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5일 토요일

아나니야와 삽비라

사도행전 4장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앞에 내어놓습니다. 사도들은 그 재물을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어 가난한 사람이 한명도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꿈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서 4장의 마지막 절은 이를 증거라도 하듯 레위족인 요셉이 땅을 팔아 바친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왜 요셉 한사람의 이름만 거명이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기도하고, 반면에 시험에 빠지게도 하는 절묘함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이름은 5장1절부터 나옵니다. 이 부부는 그들의 땅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기로 작정하고 땅을 팝니다. 그리고는 판 값 전체를 바치지 않고, 얼마간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바칩니다. 남편인 아나니야에게 베드로는 다짜고짜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네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고 호통을 쳤고, 아나니야는 그자리에 엎드러져 죽습니다. 잠시 후에 부인인 삽비라가 들어오자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고 묻습니다. 삽비라는 고민을 했겠지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남편과 말을 맞추기로 했을테니 당연히 그렇게 말했겠죠. 그러자 베드로는 네가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며 호통을 쳤고, 이에 삽비라도 그자리에 엎드러져 죽습니다. 이러자 이를 보고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저는 여기서 몇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당시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유를 팔아서 바쳤을까?
둘째, 소유를 팔아 바친 사람들 중에 아나니야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 값 전부를 바쳤을까?
셋째, 베드로 앞에서 말한 것이 아나니야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고, 삽비라가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한 것일까?
넷째, 그들이 과연 죽을 만큼 잘못한 것일까?

첫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소유를 팔아 바친 사람이 절반은 넘지 않을 것이다. 입니다. 4장36절에 요셉이란 사람이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바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렇게 바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질문에 대한 제 대답도 첫째에 대한 답과 비슷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일부는 제하고 바쳤을 것이다 입니다. 소유를 팔면 꼭 전액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를 다 바쳤고, 본인들만 일부를 바친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베드로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베드로에게 거짓말한 것이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고, 주의 영을 속인 것이라고 판단내려서는 안된다 입니다. 심지어 성경 상에 보면 아나니야는 대답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이 세가지의 답을 통해서 보면 아나니야 부부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바치는 힘든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고, 다소간 고민을 했겠지만 그다지 큰 죄의식 없이 일부를 떼어놓고 바쳤을 겁니다. 삽비라가 거짓으로 대답한 것도 부부간에 그렇게 말하기로 입을 맞췄다면 일단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겁니다. 만약 베드로가 심각하게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된다고 전제하며 다시 물었다면 그들은 급한 일이 있어서 일부를 떼어놓았고, 거의 전부를 바친 것이라고 대답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다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라고 판단해도 좋을 상황에서, 더우기 아쉬운 것은 베드로는 그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도 용서받은 베드로임을 감안하면 너무 가혹하고 불공정한 처사입니다.

따라서 네번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그들은 죽을만큼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죽음을 당했을까요?

제가 성경을 통해서 찾아낸 유일한 이유는 5장4절의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입니다. 소유를 팔아 바치면서의 그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내가 가진 것 얼마 되진 않지만 바칩니다." 는 마음이었다면 좋았겠죠? 아마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봐주길 바라며 "제 전부를 바칩니다!" 하고 바쳤을 것 같습니다. 4장에 나온 요셉의 이름처럼, 자신들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며, 교회에서 인정을 받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이유,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성경의 사건들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합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잘생각해 보면 너무도 두려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은 부끄러운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기로 결심한 것 처럼,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 지키며 경건하게 살겠다." 고 결심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다지 경건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많은 사정과 이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소유를 판 대금에서 일부를 떼어놓은 것은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갚아야 할 빚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 땅을 통해서 먹고 살았던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다지 경건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나 사람들 앞에 경건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려 합니다. 아나니야 부부가 품었던 마음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헌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금만 봉사해도 생색을 내려하고, 헌금 조금 많이 한 것 같으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심각하게 말하면 우리들의 이런 마음이 다 죽음에 이를 마음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소유를 팔아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작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작정한 우리는 이제 두려워할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 그리고 물질을 어떻게 바쳐야 할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바쳐야 할지? 를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니 지난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다 바치지 않았습니다. 다 바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바치는 우리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바치던, 재능을 바치던, 물질을 바치던 간에 "이것 밖에 바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는 마음이어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남들에게 과시해서도 안되겠고,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듯한 두려운 마음으로...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