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3일 화요일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세상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금과옥조와 같은 성경구절인 ‘요한복음 3장16절’ 에 대해 조금만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구절에서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세상’이고,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한 이유도 ‘세상’ 을 사랑하셔서 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나’ 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우리는 ‘세상’ 이 곧 ‘나’를 가르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듣고, 배우고, 믿고, 말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혹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잘 살펴봐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17절에서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일까요?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고,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냐하면, 박해를 받고 지하에 숨어서 복음을 전하는 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믿어! 그러면 혹시 우리가 잡혀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멸망이 아니고, 영생을 얻는 것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도 하구요. 결론적으로 요한의 관심사는 박해받고 숨어살아야 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내세에서의 영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차이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요한이 기대한 것처럼 3장16절을 받아들이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3장16절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의도보다는 글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고, 또 우리가 기독교의 오랜 발전 속에서 깨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거룩한 교회의 대립개념인 ‘세속’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내세’까지 포함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폭넓게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말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개념과 비교해서 별로 즐겁지가 않지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니고, 내 영혼을 온 천하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온 천하’ 를 위해 이땅에 오셔서 못박히신 것이라니…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아마도 사망, 즉 ‘죄’ 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지옥에 갈 사람을 천국에 갈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천국과 지옥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생각하시던 바와 같이, 아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천국이 존재했겠습니까? 예수님 이전에도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퍼센테이지 였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예수님 이전에도 천국은 있었을 것이니, 당연히 예수님 이전에도 구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이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을 의미합니다. 그리로 우리는 이것을 두가지로 요약하여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을 바꾼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기쁨과 소망으로 살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이 판단의 기준과, 죄의 그늘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심도있게 다룰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이정도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 땅에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핵심이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짓는 죄로 인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한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법’ 아래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 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구도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어떻게 보면 ‘죄책감’ ‘양심의 가책’ 으로부터의 구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혜택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사람들은 다음의 세부류로 나뉠 것입니다. 첫째, 죄를 짓고 자신이 지은 죄가 자꾸 떠올라서, 이를 자책하며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사는 사람. 둘째, 죄를 짓고 가책은 되지만 스스로 용서하며 뻔뻔하게, 당당하게 삶을 사는 사람. 셋째, 거의 죄를 짓지 않으며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사람.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길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을 첫째 부류의 사람과 셋째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시지만, 결국은 구원의 혜택은 받을 사람이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 없이 환경만 있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환경 속에서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환경을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놀라운 세상에서 내가 살고 있습니다. 햇빛과 달빛은 내게도 비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구원의 혜택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태풍을 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비를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경제위기가 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경제위기를 끝내실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세상을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 놓고 세상을 즐기며 살 수도 있고, 세상을 알고 살 수도 있으며, 세상을 의미있게 살 수도 있고, 세상의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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