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요일

헌금으로부터의 자유

누가복음을 가지고 설교를 계속하다 보니,  21장1~4절에 나오는 과부위 옆전 두 렙돈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어떤 가난한 과부의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이 구절을 보면서 몇가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헌금함이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헌금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유대인들이 성전을 방문하면서 하는 이 헌금은 아마도 성전이 만들어지면서 부터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과 같이 주일 예배에 드리는 헌금은 4세기 경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 같구요. 우리 나라에서도 사찰 앞에 헌금함이 놓여있죠. 

또 한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과부지만 엽전 두 렙돈이 과연 생활비 전부일까? 하는 것입니다. 렙돈은 예수님 당시의 로마 화폐 단위인데, 일용직 근로자의 하루 일당인 데나리온은 16  앗사리온이고, 한 앗사리온은 4 고드란트, 그리고 한 고드란트는 2 렙돈이니, 한 렙돈은 1/128 데나리온이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렙돈은 달라와 거의 같은 수준입니다. 아무리 과부라고 하더라도 하루를 일하면, 보통 노동자들의 절반인 64 렙돈은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 두 렙돈이 생할비 전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 놓고 가는 것이 좋겠는데요, 저는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란 겁니다. 

헌금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헌금을 드릴까요? 그리고 어떻게 헌금을 드려야 할까요?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헌금은 한 주간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헌금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감사헌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인들에게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감사헌금에 명목을 붙였습니다.  특별한 절기 마다 감사하게 했습니다. 성탄 감사, 추수 감사, 부활절 감사, 맥추 감사 , 첫주 감사... 그리고 개인에게 생일 이던 어떤 날이던 감사헌금을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슈가 되는 십일조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권사나 안수 집사, 장로가 되기 위해선 십일조 헌금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가지 명목으로 기부를 하게 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교회 차량을 위해서, 피아노를 구입하기 위해... 그리고 급기야는 어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면 이런 헌금의 홍수 속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던, 절이던, 어떤 단체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의 자금을 만드느냐에 대해서는 명분도 있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평가할 때, 교인 숫자 이외에 주간 헌금액이 교회의 규모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교회는 돈이 필요하고, 성도들에게는 더 많은 감사를 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긍정적이죠?

제가 의문을 갖는 부분은 십일조 입니다. 유대 민족이 생업에 종사 안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을 위해 세금 형식으로 낸 십일조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와, 현재는 개신교들에 의해 강조되어 지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이 십일조를 가지고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었습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요? 아주 오래전에 어떤 목사님이 직장인이 월급을 받았을 때, 세금을 포함한 봉급에서 십일조를 하느냐? 아니면 세금을 제외하고 실제로 수령하는 금액에서 십일조를 해야하냐 라는 질문에 "그로스로 축복 받고 싶으면 그로스에서, 네트로 축복받고 싶으면 네트에서 계산하라." 고 하시더군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이 목사님의 의도는 그로스 금액에서 십일조 하라는 것일 겁니다. 실제 생활에서 보면 그로스에서 십일조를 냈다면, 나중에 받게 될 소셜 씨큐리티에 대한 십일조를 이미 낸 셈일텐데, 그럼 이걸 받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소셜을 받으면 또 연말에 소셜에 대한 세금을 냅니다. 정확히 계산한다면 소셜을 매달 받으면서, 거기에서 나중에 나가게 될 세금을 뗀 부분에 대해 십일조를 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또, 보너스를 받을 때나, 회사에서 꽤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줄 때는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조금은 고민일 겁니다. 

그나마 봉급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십일조를 계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경우 십일조의 계산은 참 힘든 부분입니다. 전 인구의 70%가  농사로 먹고 살던 1950~60 년대에 교회들은 농민들에게 십일조를 어떻게 내라고 했을까요? 1년 농사지어 수확한 돈에서 십일조를 내고 나머지 1년 간은 십일조 없이 지내라고 했을까요? 사실 농산물을 판 돈은 수익이 아니라, 수입 입니다. 거기에는 작은 부분이지만, 씨앗, 비료, 농약 등의 원가가 들어가 있습니다. 일군을 써서 인건비가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수확한 대금의 십분의 일은 사실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전체 매출에 대한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십일조를 거의 해보지 않았습니다. 봉급생활을 이년도 채 하지 못한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봉급생활을 할 때도 십일조를 계산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후로 30여년 간 사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익을 남긴 시절 보다는 손해를 봐서 돈을 빌려서 회사를 유지하던 시절이 훨씬 길었습니다. 집에 생활비를 못준 시절도 많았고, 생할비를 조금 내놓더라도, 빚을 얻어서 내놓은 것이 많았습니다. 30대 중반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셔서, 그 주에 한번 찾아뵙고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득고 목사님은 "김 집사는 십일조 안하는 것이 정상이겠네." 하시더군요. 저는 지나가는 소리로 십일조 못하는 것이 정상인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천주교회는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정말 헌금생활을 잘하신 분인데, 평생 십일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벌어들인 모든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놓으셨습니다. 그 돈으로 교회에는 한달에 정한 금액의 헌금을 하셨고, 때때로 감사헌금을 하셨고, 기독교 기관에 기부를 하셨습니다. 해외 선교에도 많이 참여하셨습니다. 집에 한시도 붙어있지 않는 저에게도 틈만 나면 기부금을 전달하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꽤 많은 곳에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아마도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서 장로가 되신 아주 드문 분이실 겁니다. 저희 어머니는 십일조 보다, 월에 얼마를 헌금할 수 있는지 계획해서 매년 초에 금액을 정하여 월정 헌금을 하거나, 주정 헌금을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안하는 분들은 죄의식을 가지실 것이고, 십일조를 하시지만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죄의식을 느끼실 겁니다. 물론 십일조를 안하시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십일조는 제대로 한다고 해서 자부심을 느낄 이유도 없는 헌금이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안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비교적 입이 무거우신 분들이 재정부에서 봉사하시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뒷이야기는 흘러 나옵니다. 누구는 그렇게 잘살면서 십일조를 그만큼 뿐이 안한다거나, 누구는 권사면서도 십일조를 안한다거나... 저는 십일조라는 헌금 제도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의 헌금 수입은 줄어들 겁니다. 교회가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목사님들이 좀 청빈하게 살면 어떻습니까? 목사들이 가난하면 능력있는 사람들이 목사 지원을 안한다구요?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목사의 길을 택한 사람이 제대로 된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삯꾼 목자 '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래서 사도 바울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는  교회나 선교를 위해서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주로 나옵니다. 주로 그런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물론 선교나 교회의 유지에 돈이 필요하겠죠? 돈이 있어야 선교할 수 있을까요? 돈이 많으면 선교가 더 잘될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바울은 헌금을 강조하는 현대 교회의 목사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어려분은 헌금이 마태 복음 6:20~21 의 말씀가 같이 보물을 하늘 창고에 쌓아 두는 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보물은 헌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바로 그 이전 말씀인, 네 금식과 선행을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은밀하게 행해야 너희 선행이 하늘에 보물로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21절의 말씀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말씀이 헌금을 하면, 그 물질에 하늘에 쌓이고, 그러면 네 마음도 하늘로 간다라는 말씀이 아니겠죠? 네 마음을 세상에서 인정받고, 과시하는 곳에 두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 라는 말씀일 겁니다. 

헌금은 감사의 예물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헌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면죄부의 유래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중세 교회는 신도들의 봉사와 전도가 의무화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을 정해서 함께 모여서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을 했는데,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물질로라도 참여할 길을 열어놓은 것이 안타깝게도 나중에 면제부로 변질된 겁니다. 헌금 이외에 물질로 하나님의 사업(?)을 돕는 일에 대해 찬성합니다. 많은 교회가 하는 하나님의 사업이 안타깝게도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어서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우리 삶을 드리는데, 그 드리는 것이 크게 시간, 재능, 물질인 것이죠. 시간도 충분히 드리고, 물질도  충분히 드리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우리는 드릴 수 있기에, 누구도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물질이 더 귀하게 인정받을지, 시간이 더 귀하게 인정받을지 누구도 모르는 일일 겁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겠죠. 세상에 알려지는 선행이 하늘에 쌓이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헌금(Offering) 과 기부(Donation)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드리면 다 헌금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선교를 후원할 경우, 비행기표를 사서 주면 후원이 되고, 비행기표를 살 돈을 교회에 내면 선교헌금이 됩니다. 저는 목사가 교회에서 돈 이야기를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시간으로, 물질로 동참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강조해야 합니다. 단지 그것이 교회를 위하는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음향과 영상을 좋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 교회 건물을 증축하기 위해... 그래야 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더 많은 교인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더 좋은 음향이 더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는 선교나 구제에 작은 돈을 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큰 교회를 만들어서 큰 돈을 구제나 선교에 써야겠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십억을 쓰고, 백억을 쓰고, 결국은 천억을 쓰는 교회 까지 나오게 되었죠.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겁니다. 


몇달을 썼다 지우고 했습니다. 자꾸 기성 교회를 비난하게 되서... 그래서 정리가 덜 되었지만 이 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크게 다음 세가지를 주장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헌금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삼가자는 겁니다. 내가 한 헌금이던, 남이 한 헌금이던 간에. 헌금 많이 한다고 간증한 수많은 분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아주 맣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기독교 기업이라고 떠들어 대다가, 망신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헌금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슬픕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과부의 엽전 두 렙돈은 지금의 2달러 정도인데, 이것은 절대로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가 될 수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 이란 것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할 뿐, 정작 이로운 것이 없습니다. 이를 대체해서, 자기 스스로 한 주에 얼마 를 헌금 할지? 또는 한 달에 얼마 할지? 를 정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쓰지 말고, 헌금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하나님 만이 아시는 헌금이 되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헌금과 기부는 가능하면 분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부는 가능하면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작은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더 많은 지정된 기부금으로 세상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헌금으로부터 자유함으로 더 많은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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