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일 일요일

애통하는 자는...

마태복음 5장에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설교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금식기도 하신 후에, 사탄의 시험을 넘기시고, 그제서야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처음으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물질이 가난한 자는 어떤 자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아마도 물질을 애타게 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란, 영적인 것을 애타게 추구하는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거룩한 것, 신령한 것, 영적인 것을 애타게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두려운 것은 이 말씀 속에,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있을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두가지를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힘든 복이 아닌가 합니다. ‘애통하는 자’ 란 슬피우는 자, 괴로워 하는자, 어려워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애통하는 자’ 의 반대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기뻐하는 자’ ‘행복한 자’ ‘즐거워하는 자’ 등이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진다면, 이와 반대인 기쁘고, 즐거운 자에게는 무엇이 주어질까요? 떠오르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애통하는 자’ 의 또 다른 반대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바로 ‘화내는 자’ ‘분노하는 자’ ‘남을 공격하는 자’ 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주어진 처지를 가지고, 상대방이나,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하거나, 공격하는 자가 되지 말고,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울며, 괴로워하며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애통’ 입니다. 그리고 이 애통은 ‘사랑의 또다른 중요한 표현’ 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중고등부에서 제가 가르치는 반 아이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인생을 계획할 때, 너희들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으로만 점철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애통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라. 그러니 살아가면서 괴롭고, 힘들고, 슬픈 시간이 올 때, 그 속에서, 그 슬픔 속에서 소망을 볼 수 있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너희들이 삶을 설계할 때, 가능하면 모든 부분에서 애통할 수 있게 설계하길 바란다!" 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삶을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국면에서 기회가 있습니다. 어려서 복잡하고,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에 불만을 느끼고 화를 내며 살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화를 내는 대신에, 애통을 택할 수 있습니다. 엄마에게 야단을 계속적으로 심하게 맞으면, 반발심이 생기고 분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분노를 극복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아마도 애통하는 마음이 될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화나게 할 때도, 화난 마음을 억누르고 그 친구를 위해서 기도해 ㅂ십시요! 아마도 애통하는 마음이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이고, 자식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애통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땅에서 애통하면서, 모든 잘못된 상황을 내 탓으로 돌리고, 그 가운데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하늘 나라를 바라 볼 수 있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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