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세상의 메카니즘
불교나 힌두교 같은
종교, 그리고 그리스
사상이나 유교
사상은 모두
윤회의 바탕에서
세상이 운영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윤회사상은 남아
있고, 따라서 기독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슬람교에도 윤회사상이
들어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4세기에 황제의 명으로
기독교 내에서
윤회적 요소를
제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 이란 단어는
윤회적 바탕에
의하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영생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하늘나라에
가면 누구나
영원히 거기서
산다는 것이
기독교인데, 왜 특별히 '영생' 이란 개념이 나올
이유가 있을까요? 또 '본향' 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가 거기서
왔다가 거기로
돌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다시
오기로 한
엘리야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세례 요한이라고
대답합니다. 유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의 질문이나
제자들의 대답에서
분명하게 윤회적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면서, 자기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분명히 윤회의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의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저세상이나
전생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세기에 기독교에
접합되어 발전한
영지주의자들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기독교의 발전에 꽤
기여한 바가
있다고 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했던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 윤회설을
인정했습니다. 영지주의의 대표적
문파 중
하나인 바실레우스파의
창시자 바실레우스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이
받는 벌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들지
못한 인간이
윤회의 사슬에
의해서 다시
세상에 오는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실레우스가 벌
이라고 한
것이 다시금
기회를 받은
감사인 것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내의
윤회적 요소에
대해서 말하다
보면 한가지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금과옥조 처럼
여기는 정통교리
중에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의
36항과 84항에 '금생 (in this life)'과 '오는 생'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 표현에
윤회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정통이라고 여기는
교리 안에
왜 이
표현이 들어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진실은 가리워지지
않는다." 라고요. 기독교가 윤회를
전면 부정하고, 윤회적 요소를 인위적으로
없앤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거의
모든 고등종교는
인간의 삶이
윤회한다고 확신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한번 저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실
필요는 있을 겁니다. 제가 저세상에 대해 말씀 드리는 모든 내용은 당연히 저의 추론일 뿐입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세상에 갔다 왔다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은
너무 추상적이었고, 불교에서 말하는 몇 가지 극락과 수십 가지의 지옥은 구체적이긴 하지만, 너무 심판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사상 속의 저세상과
흰두교의 저세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봤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공감이 안가는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감히 제가 이런 고등종교의 저세상 보다
더 잘 그려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추론을 하는 이유는 제 추론이 단 몇 분에게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세상은 이럴 것이니 이세상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악착같이 잘살도록 동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오면서 우리가 선택했던 또는 주어졌던 간에 영혼이 깃들었던 육체가 숨을 거두면, 우리의 영과 혼은 육체와
그 육체에 속한 백(魄)과 결별하고
저세상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아마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상이
주어질 겁니다. 어떤 모습일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를 아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을
가질 겁니다. 늙은 모습으로
있을지? 젊은 모습으로
있을지? 건강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있을지? 초췌한 모습으로 있을지? 는 우리의 삶에
대한 심판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의 50대 때 모습이
그립고, 저와 제
와이프는 30대 때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저희 자식들이
저세상에 올
때는 저희가 50대 쯤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구요. 만약 이세상을 떠나는
시점의 모습
대로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닐 겁니다. 저는 저세상에서도 나이가
먹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측하건대 저세상에서 사는 시간이
이세상에서 사는
시간의 2배 쯤
될 것으로
봅니다. 만약 5배나 10배 쯤
된다면 너무
많은 가족
관계가 이루어져서
혼란을 가져올
겁니다. 이세상 보다 2배 쯤은 되야
세상과의 인연을
지속할 수도
있겠구요. 그래서 평균 150년 정도 저세상에
머문다면, 이세상에선
3대 쯤
같이 산다면, 저세상에선 4~5대 쯤이 같이
산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이나, 조손간을 제외한다면
저세상에서도 특별한
연관이 없이
살아갈 겁니다. 저세상에서 내려지는 심판의
결과에 따라
자기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원하는 만큼
보지 못하고
살 확률도
꽤 높을
것 같습니다. 지옥과 같이 극도로
자유가 제한된
삶을 살아야
할 경우에는
더 그럴
것입니다.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경우에
이세상의 인연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생을 살면서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가
겹쳐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생에서 은인이, 어떤 생에서는 원수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직전
생에서 잘한
짓, 못한 짓들은
이미 모두
드러나서 그것으로
인해 처벌을
받고 있으니까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까지 더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도 괴롭힌
사람의 그
괴롭힘으로 인해, 저세상에서 자신이 상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은인이 될 겁니다. 거꾸로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 준
부인으로 인해
편하게 산
남편은 벌을
받고,부인을 상을
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죠.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은
제 아들의
이세상 삶은
단 하루
만에 끝이났지만, 그 후 2년
뒤에 태아난
제 아들로
다시 이세상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저희 가족에겐
큰 슬픔이었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제
아들에게는 큰
일은 아니었겠죠. 저희 가족에게는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화가 아니라
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세상을 짧게
살다 가는
사람도 있고, 오랫 동안 살다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팔자에
따라 살다
갑니다. 아주 적은
비율의 사람들이
팔자를 따르지
못하거나, 팔자를 극복해서
팔자와 다른
삶을 살다가
갑니다. 이세상에 오면서
짧은 삶을
선택한 사람도, 긴 삶을 선택한
사람도 다
의도한 바가
있었을 겁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지만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금수저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흙수저로
태어납니다. 태어난 자리를
지키며 살다
가는 사람도
있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도 하고, 패가망신을 하기도 합니다. 돈 이란 것은
벌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다고 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좋은 외모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혐오스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명이 되어질
겁니다. 창조주의 매카니즘은
절대 공평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이죠.
저세상에는 밥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설거지 하는
사람, 빨래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히
먹고 사는
사람도 있겠죠? 건물을 짓는 사람, 집을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도 만들어야
하구요. 식당도 있고, 식품점도 있어야 하죠. 당연히 농사도 짓고, 농장도 있습니다. 공장도 있어야
합니다. 술집도 있을
것이고, 대접하는 접대부도
있을 겁니다. 경찰도 있을 것이고, 군인도 있을 겁니다. 범죄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인간의 욕망을 단속하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이세상에 있는
노동의 종류
보다 더
많은 종류의
노동이 존재할
겁니다. 이세상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상한 생각을
할 수
없고, 겉과 속이
다르게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이세상에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이
정당하지 않게
얻어진 것일
수도 있어서, 마음 졸이며 남의
눈치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세상에서는 자신이 누리는
것이 완벽하게
정당한 것이므로
눈치를 볼
것도, 마음 졸일
것도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이세상에서는 고생을
하면 그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세상에서는 완벽하게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처벌이기 때문에
하소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저세상의
삶도 끝이
있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평가에
따라서 다시
살게 될
이세상의 삶에
대한 선택지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미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선택을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을
고려해볼 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
오면서 간절히
기원할 겁니다. "제발 이 선택의
이유를 깨달아서
목적을 이루길!" 재물을 멋있게 버리는, 권력을 멋있게 포기함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부자를, 권력자를 선택했었는데, 거의 모두가
그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
가려 하겠죠? 버리지 못하고
뺏길 수도
있을 겁니다. 아주 가난한 곳에서
시작하면, 평범하게 사는
것 까지만
해도 성공이므로, 아주 가난한 곳을
선택했는데, 이세상에 와서는
내 인생은
왜 이러냐고
한탄만 하다가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가 만든
이세상은 단순히
저세상을 준비하는
시험장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이세상을 사랑하시고, 사람들이 이세상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저세상이 본향이고, 이세상은 그저
저세상을 위해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세상의 삶에
더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세상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이, 이세상에서 어떦게
살았느냐에 대한
판단으로 주어진
삶을 살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지옥, 또는 지옥에
가까운 삶을
사실 것이고, 어떤 분들은 천국, 또는 천국에 가까운
삶을 사실
겁니다. 저세상에서
몇 % 정도의 사람들이
만족을 느끼며
살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2/3 이상의 사람들이 간절히
세상에 나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으려
할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생활과 선택할
수 없는
생활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세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을 수도
있고, 아주 가끔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이 주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식물인간이나
뇌사 상태가
아니라면 선택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도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양로원에서 봉사하며, 하실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항상 말합니다. 인생 역전은 막판일수록
짜릿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이분들이 무엇을
하실 수
있을까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주변 분들에게
양보할 수
있습니다. 일하시는 분들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싸우고 연락 않고
지낸 친구에게
전화해서 화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지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전화해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원수 지간이어서
만나기 무서우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손들에게 좋은
유언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남겨놓은
돈이 있으면
어려운 이웃이나, 못사는 나라 사람들을
위해 쓸
수도 있습니다. 양로원에 있으니 겁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뭣이든지 다 할
수 있죠! 젊었을 때야 먹고
사는 걱정, 애들 공부시킬 걱정, 시집 장가 보낼
걱정, 노후 걱정 ... 끝이 없었지만, 이제는 들어오는
연금 모아서
자식들에게 남겨
줄 생각하지
말고 다
쓰시라고 권합니다. 돌아가셨는데, 통장에 돈 몇백불, 몇천불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 줄
아시냐고 몰아붙입니다. 이세상에서 맺혔던 모든
것을 풀고, 내 전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저세상에
온다면 그것은
일종의 인생역전일
것입니다.
이세상의 또다른 기능
중 하나는
혼이 변화하는
겁니다. 인성, 성품이 변하는
것이죠. 어떤 분들은
사람이 변하겠냐고
하시는데, 저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로 예를 들면, 저는 37살까지는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싸움을 포함해서, 어떤 것에서도 거의
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7살에 어떤
계기가 있은
후부터 변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이긴 것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지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것이
지는 것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이후로는
정말 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조건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지는 일은 생각한
것보다 월씬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질 때도
힘이 들고, 이길 수 있는데
질 경우에도
힘들더군요. 물론 지금도
주장이 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싸움이
된다고 할
경우는 무조건
집니다. 다른 분이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크게
변했다고 확신합니다. 이렇듯 이세상은 변할
기회도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 변할
수록 저세상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낮추고, 배려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천국이 왜 천국이냐
하면 천국
갈만한 사람끼리
모여 사니까
천국이라구요. 이세상에서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힘든 일을
많이 겪을
수록 더
자기만 생각하게
되고,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시련이 클
수록 더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핑계댈 수
없습니다. 그 어려움이, 그 시련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그럴 것입니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늘
귀는 우리가
꿰매는 데에
쓰는 바늘의
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꿈도
꾸지 못할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을 보면, 바늘 귀라는 아주
작은 문이 있는데, 이문은 높이도
낮고, 폭도 좁아서, 나귀가 서서는 들어올
수 없고, 옆에 짐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답니다. 따라서
낙타는 이
문으로 통행을
하지 않습니다. 바늘 귀란 바로
이 문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 도와달라고
왔다가 상처를
받은 사람, 부자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가
상처를 받은
사람, 부자를 위해서
일하다가 상처를
받은 사람, 관계도 별로 없는데
멀리서 보고
욕하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이 가진
돈의 10% 를 남을
위해 써야
복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재산이 백만불 있는
사람은 십만불을
쓰고도 구십만불이
남으니까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고, 재산이 5천불 밖에
없는 사람은
오백불을 쓰기
불안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왠만해선 백만불
가진 사람은
십만불을 내놓지
못합니다. 오천불 가진
사람이 오백불을
내놓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10% 도 이런데, 만약 가진
돈을 전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돈을 많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돈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줘서 저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면 돈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재능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특출하게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안해도 늘
백점을 받는
아이가 있다면, 이 아이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아시듯
머리만 가지고는
한계에 다다릅니다. 중고등학교 때 한계를
느낀 사람은
다행이고, 대학에 가면서
한계를 느낀
사람은 대학에서
열심히 해서
기회를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늦게 한계를
느낀 사람은
노력해 볼
기회를 잡아보지도
못하고 좌절할
확률이 높습니다. 공부를 위한 노력, 훈련, 자세들이 어려서부터 만들어
졌어야 하는데, 머리가 좋은 것과, 노력은 반비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노력은 어려서
훈련이 되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서는 시작하기
아주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려서 머리가
좋아서 친구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잘난 척을 해서
상처를 주고, 잘난 척을 하지
않아도 경쟁하는
아이들이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나이
들어 좌절하기
쉽다면 머리가
좋은 것은
축복이 아니고
재앙일 수
있습니다. 운동에 대한
재능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스타들은
각별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모두가 아는
스타가 되려면
어느 정도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야 겠지만, 오히려 재능 보다는
노력의 비중이
더 큰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다면
태어날 때, 재능을 많이 가진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세상 삶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세상을 얼만큼
아름답게 만들었는가에
있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이세상에서는
안보일 수도
있지만, 결과에 대한
것은 인간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의도와
과정이 중요합니다. 조건 없이 선한
일을 행하되, 가능하면 남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어떤 선행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지는
이미 많은
종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시면
될 겁니다. 모든 종교가 공히, 안보이는 곳에서 선행을
베풀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가 다
이세상에서 인정받으면
그 선행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선행을 하기도
어려운데, 그 선행을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까지 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선행을
하고, 자기가 그
선행을 자랑하지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 베푼
선행은 자칫하면
베풀고 화가
될 수
있으므로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겁니다. 이세상의 삶에서
성공하는 길은
최대한 선행을
베풀고, 최대한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세상에서 내 삶이
어떤 자리에
놓여질지? 에 대해
우리는 걱정해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청소하기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왜
청소하기가 이렇게
싫을까?' 혹시 싫은
일이라고 남에게
다 미루고
살다가 저세상에
가서 청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실제로 저는
설거지 하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열심히 설거지를
했습니다. 설거지가 직업이
아닌 사람
중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설거지를
했습니다. 아마 저세상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설거지는
안하고 살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세상에서 성적으로 무분별하게
산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을까요? 남을 성적으로
모욕하고, 학대하고, 폭행하고 산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저지른
것의 수백배 , 수천배로 돌려받으며 살게
될겁니다. 무분별하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도, 힘이나 권력으로
남을 억누르고, 모욕을 준 사람도
모두 수백배로
돌려받을 겁니다. 이와는 반대로 욕심과
욕구를 잘
참고, 힘을 가지고도
남을 배려하며
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받을
벌 보다
훨씬 큰
비례의 보상을
받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기는 정말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을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단을
위해서 삽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과정에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말로,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을
깍아내리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세상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보다
처벌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게 구성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불교에서 극락은
몇 가지
밖에 없고, 지옥이 그렇게 많은
것이겠죠?
심판 때에, 정확한 처벌과
보상이 있을
것이란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저세상에서
이런 처벌과
보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세상에서 나쁜
짓 엄청나게
하고, 저세상에 와서
심판관 앞에
섰는데, 심판관이 그
사실을 모르거나, 나쁜 짓 한
것을 별로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큰
벌을 받을까봐
마음 졸이며
겁을 잔뜩
먹고 있었는데, 이런 판결이 내려진다면, 기뻐하면서도 화를 낼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훨씬
더 즐길
수 있었는데,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있어!" 그러면서 생각하겠죠? 다음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마음 껏
나쁜 짓
하다 오리라고
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 졌겠습니까? 아마 제가 설계를
하더라도 이렇게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하물며 우주만물을
만들 정도의
창조주가 세상을
어수룩하게 운영하시겠습니까? 우리는 1% 의
의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속에서 영이
계속해서 주장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저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이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성현들이
그들의 삶으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간곡하게
권합니다. 저세상이 없다면
이세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우리는
우리 속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창조주의 매카니즘을 이해하는
데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과
사탄 입니다. 귀신은 이세상 삶을
끝낸 혼
또는 혼과
영이 어떤
이유로 인해
이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를 떠난
혼은 살아있는
사람의 혼과는
교류할 수
없지만, 영과 백과는
어느 정도의
교류가 가능하고, 이세상에 머물러 있는
다른 혼과는
자유롭게 교류할
겁니다. 하지만 귀신이란
존재가 대단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혼이 간절이 원해서
이세상을 떠나지
못한 경우가
있을 것이고, 이세상에 적당 숫자의
귀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남겨진 귀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남겨진 혼이 49일을 머물다 가는지, 아니면 3대에 해당하는 60년을
머물다 가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분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혼이 다
머물다 가는
것은 아니고, 거의 모든 혼은
육체를 떠나서
곧바로 저세상으로
옮겨 갑니다. 원이나 한에 의해
스스로 남은
혼은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있길 원하겠지만, 기간의 한계는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이나 한을
풀고 갈
확률도 많지는
않다고 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겁이
워낙 많아서인지
귀신을 많이
보고, 경험했습니다. 겁이 나서
도망을 간
적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때는 귀신을
쫓기도 했습니다. 나이 먹은 지금도
가끔 섬찍한
느낌이 들고, 으스스 겁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귀신이
제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제게
나타날 일은
없겠다 생각하기에
잊고 살고
있습니다. 믿던 안믿던
이세상에는 꽤
많은 귀신이
존재합니다. 그럼 귀신의
기능은 무엇일까, 왜 창조주는
이세상에 귀신이
있게 한
것일까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도 역시 근거가
없는 추론입니다. 이세상에 남겨진 혼은
육체가 완전히
소멸되기 까지
육체에 깃들어
있는 백(魄) 과 연계가
끊이지 않아서 시신이 편안하지 못하면, 그 불편함이 자손들의 백에 연계되어 자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혼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백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혼은 자손들에게 싸인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묘자리를 잘 써야 한다든지, 명당 이라든지 하는 말이 나올 겁니다. 원한을 가진 귀신이 한을
풀려고 이세상에 남아있다고 한다면, 남에게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귀신이 존재하는 주요한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이 나를 지켜보실 것이라는 것,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을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가지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 자칫 잘못하면 내 혼이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것은 아닐까 하여 잘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등의 이유가 있겠습니다. 귀신은 창조주의 메카니즘에서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조금 다릅니다. 사탄은 귀신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사탄 역시 창조주의 피조물입니다. 사탄은 창조주의 매카니즘에 있어서 주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창조주의
도구로 존재하며, 창조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뿐입니다. 사탄의 주요 기능은 이세상에서 인간이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로는 교묘하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이번 세상을 포기하게 합니다. 사탄이 가진 힘은, 의심, 미혹, 유혹, 시기, 절망, 공포 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탄은 또 귀신들을 많이 이용하곤 합니다. 인간이 사탄을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주의 메카니즘 속에서 사탄의 힘은 어떤 확실한 제한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제한은 사탄은 물리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뺐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탄으로 인해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고, 무서워서 도망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져서
먹지 말아야 할 약을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각기 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중이지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모든 죽음은 자신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내 죽음은 나와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집니다. 죽을 사람만
죽습니다. 창조주의 실수로 죽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도 남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킨 사람도 있습니다. 911 때도 죽은 2,500 명은 대부분이 다른 사람을 먼저 탈출시키고 죽음을 당했을 겁니다. 물론
건물이 그렇게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건물이 무너진 뒤에 이들을 구조하다가
죽은 400 여명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모든 죽음은 단지 숫자이거나,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죽음은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 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우연히, 재수 없어서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이세상은 시험장 입니다. 문제가 없으면, 장애물이 없으면 어찌 시험장이라고 하겠습니까? 사탄은 이 장애물
입니다. 창조주는 사탄을 활용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립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탄에 의해 휘둘립니다. 사탄이
내게 나타난다! 생각만 해도 겁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에게 수시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미혹하고, 헛된 미련을
갖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너무 잘알고, 큰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당하는 사람이 사탄에 대해 인지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면 사탄은 떠나갑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탄이 나를 미혹하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가만히 놔둬도 실패할 사람에게 사탄이 나타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내게 뭔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내 삶이, 내가 가는 방향이
사탄이 방해를 할 정도는 된다는 것이겠습니다. 사탄 ! 이세상을
살면서 만나지 않으면 좋을 존재지만, 혹시라도 내 삶이 사탄이 건드릴 필요 조차 느끼지 않는 실패로
향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꾸로 매일 아침, 사탄과 싸울 것을 선포합니다. "오늘은 내가 이기리라!" 고 다짐합니다. 열번 싸워서 아홉번을 져도 저는 매일
이 싸움을 합니다. 이 싸움을 하는 한 사탄은 저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하루를 충실히 살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내 머리는 나로
하여금 창조주를 부정하게
할 수 있지만, 내 안의 영은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의 존재와
그의 섭리를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특별히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창조주를 인지할
수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