했던 것들이 해결되어지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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