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5일 금요일

넓고 깊은 만남

 하하 ! 제목을 쓰고도 웃음이 나옵니다. 즐거운 웃음이 아니라 쓴 웃음 입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교회 전도사님이 넓고 깊은 만남은 불가능하니, 좁고 깊게를 선택하던지? 넓고 얇게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실 때, "나는 넓고 깊게 사람들을 사귈 수 있어" 라고 자신했었습니다. 

가능한 듯 싶었습니다. 제가 지난 일들을 적다보니, 국민학교 5,6학년 대, 깊은 만남을 가졌던 아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름을 적어보면 "재완이, 기웅이, 정호, 철호, 인선이, 성준이, 영길이, 영국이, 영식이, 두형이, 문모,  구봉이, 수철이, 주희,  성준이, 창석이, 인창이, 득훈이, 철완이..." 이 친구들은 저와 같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절친이구요, 동네에 가면 또 많은 절친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과는 적어도 부모님과 가족을 알고, 애들 집에 몇번 이상은 놀러가고... 누가 봐도 절친 소리를 할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특히 저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예의바르고, 공부 잘하고, 가정 환경도 괜찮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과의 추억, 친구들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한 10년 전에 친구들의 이름을 적다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절친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니? 그러면서 "이건 뭔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와 가까이 살던 재완이네 집에는 이삼십 번은 놀러갔습니다. 재완이네 집 바로 앞에 미니카 트랙 경기장이 있어서, 몇 달을 출근했었습니다. 금호동시장 옆에 사는 기웅이네 집에도 열번 이상은 갔었습니다. 6학년 때 과외를 같이 한 정호는 부부 라고 할 정도로 거의 1년을 붙어다녔습니다. 중부시장에 살던 6학년 때 반장인 철호네 집은 최소 오십번 이상 갔을 거구요. 다리가 불편했던 인선이네집도 자주 놀러갔습니다. 인선이 아버님은 명동에서 유명한 맞춤 양복접을 하셨는데, 저희를 데리고 광나루의 유명한 풍차집과 버더나무 집을 데려가셨습니다. 식당 내에서 나루터 시설이 있었는데, 배를 타고 강 중앙으로 나가서 직접 잡은 매운탕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장어와 모래무지 매운탕이 기억납니다. 양복점은 그다지 크지는 않아 보였는데, 밴즈를 타고 다니셨었습니다. 성준이 아버지는 성함이 기억나진 않는데, 당시 신문에 고바우라는 만화를 연재한 안두섭 씨와 더불어 2대 만화가 중의 한분 이셨습니다. 집이 당시 신민당 당수였던 양일동 씨 집과 붙어있어서, 성준이네 집에 놀러갈 때는 손님과 기자들로 시끌벅쩍 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준이 아버지도 유명세를 꽤 타고 계셨었구요. 창석이네 집은 한남동 이었는데, 당시 고급 택지를 조성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동네였습니다. 단대 건너편에 개천 뒤로 미군 부대가 있었고, 미군 부대에서 두 블럭 쯤 떨어진 큼직한 양옥집 이었습니다. 갈 때 마다 미제 과자와 쵸콜렛 등을 주셨었습니다. 늘씬하고 잘생기기도 했지만 창석이는 옷을 아주 잘입는 아이였습니다. 인창이네 집은 말죽거리였는데, 인근에서 최대의 지주셨습니다. 인창이네  땅을 가로질러 경부고속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인창이네서 놀 때는 경부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강남 개발로 대단한 부자가 되었을텐데, 어떻게 지낼까 궁금한 친구입니다. 영길이는 5학년 때 하교길을 같이 했던 친구입니다. 신당동의 2층 양옥집에 살았는데, 그림을 아주 잘그렸습니다. 5학년 때, 세계 어린이 미술대회에 참가해서 2등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영길이 보다 조금 더 그림을 잘그리던 친ㄴ구가 영국이 입니다. 신당동에 살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6학년 2학기 때 면목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면목 7동의 작은 집이었는데, 이삿짐도 같이 날랐고, 먼거리 인데도 세네번 쯤 놀러갔었습니다. 영식이와 두형이는 집도 가깝고 몇년 간을 단짝으로 지낸 친구였는데, 이 둘과 아주 가까이 지냈습니다. 영식이네 집은 한국에서 제일 큰 나염공장을 했습니다. 서울 운동장에 애드벌룬에 달려 나부끼는 태극기가 영식이네 작품이었습니다. 집은 당시의 주상복합 건물이었습니다. 1층은 공장과 사무실이 있었고, 2층은 가정집이었습니다 길고 큰 일제시대 적산가옥 이었습니다. 두형이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셨는데, 사업적으로 영식이네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구봉이와 수철이는 드물게 성수동에서 장충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수철이네 집은 카센터를 했습니다. 한양대를 지나서 성동교를 건너면 경마장으로 들어가는 길의 오른쪽에 카센터가 세곳 붙어있었습니다. 그 중에 첫번째 집이 수철이네 집이었습니다. 사실 카센터 라야 주로 하는 일은 타이어를 때우고 바꿔주는 일을 했습니다. 작고 통통한 몸매의 수철이는 축구를 정말 잘해서 별명이 펠레 였습니다. 우리 학교와 성수동 인근에서 소문이 났었습니다. 수철이와 단짝인 구봉이는 수철이네 집을 지나서 10분 정도 더 가야하는 성수동 안동네에 살았는데, 가정 형편이 정말 안좋았었습니다. 학교에서 두번째로 키가 컸고, 달리기를 아주 잘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구봉이가 달리기를 잘한다는 것을 알게해 준 사람이 저 일수도 있습니다. 나이도 우리 보다 세살이나 많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던 학교의 독보적인 짱인 상철이를 어떻게든 꺽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봉이가 달리기로 상철이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 질러야 겨우 8~90 미터 정도였는데, 미리 한달 정도 구봉이에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는것을 연습시키고, 상철이에게 도전장을 냈습니다. 배구부 코치 조기탁 선생님이 심판을 보고, 6학년 아이들이 거의 다 나와서 지켜보는 가운데, 결전을 치뤘고, 결과는 구봉이의 압승이었습니다. 상철이는 자존심이 상해서 어쩔줄 몰라했고, 저는 드디어 상철이에게 흠집을 한번 내 것에 대해 쾌재를 불렀습니다. 극민학교 6학년 때 보고 못봤던 구봉이를 대학교에 가서 만났습니다. 구봉이는 달리기를 특기로 해서 럭비부에 들게 되었고, 특기생으로 고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잘 풀려서 당시 모든 럭비선수들의 로망인 한전 럭비팀에 들어갔고, 선수생활을 마치고 한전 직원으로 편안하게 근무했습니다. 철완이는 3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던 아주 가까운 친구입니다. 꽤 유명한 영화배우 엄마를 둔 철완이는 아버지 없이 엄마와 살았고, 피아노를 잘치고, 여자 아이들과 정말 잘 노는 친구였습니다. 철완이 엄마가 운영하는 퇴계로의 카페에도 같이 가보고 잘지냈는데, 6학년 때 갑자기 저를 떠났습니다. 3년 동안 저와의 관계가 수동적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로 진학해서 검도부에 들어갔는데, 주로 껄렁걸렁한 아이들이 주를 이루었던 검도부에서 주장이었던 용태란 아이롸 같이 안좋은 길을 걸었습니다. 6학년 때 제 마누라라고 하고 지냈던 정호도 검도부에 들어가서, 저는 정호가 워낙 싸움도 잘하고 반듯한 아이여서, 정호가 검도부의 주장이 되면 좋겠다고 기대를 했었는데, 용태라는 아이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기가 쎄고, 친한 아이들이 있는 관계로 정호는 밀려났고, 검도부는 양아치 부서가 되었습니다. 철완이는 이때부터 눈빛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르는데 철완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주희는 천재 소리를 듣던 친구였습니다. 압도적으로 전교 1등을 항상 했었습니다. 부모님은 신설동에 있던 노벨 극장과 붙어있는 광명식당 을 운영하고 계셨고, 주희 가족은 그 식당 2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루에 십분도 안하면서도 자신만만했던 저는 주희에게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너랑 나랑 똑같은 시간을 공부하면 내가 너보다 시험을 잘볼 수 있으니, 한달만 같이 공부해보자!" 내기는 성립이 되어서 학교 끝나면 같이 주희네 집으로 가서 8~9시 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달 뒤에 시험을 봤는데, 주희가 1등하고 제가 2등을 했습니다. 저는 주희에게 내기 걸었던 50원을 주면서 "앞으로 나랑 같이 살면서 공부는 네가 해라 ! 나는 다른 것 할테니"  이건 제 본심이었고,정말로 공부는 모든 사람에게 들키기 부끄러울 만큼 안했습니다. 주희는 한양중학교 때도 천재 소리를 들었고, 수재들이 모이는 우신고등학교에서도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안타깝게 군대에 가서 자살로 삶을 마쳤습니다. 무슨 이유로 자살했는지는 모르지만, 주희를 아는 친구들은 천재여서 자살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득훈이는 이름처럼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상철이가 휘젓는 배구부에서도 상철이가 함부로 하지 않을 정도로 반듯하고 든든하고, 힘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득훈이 부모님은 동대문 로타리, 해밀턴 호텔과 반대편에 있는 길 다방 이라는 아주 큰 다방을 했고, 다방 뒷쪽에 정원이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길 다방인 이유는 득훈이네 성이 길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국민학교 때 같이 놀러다니지는 않았지만 인수와 혁진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수는 아마 5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을 했는데, 저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피아노를 잘치고, 지휘도 잘했습니다. 부유한 가저어에서 넉넉하다는 느낌이 드는, 다재다능한 아이였는데, 인수가 대학생이고 하나 있는 남동생이 고등학생 일 때, 부모님이 동시에 차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이후로 인수는 민감한 나이의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대학생 가장이었습니다. 대학에서도 합창반의 리더였었는데, 졸업 후에 한번 쯤 만났고, 이후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혁진이는 언제나 눈에 뛰는 아이였습니다. 하얀 얼굴에 엄청 귀여우면서 당찬, 어렸을 때 '하모니카 할아버지 이해창' 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TV  에 자주 소개되는 유명한 분이셨는데, TV 에 출연할 때는 혁진이를 데리고 함께 출연하셨습니다. 하모니카 소년 이었죠! 혁진이는 국민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가끔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정말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친구였습니다. 항상 반장이었고... 얼마나 노력하는 아이였냐 하면, 고등학교 때 체력장에서 전종목 만점을 받은 유일한 아이 입니다. 타고난 자질도 있어야 겠지만, 만점을 받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서 받은 만점인 것을 저는 압니다. 대학교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영어를 잘하는 편이어서 (주)대우에 들어가서 조금 인정을 받긴 했는데, 타고난 기운을 그 푸르름을 살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나의 친구 관계는 훨씬 더 넓어지고, 다양해 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첫날 담임 선생님이 쪽지를 나눠주며, 자기 이름 쓰지 말고,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한명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를 부르셨습니다. "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싶다." 고 하셨습니다. 제 이름이 7명에게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교직생활 중에 3명이 최고였는데, 7명은 충격적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저를 썼을 지에 대해 전혀 찍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에 대한 저의 반응은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고등학교 때 인생을 같이 할 것 같던 친구들이 6~7명은 됩니다. 졸업 후에도 십년 정도는 가끔 만나며,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대학교 때는 훨씬 더 많은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아마 이때 제일 친한 친구 적으라면 최소 10명 이상은 제 이름을 적었을 것이고, 제일 친한 선배 적으라고 해도 제 이름이 스무명은 넘게 나왔을 겁니다. 대학교 동창 7명과 사업을 시작했을 정도로 넓고 깊은 만남을 가졌었습니다. 제가 아파트 중도금 3천만원을 써버리고, 어떻게 할까 하다가, 친구 서른 명에게 전화해서 각 1백만원 씩 빌려달라고 해서 이틀 만에 3천만원을 만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친해서 만이 아니라, 이들이 저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80년대 후반에 한국에 Amway 가 처음으로 진출할 때, 호주에서 오신 제 친한 후배의 이모가 대졸자 30명만 모아주면 꽤 큰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배가 자기 이모님께 이 형은 내일 200명도 모을 수 있다고 했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면서 한국과 모든 연락을 끊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지금 제 곁에는 친구가 별로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나이에 이 여건에는 친구 보다는 동역자가 더 필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친구와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 그 이후에 그들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뭔가 잘못됐다!"  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친구를 바꿔가면서 사귀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흔히 하듯이, 좀더 여건이 좋은 친구 만나면 옮겨가는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들의 마음은 어떤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저는 또 그들과 절친이 될겁니다. 평균 3개월 간 신나게 놀면서, 그리고 또 다른 절친을 만들겁니다. 새로운 절친을 만들었을 때, 이전 절친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장 관리' 했어야 했을까요? 지금이라면 쎌폰, 이메일, 페이스북 등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그 당시에는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워낙 넓게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에 내가 그랬었던 것은 정상이었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국에 와서 친구가 없다고 하지만, 급하게 미국에 오면서, LA 와 뉴욕 중에 어느 곳으로 올까 하면서 고민할 때, LA 에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절친 2명과 대학교 때 절친 후배 한명이 살고 있었고, 뉴욕에는 중학교 때 절친, 중고등학교 때 절친, 그리고 대학교 때 절친이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에 자리잡자 엘에이에 있는 친구들은 섭섭함을 심하게 표시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친구, 선후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렸을 때 절친 한 명을 더 만나게 되었고, 가까이에 고등학교 동기동창 열명이 살고 있어서 수시로 만나곤 합니다. 친구가 별로 없다고 말하면, 욕을 먹을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겠지만 저는 친구를 사귈 때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에도 그랬지만,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이 많았던 사업 실패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뭔가 잘못됐다 !! 로 시작했는데, 쓰면서 "크게 잘못한 것은 없다!" 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생각하고,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많은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돌아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나는 헤어진 것일까? 저는 어떤 친구도 끊어내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저는 위에 열거한 모든 친구들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고 만난다면 정말 반갑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노는 데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으면 넓고 깊은 만남을 통해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장충국민학교 친구들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이외에 내가 절친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절친이라 생각했을 친구, 후배, 선배들의 이름을 써보려 합니다. 인창동의 원중이, 문모, 재건이, 승제,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2년간 살았던 오금동의 대희, 용혁이, 재붕이, 영종이, 태규, 혁이, 귀진이, 성웅이, 진홍이, 치범이, 학호동 교회의 병철이, 화림이, 한욱이, 병용이형, 종걸이형, 후천이형, 창학이형, 현철이형, 성진이형, 영준이, 기남이, 장문이, 영석이, 흥식이, 순목이, 우식이, 상철이, 선기, 기재, 범보, 원필이, 명수, 중학교 때, 승준이, 영일이, 상열이, 지선이, 연진이, 태윤이, 태석이, 봉구, 용생이, 승호, 수복이, 경현이, 환진이,  고등학교 때, 현상이, 정환이, 준철이, 휘석이, 창규, 정배, 진식이, 병렬이, 청우, 응이, 종천이, 규철이, 휘일이, 철웅이, 성국이, 상훈이, 창훈이, 선태, 경익이, 종철이,  세현이, 희섭이, 엽이, 현우, 기호형, 성근이형, 후배 주호, 만규, 강원이, 희승이, 대학교 때, 남익이, 덕규, 벙훈이, 찬용이. 동진이. 상한이형, 석성이형, 기표, 동만이, 병렬이형, 찬호형, 치호형, 갑수형, 동현이형, 형곤이, 의민이, 호, 준경이, 응영이, 세철이, 용일이, 경호, 광석이, 웅수, 철이, 만이, 호석이, 재형이, 승환이, 승용이, 홍렬이,  현돈이, 한성진이, 재주, 영운이, 재성이, 한승이, 경수, 성태, 준서, 교희, 준덕이, 범석이, 종혁이, 태엽이, 영준이, 황성진이, 형종이, 경익이, 상규, 동현이, 상백이,  경렬이, 인태, 이정호, 효곤이,  준성이, 명렬이, 세윤이, 경하, 상현이, 상수, 우영이, 재구, 그리고 미국에 와서 익성이, 김형규 권사님, 김옥성 장로님, 최관호 장로님, 성민이... 이 외에도 여자 친구, 선후배 들이 있습니다. 주로 교회와 대학에서 만난 사이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척들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이들에게 제가 가장 친한 친구, 선배, 후배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이들 중 아마 90% 이상은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이번 생을 마칠 겁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셨을까? 나는 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았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내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미치는 것을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대학교 때부터 "너는 참 대단한 놈이야."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주로 선배들에게서죠. 젊었을 때의 목표처럼, 정치가로 성공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하던 사업이 소문 날 정도로 성공했었다면... 저의 성공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별로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 것으로 보일 확률이 많았을 겁니다. 고 3 때 제가 놀았던(?)  독서실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예비고사를 얼마 앞두고,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었던지?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너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다구요. 공부를 안하는 데도 성적이 나쁘지 않고, 친구도 많고, 돈도 많고... 이 친구와 저는 같은 대학에 가서 2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같이 CPA 시험을 봤습니다. 이 친구는 CPA 가 되었고, 저는 포기했습니다. 잘하면 붙을 실력이 되었던 4학년 때 시험을 얼마 앞두고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 가능하면 같이 붙여주세요. 그리고 한명만 붙는다면 이 친구가 붙게 해 주세요." 제 기도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사업이 힘들고 있을 시절에 CPA 로 잘나가는 이 친구를 몇번 만났었습니다. 이 친구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친구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위에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때도 이 친구는 열심히 공부했고, 저는 열심히 놀았습니다. 같이 붙었다면, 같이 성공했다면? 이 친구는 계속 제게 하소연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저의 사업의 실패로 저와 아주 가까운 열명 정도는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 친구, 선후배는 서른 명 정도 되었구요. 그래도 위에 이름이 나열된 친구, 선후배들은 저의 사업 실패에 마음 아파했을 겁니다. 저를 잘 알고, 저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면서도 저를 절친이라고 생각지 않는 많은 친구, 선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제 실패가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저는 저를 돌아보는 자조적인 글을 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뭔가 유익이 되는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첫째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는 수동적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라도 친구를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딱 그만큼 좋은 관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주위에서 '친구' 를 주제로한 수많은 글들을 보내옵니다. 가끔은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신경도 쓰이게 하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친구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전부인 그런 자세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지금부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친구를 만들어 나가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공교롭게 지금이 딱 한갑 이네요.  가족과 여행을 하는 중에 이 글을 쓰고 있구요.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실 시간까지 친구를 회복하고, 친구를 만들어가기 위해,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이 글은 정리하지 않고 게재하려 합니다. 친구들을 생각하다 보니, 제 지난 삶을 전반적으로 돌아고베 되고, 해야 할 일이 떠오르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눈이 안좋아져서 오타도 많고, 늘 부족한 글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담겨졌다고 믿으면서.

이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친구들에 대해 돌아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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