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7일 화요일

종교가 없으신 분,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신 분을 위한 글 (3)


6.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

보통 종교가 없는 사람은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세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 창조주나 신들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존재에 대해 가치를 두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혀 타당치 않은 생각임을 있습니다. 창조주가 없고, 세상을 운영하는 그의 매카니즘이 없고, 내세나 윤회가 없다면, 우리가 우연히 땅에 태어나고, 아슬아슬하게 살다가 언제? ? 이유도 없이 우연히 죽어 없어진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욕을 먹고 살던, 남을 도우며 살던, 부정하게 살던, 정의롭게 살던 ... 그냥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없어진다면, 인생은 허망하고, 세상은 위태로울 것입니다.  태어나서 아무 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어려서 삶을 마치기도 합니다. 자살을 해도, 남을 위해 목숨을 버려도,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실수로, 재수 없어서 죽어도 모든 것은 끝입니다. 너무나 허무하고 불공평하고 가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반대로 종교가 있는 사람은 대부분 안에 있는 영혼이 불멸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육신이 죽어 없어진 후에도 나는, 영혼은 어딘 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을 저세상이라고 부르던 본향 이라고 부르던, 하늘 나라라고 부르던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세상에서의 삶을 심판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가진 사람은 땅에서 좀더 선하게,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물론 종교인 입네 하면서 겉으로는 경건한 하고 속으로는 나쁜 생각을 품고, 남이 안보는 곳에서 나쁜 짓을 삼는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거짓말 하겠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데에 창조주를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종교인들은 이것이 창조주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이런 말들을 없습니다. 최근에도 많은 캐톨릭 신부들이 아동 성학대 음란물을 가지고 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잘못한다고 해서, 종교의 가치가 부정되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종교가 없으신 분들이 종교가 있는 분들을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무시된다고 생각할 있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가 있다고 하지만 신의 뜻을 정확하게, 세세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성경이나 경전, 기도나 묵상을 통해서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인간의 의지로 신의 뜻을 판단할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 사이에서도 분쟁과 대립이 있고, 종교가 다른 집단 들간에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교회 내에서, 절에서 파벌 간에 싸움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싸움은 신의 뜻을 빙자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일 것입니다. 누구도 신의 뜻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신의 뜻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행하는 것이 종교인 입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자성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인간 이란 존재를 단순히 육체와 본능, 감정 만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이런 분들은 거의 없으실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의 삶이 육체적 본능과 욕망 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차이가 없이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 따라서 살면 된다고, 남들이 하는 만큼 하며 살면 된다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말은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말로 들립니다. 양심에 조금 거리끼지만,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따라 행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반대로 그것이 자기의 이익에 반하면 '사람이 그렇게 살면 되나' 라고 하면서 자기의 주관을 내세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 따라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세계 4 성인 중에서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삶을 살펴봅니다. 이분들은 삶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깊이 사색을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분들은 인간에게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있다고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분들은 종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순간 순간 간섭하는 창조주를 외면했던 것이죠. 어쩌면 이분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말년은 방향을 잃고 좌절하는 가운데 끝이 납니다. 공자에 대해 잘모르지만 그의 말씀 중에 '50세에 知天命 하고, 60세에는 耳順 하고, 70세에는 從心所欲不踰矩 '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들어있는 논어 라는 책이 공자 본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쓴 책이므로 진위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공자가 스스로 자신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육십에 세상 이치가 거슬리지 않았고, 칠십에는 자기의 욕망을 따라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만약 공자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위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 같은 성인이라면 자기가 이미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이었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말년에 많은 갈등을 하며 삶을 마쳤을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그의 제자 플라톤의 글을 통해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을 현혹한다고 해서 옥중에서 사약을 받아 삶을 마친 소크라테스와 자기의 능력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한탄하며 삶을 마친 플라톤의 삶에 대해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느꼈을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신들의 생각과 세상은 다르게 돌아갔고, 심지어 인정 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스승 소크라테스 보다 더 많은 무력감 속에 삶을 마쳤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그 가르침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이 깨닫고 가르친 내용들은 동서양의 사상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말 한대로,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온전히 살지 못함에 대해 늘 자책하며, 가책을 느끼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가 매 순간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삶 속에서 창조주의 간섭을 인정했더라면 이들로 인해 세상이 훨씬 더 좋아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이 그의 글이고, 기독교가 그의 사상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그 바울은 플라톤이나 공자 같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리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니라" "내가 몸을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라." "나는 하루에도 수십번 쓰러진다."" 안에 명의 내가  싸운다." 바울의 이런 고백은 정말 인간적이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몸에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이 자신의 죄인 됨을,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석가모니는 일찍이 힌두교를 접하고, 세상과 창조주의 관계를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 네팔 왕국의 왕자로서의 권세를 버리고 이세상에서 자기의 할 일을 깨닫고, 충실하게 깨달은 바대로 살고, 가르치고,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교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어느 한 부분도 흠잡을 데 없는 만점 짜리의 삶을 살고 갔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고 보겠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왔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남다른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그는 그가 세상에 온 목적대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기적을 보이고,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삶을 마칩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하늘나라로 옮겨갑니다. 믿던 안믿던 관계 없이 창조주가 운영하는 세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이천년 동안 이세상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에 대해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종교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가치있게 하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겁니다. 첫째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창조주를 느끼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살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모르겠고, 험하고, 외롭습니다.  둘째는 삶의 목적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우관계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운 입입니다. 삶의 환경이 다르고, 동질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화합하기 위해선, 인내와 희생 그리고 리더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진리를 깨달아가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대한 것도 이중 하나일 있겠습니다. 전에는 막연하던 것들을 하나 하나 알게 되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없는 즐거움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80% 이상이 종교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느끼시겠지만 저는 크리스챤 입니다. 모태신앙을 가졌지만, 제가 신실한 크리스챤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이후로 47 동안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삶의 모습은 마음과는 다르게 별로 모범적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를 통해, 성경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도 정확히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새로운 하나님과 섭리를 발견하기에 조심스럽습니다.  하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야 어떻게 함부로 거론하겠습니까? 많은 영화들이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희화화하는 것을 봅니다. '밀양' 이란 영화를 보고는 흥분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화도 나지 않습니다. 종교 생활을 저런 각도에서, 저런 관점에서 표현하면 우습고,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보이겠네 하며 넘깁니다.  실제로는 아마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무시를 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가끔은 다른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이단 이라던지, 잘못 되었다 든지 하는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알아도 비판하지 말아야 입장이 종교를 가진 사람인데, 수박 겉핥기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종교인은 실제로는 '자기만의 종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혀 다를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모두 다른 하나님을, 예수님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섬기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의 섬기는 모습도 다를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서로간에 자기의 신앙관과 자기의 교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아마도 그들은 공간에서 함께 신앙생활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대로 종교라면 이렇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먼저 섬김의 대상이 확실히 있어야 하는데, 대상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여야 합니다. 둘째로 함께 있는 검중된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구별되는 지침,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의 경전과 교리, 생활 지침이 속한 사회나 국가의 제도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누구도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의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하려 합니다. 어쩌다가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때도 "너나 잘하세요!" 라는 말을 마음 속에 새기며 참습니다. 남을 비난하는 대신에 내가 섬기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세상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제대로 종교인은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운영하시는 창조주와 일대일로 만납니다. 창조주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길 원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창조주와 함께 하는 인간은 더이상 지구상 70억분의 1 숫자가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인 것입니다. 

 머리는 나로 하여금 창조주를 부정하게 있지만, 안의 영은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의  존재와 그의 섭리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특별히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창조주를 인지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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