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부자와 나사로

 요즘 누가복음을 가능하면 깊이 보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번역들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복음 1619-31절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한 부자가 있고,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습니다. 이 둘이 다 죽었는데, 왜 인지는 모르지만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으로 갔고, 부자는 "죽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우리가 말하는 천국의 삶을 삽니다. 

이 둘이 이런 차별된 삶을 살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 tormentum ) 을 받느니라." 참으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이 땅에서 부유하게 살면 지옥에 가고, 거지로 구걸하며 고생스럽게  살면 천국에 간다니 말입니다. 애써 이유를 찾는다면 이 부자가 매일 잔치를 베풀며 살면서, 자기 집 앞에 누워 구걸하며 사는 거지를 박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아는 나사로에게 남은 밥 한그릇 정도는 내어다 줄 수도 있을텐데,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부스러기를 먹게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사로는 일을 할 수 있음에도 거지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거동할 수 없어서 누워서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이렇게 애써 우리의 삶과 이 부자의 삶에 선을 그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으니, 너는 여기서 고통을 받으리라." 라는 말씀은 우리를 여전히 곤혹스럽게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극과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짐하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더라도 '자색 옷과 고운 베옷' 을 입고  살지는 말아야 겠다. 맛있는 음식 먹으려고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겠다. 내 주위에 나사로와 같이 힘들게 사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줘야겠다. 

사업을 하던, 직장 생활을 하던 돈이 막 들어오는 시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년에 몇백만불씩 돈이 들어오는데, 벤틀리도 사고, 훼라리도 사고, 레인지로버도 사게 되겠죠? 에르메스던 샤넬이던 예쁜 것 있으면 사고, 값 비싼 시계도 몇 개씩 사게 될 겁니다. 옷은 맞춰서 입게 될 거구요. 맛있는 음식 같이 먹으러 다닐 친구들도 만들겠죠? 이왕이면 격이 맞는 사람들로 해서요. 그러면서 선교헌금도 많이 하고, 좋은 일에 기부도 많이 할 겁니다. 사람들에게 점점 대우도 받게 되겠죠. 자식들도 금수저, 은수저로서 살 것이고, 부러움을 받는 장로님 가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것이 최선일까요?

어느 젊은 연애인 부부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젊어서부터 아주 큰 돈을 벌게되었는데, 세상 다른 사람들과는 결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부부의 이야기를요. 처음에는 "얘들 뭐지?" 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는데, 지금은 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이들을 위한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세상 이지만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 꿑까지 이들의 미담만 듣고 싶고, 저보다 많이 젊으니, 제가 이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미담을 들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고 싶습니다. 물론 부러워하면서요. 어떻게 젊은 친구들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저들의 부모는 어떻게 저들을 키웠을까? 모든 사람에게 오랜 동안 도전을 주는 부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후반부의 말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부자가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특별한 기회를 주실까?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는 것을. 공의의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에게 똑같은 해해를 주시고 악인에게도 똑같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은혜의 기회를, 깨달을의 기회를, 은사를 발견하고, 행할 기회를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사모하며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과 큰 관계는 없지만,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성경의 번역에 대해 또 한번 간단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서 성경의 번역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16장24절을 보면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해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고통받나이다 라고 해야 할텐데 말이죠. 제가 알기로는 원문은 라틴어로 tormentum 이고 이 단어는 고문, 고통이란 뜻입니다. 고민이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7장4절도 많이 쓰는 구절인데, "만일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경계'는 참 애매합니다. 제가 알기로 원문은 라틴어로 increpa 인데, 이것은 꾸짓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견책하고, 권고하고, 바로 잡고로 번역되어야 맞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말고 꾸짓어서 바로 잡으라고 하신 말씀인데, 경계하라고 번역하면 조심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이죠.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해석이 된 겁니다.  '회개하면'도 영어의  repent 를 습관적으로 회개로 번역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원어의 뜻은 후회하면, 돌이키면의 뜻이니, ' 용서를 구하면' 으로 번역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은 자유롭게 번역되고, 해석하면서 진리와 은혜를 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거축한 책이어서 손도 못대게 하던 시절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자우롭게 보고, 번역하고, 해석하고, 토론하게 된지가 벌써 5백년도 엄었는데, 아직도 하나님이 직접 쓰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고, 세상 끝날 까지 한 절도 없어지지 않을 책으로 하나님 대하듯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희 세대가 처음 대한 영어 성경은 King James Version 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 책을 위주로 봅니다.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초에 ㅈ[ㅇ;ㅁㅅ, 1세가 47명의 최고 권위자들에게 성경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전문가들이었을 것이고, 신학자, 성직자들을 포함했을 겁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이들을 세 곳에 모아 번역을 하게 했습니다. 국가의 예산으로 6년간 번역하여 KJV 가 탄생했습니다. 정확한 의도는 모르지만 제임스 1세의 이 업적은 정말 대단한 것이고, 후대의 많은 크리스찬에게 큰 은혜가 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우리의 성서 번역은 처음에는 개인이 중국어 성경을 번역하면서 시작되었죠. 누구는 누가복음을, 누구는 마가복음을, 그리고 요한복음을 번역했습니다. 이후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도움으로 성경 이라고 할만한 번역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아는 개역한글, 개역개정, 표준새변역을 거치면서  우리의 성경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단어, 그 구절,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또 학자들 간에는 누구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시면 개역개정 성경의 편집에 참여한 학자와 표준새번역의 편집에 참여한 학자들간의 싸움을 신문지상에서 보셨을 겁니다. 서로 간에 번역에 수백개의 오루가 있다고 하며 오랜동안 논쟁을 했죠.  아마 지금 누군가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다면, 아주 쉽게 원서에 가깝게 번역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구글의 도움을 받아서요. 이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오루가 없으시지만, 성경은 오루가 있습니다. 일반 신도들도, 신학생도 의문을 제기해도 됩니다. 

저는 성경 구절을 보고, 설교를 준비하면, KJV 를 보고, 거기에 나온 구절을 구글 번역기에서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물론 그리스어로 하는 것이 좋겠지만, 알파벳이 다르고 읽지 목하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고 라틴어로 봅니다. 성경을 보면서 뭔가 불확실하게 느꼈던 많은 의문들이 해소됩니다. 

성경에 대해 이렇게 사족을 다는 이유는 제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번역이 어땠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을 자유로이 읽고, 자유럽게 해석하고,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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