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4일 금요일

평범과 비범 1

나는 근본적으로 비범하게 살고 싶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쓰고자 하는 비범이란 단어는 예수님의 표현에서 ‘좁은 길’ 에 가깝다. 넓은 길, 대부분이 맞다고, 아니 맞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절대로 비범한 사람이 아니다. 비범 근처에 가지도 못한 사람이다. 비범은 나의 간절한 바램일 뿐이다. 그러면서 위로 삼는 것은 나는 적어도, ‘좁은 길’ 즉 ‘비범’ 이 뭔지는 아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가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또 가지 못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비범 곁으로 조금 씩 갈 것이다.

어느 날, 동서양의 많은 격언, 속담 등이 바로 넓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는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아! 이부분은 그냥 그자리에 모인 평범한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셨겠구나!” 라고 결론내리게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넓은 길을 갈 때, 그 앞에 놓여진 결과를 거의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99% 의 사람들이 넓은 길을 걷는다. 오직하면 예수님이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 고 말하실 만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아려운 것인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범이 얼마나 힘든지? 내 지난 삶을 통해서 예를 들어보려한다. 아마도 나의 어릴 적 이야기는 한 다섯번 정도는 썼다가 지웠다, 했던 것같다. 그만큼 낯부끄러운 이야기들이다. 어렸을 때, 아니 중학교 1학년부터 43살까지 29년간 다닌 교회에서의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때의 일인데, 우리 교회가 있던 동네는 그 유명한 천호동에서도, 가장 우범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교회 정문 바로 아랫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정도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은 오가는 길에 동네 아이들에게 소위 ‘삥’ 을 뜯기기 일수였다. 동네 아이들 중에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나도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동네 아이들은 수시로 교회 안에 들어와 앞마당에서 놀았는데, 교회 어른들 조차 그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피해서 가는 상황이었다. 오직 그 동네에 오래 사신 신장로님만이 동네 아이들을 쫒아내실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돗자리 깔고, 쏘주 마시며, 담배 피고 있으면 무조건 내쫒았다. 정말 이상한 것은 내가 쫒으면 그 아이들은 “아이 그 새끼 되게 설쳐대네!” 하며 돗자리를 걷어서 내려간다는 것이다. 물론 동네 아이들로부터 삥을 뜯길 상황에 처해본 적도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천호동의 다른 아이들이 우리 교회 후배 아이들을 혼내준다고 각구목(각목)을 들고 열댓명이 몰려왔을 때도, 나혼자 나가서 열댓명을 돌려보낸 일도 있다. 세명의 고 1 아이들이 토요일 중고등부 집회를 끝내고,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옆 테이블에 있던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트러블이 생기자, 위험을 느끼고 교회로 도망 온 것이었다. 도망온 아이들은 교회 철문을 잠궜고, 밖에서는 철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늦은 시간이었고 교회 안에는 묘하게 여학생들만 있어서,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나만 쳐다봤고, 나는 겁먹은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서 큰 일을 치루더라도 일단 나가보자! 하고 철문을 열고 나갔다. 정말 많이들 몰려왔다. 어떻게 하나? 황당했는데, 정말 럭키하게 가운데에 있는 리더격인 아이가 당황하며 “어? 안녕하세요!” 했다. 기회다 싶어 “뭐야! 이 섀끼들아! 어디 까불데가 없어서 교회에 와서 까불어!” 했더니 “미안해요. 형! 하지만 저 새끼들은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가만둘 수 없어요.” 하는 것이다. “ 이 새끼들이, 날 가르치러들어. 죽이던 살리던 내가 알아서 할꺼니까, 가! 이새끼들아!” 했더니 조금 머뭇거리다 인사 깍듯이 하고는 꼭 혼내주셔야 된다고 다짐을 받고는 돌아갔다. 교회 안에서 지켜보던 술 먹다 도망 온 세 놈과 여자 아이들은 박수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물론 나는 후배 세놈을 세워 놓고,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안잊어먹을 정도로 아프게, 따귀 한대씩을 때리고 돌려보냈다.

물리적인 면에 가장 민감하던 중, 고등학교 시절에 거의 모든 일이 이렇게 되었다. 나는 내가 싸워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착각하던 시절이었고, 싸움의 현장에 참여한 것이 꽤 되었을 텐데, 거의 모든 상황에서 ‘손 안대고 코 푸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그 중에 주먹질을 해본 것도 거의 기억에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 정도부터 성격이 조금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나를 사로잡아서 명분만 주어지면 터졌다. 내가 다닌 영동고등학교는 내가 사는 천호동에서 버스 타고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양아치 학교로 알려진 특수지인 상문고등학교, 우리 학교, 경기고등학교, 진선여고, 은광여고, 경복여상 등이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하루는 학교 앞에서 놀다가 저녁 늦게 버스를 탔는데, 거의 빈 버스의 맨 뒷좌석 구석에 상문고등학교 3학년 한명이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너 잘걸렸다 싶어서 옆자리로 가서 붙어 앉았다. 웃으면서 “담배 꺼! 새꺄!” 했다. 그 아이는 놀라면서 내 학년 뺏찌를 쳐다보더니, 어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했고,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을 넓게 펴서 한대 때리고는, 바로 얼굴을 유리창 쪽으로 밀고 몇마디 했다. 그 아이는 담배 끄고 아주 바르게 앉아서 삼십 여분을 함께 갔다. 학생이 차안에서 담배 피는 것은 맞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은 잘하는 짓이다! 명분만 주어지면 폭발했다. 혹시 아주 쎄보이는 아이가 담배를 피고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묘하게도 천호동에서 논다고 하는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등, 하교 버스 안의 장면이 얼마나 난장판이었는지는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 아이들이 크게 떠들어도, 담배를 펴도, 버스 안의 여고생을 희롱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조금은 삐뚤어진 영웅심리로 가득 차있던 나로서는 뭔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천호동 사는 아이들 중에서,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논다고 하는 아이들 중에서 나에게 맞짱 뜨자고 할 아이는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안면이 꽤 있는 아이들은 내게 뭐라고 그러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어느 날 적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리에 앉았고, 서서 가던 사람 한 열댓명 쯤 되었을 하교 길의 버스 안에서, 우리 학교 같은 학년 아이 한명이 희롱할 목적으로 진선여고 아이의 책가방을 억지로 받아 준다며 뺏아 가지고 뒷자리로 오는 것을 붙잡았다. “가방 이리줘! 새꺄!” 하니 위세에 눌려서 가방을 내게 건넸다. 그 가방을 여자아이에게 돌려주고 뒤로 오면서 크게 소리쳤다. “앞으로 버스 안에서 여자 히야까시 하는 새끼들 내 눈에 보이면 전부 때려 죽일 줄 알아!” 아마도 한 두달, 이렇게 지냈을 것이다. 정말 내 눈앞에서는 눈살 찌프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음성써클들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YTT 라고 학교가 만들어지면서 부터 학교를 장악해온 음성써클이 있었다. 우리 학년의 일진은 YTT 였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정말 막강한 학년 리더가 있어서, 소위 말하는 ‘일진’ 의 지위를 다른 어떤 써클도 넘보지 못했다. 그 리더라는 아이는 나이도 같은 학년 아이들 보다 두살이 많았고, 선배들도 함부로 하지 않던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고, 머리도 좋고, 대전의 유명한 집안 자식이었는데, 당시 유명한 대전고등학교를 두번 떨어지고는 쪽팔려서 서울로 유학을 온 아이였다. 그 아이가 무슨 이유인지,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자퇴를 하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진이라고 할 7~8명의 아이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중학교 때부터 악명 높았던, 그리고 학교에서 블랙리스트 1순위 였던 그 아이들은, 학원폭력 근절이라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면서 강남경찰서에 불려가서 지문을 찍고, 조서를 쓰고, 학교에서의 어떤 경미한 말썽도 퇴학과 구치소 행이라는 이상한 각서를 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학교는 난장판이 되었다. 눌려 지내오던 Y-9 이란 써클 아이들이 설치기 시작했고, ‘잉카’ 라는 써클도 열명 정도로 만들어졌고, ‘마패’ 라는 써클도 열일곱명으로 만들어 졌다. 묘하게도 YTT 라는 일진 써클에는 천호동 아이가 딱 한명(한번 꼭 보고 싶은 ‘양경모’) 있었는데, 2학년 때 정말 억울하게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나머지 세 써클은 2/3 이상이 천호동 아이들 구성되어 있었다. 마패 라는 써클의 멤버가 열일곱 이라고 기억되는 것은 한 사건이 있어서이다. 지금은 보고 싶기도 한 그 아이들에게 내가 버스에서 몇달 간 잘난 척했던 일이 만들어 낸 사건이었을 것이다.

공부에 대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고3 어느 날, 등교 버스 안에서, 차가 몹시 흔들리는데, 나랑 등을 맞대고 있는 한 아이가 손잡이를 잡지 않고 흔들리면서 자꾸 등에 부딪쳤다. 그냥 의미 없이 뒤를 내려다 보며, “손잡이 잡고가! 새꺄!” 했다. 욕을 먹었으니 좀 잘가겠지 하고 가는데 한 1~2분 지나고 나니 또 부딪히는 것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키가 크지 않았던 그 아이의 모자 쓴 머리 통을 위에서 아래로 손바닥으로 한대 때렸다. “똑바로 안해!” 하며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내릴 때까지 갔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나에게 머리 통을 한 대 맞은 아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 쳐다보니 어렴풋이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나중에 졸업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일이 있어서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였다. 같은 학교 3학년이었고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에서 “어 너였냐? 말을 하지!” 하고 가려고 했더니, 자기를 좀 보자고 했다. 그 아이의 뜻밖의 반응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아이의 손목을 잡고 “너 이 새끼 이리와!” 고 말하며 골목으로 끌고 가려고 했더니, 오늘 시험이니까 끝나고 보잔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 너 끝나고 이자리로 안나오면 앞으로 학교 못다닐 줄 알아!” 하며 씩씩거리며 학교로 갔다.

1교시 시험이 끝나고, 건물 밖 벤치에 있는데, 안면있는 천호동 아이가 하나 오더니 “너 아침에 무슨 일 있었냐?” 고 물었다. “아니 아무 일 없는데!” 하고 대답을 하고 나서 갑자기 그 아이와 만나기로 한 일이 생각이 났다. 2교시 시험이 끝나고 김종석 이란 마패의 리더인 친구가 내게 왔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깔끔한 편이었고, 덩치는 크지 않지만 남자답다고 소문이 난 아이여서 웃으며 맞이하려는데, “너 이따가 누구랑 보기로 했다는데, 갈꺼냐?” 고 내게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 잠깐 생각하다가, “갈꺼지! 그런데 왜?” 했더니 갑자기 안면을 바꾸더니 인상을 쓰며 “그래! 그럼 와서 한번 죽어봐라!” 하며 돌아갔다. 나는 그제서야 정리가 됐다. 아! 아침에 그 아이가 마패 였나 보구나. 3교시가 끝나는데, 덩치가 크고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었던 내짝이 내게로 왔다. 자기가 중재를 할테니 나보고 그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마패가 열입곱 명이나 되고, 지저분하게 싸우기로 소문이 나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도 베스트 후렌드인 상열이에게만 이야기 하고 둘이서 가야겠다고. 그만큼 상열이란 친구를 믿었다. 4교시가 끝나자 친하게 지내던 YTT 아이들 두명이 내게로 왔다. 그중에 한 아이가 간곡하게 나가지 말라고 권했다. 내가 끝까지 나가겠다면, 자기들이 무조건 같이 갈건데, 자기가 나머지 YTT 아이들에게 강요하기는, 각서까지 쓴 상황에서 정말 부담스럽다고 했다. 나를 안도울 수도, 도울 수도 없다고 했다. 실제로 YTT 는 싸움을 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학교를 짤릴 수 일었다. 경모라는 아이가 짤린 것도 열명 정도의 다른 써클 아이들이 하교 길에 몰려가서, 각구먹과 포크로 난자했는데도, 피해자인 그 아이만 짤리고, 가해자는 다섯 명 정도가 간단한 정학 처분만 받고 끝난 일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일진이었던 YTT 는 종이 호랑이가 되었고, 개인적인 힘으로 적당히 위세만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간곡히 말리는 그 아이에게 안갈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종례가 끝나고 상열이와 함께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학교 앞의 식품점에 들려서 맥주병과 콜라병 4개 씩을 가방에 넣고 갔다. 긴장하며 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분만 기다리다 가자!” 고 상열이에게 이야기 하고, 기다렸다.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는데, 결국 오분이 지났다. 이대로 그냥 가면 우리가 오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애꿋은 남의 집 문에다가 가지고 간 맥주병, 콜라병을 짚어 던졌다. 조용한 주택가에서 소란을 피웠다. 놀란 동네 아줌마 들이 나왔다. 거기에 대고 나는 거칠게 소리쳤다. “야이 새끼들아! 다 나와!” 우리가 거기에서 기다리다 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쓸데 없는 짓을 했다. 다음 날 마패의 리더란 아이가 왔다. 손을 내밀며 “야 미안하다! 잘 지내자!” 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그래 하고 손을 잡고는 끝냈다.

그 후로 왜 그 아이들이 안왔지! 하나님이 도우셨나? 하고 몇번 생각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후에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를 간곡히 말리던 YTT 의 한 아이가 마패 애들을 만나서 나를 설득해서 안가게 했으니, 너희들도 가지 말라고 했고, 만약에 나와 끝까지 하고 싶으면 YTT 가 모두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어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하고 마패 아이들 몇이랑 같이 가서 쏘주 한잔 했단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듣고 나는 “야! 임마 그럼 그렇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했더니, 내가 안간다는 말을 곧이 들은 그 아이로서는 내가 당연히 안간다고 했는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었냐고, 그리고 자기가 중재했다고 생색을 낼 필요도 없어서 지금까지도 아뭇 소리 없이 온 거라고.

이상한 일은 참으로 많았는데, 2학년 중간에 그만 둔 우리 학교의 절대적 캡틴이었던 아이와도 일이 있었다. 1학년 때, 학교 안은 중학교 때 한가닥 했던 아이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는 죽어지냈지만 고등학교 때는 그럴 수 없다고 설쳐대는 아이까지 치고 받고 아주 아수라장이었었다. 다행히 우리 반에는 한명도 그런 아이들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나와 몇 아이들이 설쳐대는 통에 조용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1학년 시절 동안 나는 반에서 친한 몇명과 함께 학교 밖에서 정신 없이 놀고 다녔다. 2학년으로 올라가 반을 배정받은 첫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있는데, 1학년 때 우리반이었던 아이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얼른 달려가보니, 1학년 때 우리반 아이는 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합기도도 2단 이었고, 운동을 꽤 하는 편이어서 왠만하면 밀리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전혀 덤빌 생각을 못하고, 도망다니기만 했다. 나는 “저 새끼 뭐야!” 하면서 말리려는데,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제가 우리학교 캡인데 나서지 말란다. 잠깐 갈등이 있었지만, 나선 김에 가운데로 막아섰다. 그리고 내가 자랑하는 완력으로 캡틴이라는 친구의 두 손목을 꽉 잡아 쥐었다. 그 친구는 “넌 뭐야 새꺄?” 했고, 나는 “ 야! 적당히 해 임마!” 하는데, 갑자기 내 왼손이 허전해 졌다. 위기를 느끼고 머리를 그 친구 가슴으로 밀어붙이고, 칠판쪽으로 민후 떨어졌다. 그 순간에 선생님이 들어왔다. “너 끝나고 보자!” “얼마든지!” 하고 우리 반으로 들어와 앉는데, 그 친구도 따라와 앉았다. 우리 학교 캡이라면 YTT 의 캡으로 정말 소문이 자자한 놈인데, 꽤나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겠다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반이니 다른 아이들 몰려오기 전에 일대일로 후다닥 붙어버리지 뭐! 하고 긴장하며, 몸을 풀며 한시간 수업을 들었다. 종소리가 나고 일어서려는데, 그 친구가 성큼 성큼 다가와서 “야, 같은 반이었냐? 잘 지내자!” 하며 손을 내밀었다. 뜻밖이었지만 오래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가 그만두기까지의 한학기 동안, 그 친구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고, 거의 매일 그 친구의 무용담을 듣고, 그 친구의 위용을 보면서 지냈다. 위용이란 별거는 아니었지만, 당시 우리반 반장도 내 바로 앞에 앉아서 너댓명이 친해졌는데, 반장이 자습시간에 아무리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해도 쪼금 논다고 하는 아이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반장은 정말 난처했었는데, 갑자기 이 친구가 한마디 했다. 충청도 대전 토박이였기 때문에 조금 느릿느릿한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야! 앞으로 교실에서 떠드는 새끼들은 전부 죽을 줄 알아!” 이야기가 떨어지자 마자 찬물을 끼얹은듯이 조용해졌고, 서너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 한 아이는 같은 YTT 멤버이고, 이 친구가 학교를 그만 둔 후에는 자기가 우리 학교 캡 이라고 떠들 정도의 아이였는데, 이 친구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너두 앞봐! 새끼야!” 했다. 이 말을 들은 그 아이는 크게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지만, 거부하지 못하고 앞을 향했다. 나는 어땠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반장을 도와줘서 기분이 좋았고, 신기했고, 편안했다. 나는 당연히 그 친구가 무섭지 않았고, 듬직하고 어떨 때는 귀엽기도 했다. 그 친구 말로 “다른 아이들은 다 동생같은데, 너는 친구같다!” 고 내게 말을 하곤 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나 다른 반 아이들은 아무도 우리 교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떠들려면 복도로 나가거나 - 아니 복도도 우리 반 바로 앞의 복도는 피해야 하고 – 다른 반으로 가서 떠들어야 했다. 그 친구는 내게 지난 일들과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나는 틈나는 대로 충고를 했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두살이 많은 경우에 고등학교 재학 중에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고, 현역 판정을 받으면 연기가 안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친구는 대전 중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단다. 대전 고등학교만 두번을 떨어지고 챙피해서 도저히 대전에 못있겠다 싶어 서울로 올라온 것이란다. 머리도 상당히 잘 돌아가는 편이었고, 그 친구의 그런 압도적인 지위는 완력에서만 온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온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름방학 하기 전날 내가 영어책 한권을 빌려줬는데, 방학이 끝난 후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준비해서 검정고시를 봤고, 그 해에 바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아이의 그 친구를 만났는데, 내가 보고 싶고, 책도 돌려줘야 하고, 등의 이야기를 했단다. 아나 지금처럼 쎌폰이 있고, 이메일이 있었다면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그 친구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왜 그 친구는 나를 본 첫날,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내게 화해를 청했을까? 내 어릴 적 삶이 대충 다 이런 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교회 앞동네 거친 아이들과 한창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앞 동네 아이들 중에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1년 선배가 한명 있었는데, 학교에서의 별명이 ‘짱구’ ‘꼴통’ 이런 수준이었다. 교회 앞에서 부딪히고, 자기 말빨이 안먹히고 하니까, 자꾸 학교에서 자기네 반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웃기고 있네!’ 하며 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중고등부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 교회 회장이었던 우리 학교 1년 선배가 나를 부르더니, “너 왜 선배가 오라고 하면 갈 것이지, 안가서 교회 욕을 먹이냐? 지금 교회 밖에 있으니까 나가봐!” 라고 했다. 정말 황당했다. 이 밤에 혼자 나가서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라니, 정말 순진한건지? 머리가 나쁜건지? 황당했지만, 교회가 욕을 먹는다는 말에 결심을 했다. 상열이란 항상 함께 있는 단짝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으로 갔다. 열명이 조금 넘을까, 하는 인원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끼, 정글칼, 망치 등으로 무장하고 우리를 반기며 높은 축대로 막힌 길고 좁은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 짱구란 그 선배가 우리를 축대 쪽으로 서게 하더니, 쭈구리고 앉아서 우리를 올려보며, 가래를 연실 밷어가며 겁을 줬다. 한 10분을 그랬을 것이다. 있는 겁, 없는 겁, 다 주더니, 도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우리에게 무릎을 끓으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긴장도 하고 겁도 났다. 떨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정말 힘을 바짝 주고 서있었는데, “무릎 끓어!” 하는 소리에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내 친구 상열이! 정말 Miracle 하고 Mysterious 한 싸나이 상열이는 씹고 있던 껌을 짱구의 얼굴에 뱉으며 “병신들 X까고 있네, 할말 다했으면 비켜 새꺄!” 하고 앞쪽에 걸그치는 한 아이의 가슴을 뒤로 밀치며 천천히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재빨리 같은 무드로 바닥에 침을 뱉으며 상렬이의 뒤를 따랐다. 그때의 그 스무발짝 쯤은 얼마나 길었던지? 얼마나 떨렸던지? 이제는 됐다. 쫒아와도 도망칠 수 있다! 라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와서야 떨림이 진정되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고, 우리는 교회로 들어와서 편안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상열이의 이런 ‘기세’ 를 나는 세번을 경험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정말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수구리며 다니고, 180센티미터의 키에 52킬로그램 밖에 나가지 않는… 어디에서 그런 상상치도 못할, 아무도 꿈쩍 못하게 하는 기세가 나올까? 지금도 가까이 살고 있는 그 친구에게 지금도 비슷한 기세가 남아 있을까? 상열이의 이런 도움이나, 또 다른 친구들의 도움이 나를 착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자기 주장은 또 얼마나 강했냐 하면, 다른 아이들은 빨간 불이어도 길을 건넜는데, 나는 똥고집으로 파란불을 기다렸었다. 그러다가 보행자 신호가 켜졌는데도 그냥 지나치는 택시나 버스 들은 내게 봉변을 당했다. 버스는 내가 발로 차던, 주먹으로 치던, 자국이 조금 날 정도인데, 택시는 꽤나 표시가 나게 찌그러진다. 운전사가 놀라서 화를 내며 내려도 내 서슬에 압도되어, 정말 재수 옴붙었네 하는 표정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가버렸다. ‘신호 안지키는 새끼들은 내가 혼내줄거야!’

잘난 척하는 영웅심리는 정말 끝도 없었다. 고3때, 한 선생이 학생지도부 선생이 되면서 정말 아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얌전한 선생으로 생각했었는데, 남자 답지도 못한 것이, 지도부 완장을 채워주니,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번 혼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등교길에 머리에 모자 자국을 내지 않기 위해서 모자를 묘하게 올려 놓고 학교 진입로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는데, 누가 등어리를 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발길질이 었다고 생각해다. 등어리에 꽤 충격이 왔고, 모자가 떨어질 정도였다. 정말 화가나서 뒤로 돌며 “어떤 X 새끼야?” 했는데, 선생이었다. 그 선생도 서슬에 놀랬는지 아무 소리 못했다. 나는 화가 가시지 않아서 “뭐예요? 왜 그런거요?” 하고 다그쳤더니, “너 이놈! 머리가 기니까 모자를 그렇게 쓰고 다니지! 머리 깍고 점심시간까지 학생지도부실로 와서 확인받고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 잘걸렸다!’ 하고 내심 쾌재를 부르며, 내가 머리 깍은 지 일주일도 안지났고, 이 머리가 뭐가 기냐고 따졌고, 사람을 때리려면 뭘 알고 때려야지 뒤에서 허리를 때리면 어떻게 하냐고, 당장 사과하라! 고 따라갔다. 선생은 종종걸음으로 빨리 머리 깍고 오라는 말만을 하며 학생지도부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거리낌 없이 지도부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 선생의 책상을 두손으로 붙잡고 서서 빨리 사과하라고 압박했다. 선생은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에게 안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주변 선생들이 어떻게 빨리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게 상대를 안하고 무슨 준비를 하는 척 하고 있었다. 한 오분 간은 족히 버텼을 것이다. 보다 보다 못한 지도부 주임 선생님이 “야! 김성윤이, 그만 좀 해라! 선생이 네게 사과하겠냐? 빨리 머리나 깍고 와!” 나는 주임선생께 갔다. 머리가 안긴데, 왜 머리 깍으라고 그러냐고 했다. 주임선생은 작은 소리로 “야! 머리 안깍고 와도 되니까, 조금 있다가 그냥 와서 머리 깍고 왔다고 하고 가!” 라고 했고, 나는 그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내 잔머리는 이발소 간다고 한 시간 땡땡이 칠수도 있겠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결국은 교내 이발소에서 “야! 온 김에 머리 깍고 가라!” 는 이발소 아저씨와 말장난 하다가, 신문 보다가 지도부실로 가서, 문제의 선생에게 머리 깍고 왔으니 됐냐? 고,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라고, 아이들 좀 작작 괴롭히라고, 지도부 선생이 뭔 벼슬도 아닌데… 하고 말하고 쾌재를 부르며 나왔다.

조금 말도 안될 것 같은 이 상황이 가능한 것은, 우리 학교가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개인적인 체벌을 거의 삼가했었고, 무섭기로 소문난 두, 세 선생만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님이 바로 학생지도부 주임 선생이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미술실에서 그 선생님과 같이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펜트하우스, 플레이보이를 같이 보기도 하는 사이였었다. 나만이 아니라, 미술부 아이들 중에 몇몇은 화끈한 그 선생님과 때로는 친구 같은 사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당한 퍼포먼스와 잔머리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낸 세월들 이었다.

나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대학교와 대학원 때는 더했다! 선배들 조차 저놈은 뭔가 특별한 놈이고, 뭔가 할 놈이고, 자기들이 선배라고 하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후배다. 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친 김에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몇가지만 더 소개하고 싶어졌다. 대학교를 그렇게 원했던, 아니 공부를 안하고도 당연히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 나만 스스로 믿었던 것이지만 –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안의 강요에 못이겨서 후기인 동국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재수를 하기로 했었다. 동국대학교에 다니던 한달 동안, 광주사태가 터져서 휴교를 하게 되어서 한달이 전부였던, 뭔가 터트리고 싶었는데, 저녁에 당시 서울운동장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취한들을 두들겨주는 일로 불편한 마음을 달랬었다.

재수를 했는데도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니 재수를 하면서 고등학교 때보다 더 놀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고, 현역으로 시험볼 때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수를 할 때, 본고사가 없어지고, 내신제도가 생겼다. 내신 첫해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 것만 적용했다. 고3 때의 내 내신점수는 우리반 58명 중에 32등이었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냐하면, 내가 졸업고사 시험 열몇 과목 중에서 세 과목만 시험을 보고 나머지 시험을 다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세과목도 장난으로 가나다라…. 를 써놓고 나와서 놀았다. 내신이 적용 안되고,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라, 예비고사를 마치고 보게되는 졸업고사는 본고사를 준비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준비 없이 보거나, 아예 보지 않거나 했었다. 내신 10등급 중에서 6등급에 해당하는 아마도 점수로 따지면 20점 쯤 손해보는 내신 성적을 가지고 대학을 선택해야 했다. 병역 때문에 삼수는 할 수 없었고, 어거지로 들어간 고려대학교의 낮은 과에 마음이 갈 리가 없었다. 내 노력이나, 내 주제에 비해 볼때, 정말 과분한 대학이었음에도 당시에는 정말 언잖아서 입학식에도 가지 않고, 첫학기 중간고사 볼때까지 이틀인가, 삼일인가 정도만 학교에 갔을 정도였다.

상한 마음은 신입생 신체검사 때부터 터졌다. 나보다 결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신체검사를 해주고 있었다. 의대 예과 아이들인 것 같았다. 정말 같잖아 보이는 아이들이 선배랍시고, 신입생들을 신체검사하며 군기가 빠졌느니, 어쩌니 했다. ‘이것들 봐라!’ 하는 마음으로 벼르고 있는데, 내 차례가 되었고, 다섯명씩 서서 손가락을 쥐어! 펴! 하더니, 곧 이어서 앉아! 일어서! 했다. 내 바로 옆에 나이가 들어보이고, 덩치가 큰 한명이 서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여의도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고, 군대를 갔다가 대학에 들어온, 나보다 4살 많은 노장 신입생이었다. 정말 불편해 하는 것이 보였고, 나와 마찬가지로 느릿 느릿 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러자, 검사하는 의대생 중의 한명이 강압적인 소리로 “어쭈! 동작봐라! 앉아!!” 했다. 너 이새끼 혼나봐라! 하는 마음으로 “너 이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하고 외치며 준비된 동작으로 앞의 책상을 짚어 던지고, 바로 움찔하는 그 아이의 멱살을 잡고 유리창쪽으로 밀어붙쳤다. 그리고 아주 크게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야이 새꺄! 신입생이니까 다 니들 동생같이 보여! 확 눈깔들을 뽑아버릴까보다!” 검사를 하던 의대생 아이들은 당황하고, 웅성대더니, 조금 전열을 가다듬고 비교적 덩치 커보이는 서너 명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우연히도, 가장 앞서오는 덩치가 큰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반 아이였고, 나를 보자 놀라며, “성윤아! 왜그래!” 하였다. 나는 그 아이를 위협하는 동작으로 “이 X만한 새끼들! 한번만 더 말까고, 까불면 죽을줄 알아!”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체검사장은 아주 조용하고, 공손하게 변하였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신입부원을 뽑기 위해서 나와있던 운동부의 선배들에게 칙사 대접을 받았다. 나를 자기네 운동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주며 순서를 정해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재수를 하고 들어왔다는 생각에,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운동부서에 들어갈 턱이 없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운동부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은 대학을 다니면서 농구 써클을 만들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주변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는데,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 동네 아이들끼리는 나보다 한살만 어리면 내게 깍듯이 형 대접을 해야 하고, 나보다 한, 두살 많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친구로 지냈다. 국민학교 5학년 겨울에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동네에 이사가자 마자, 이상한 아이들 – 나보다 학년은 한학년 높고, 나이는 서너살 많은 아이들 - 을 만나서 짤짤이를 하며 친구가 되었다.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했어도, 이전 동네에서 5학년 이면서 중학교 1학년 아이들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국민학생으로 보이는 그 친구들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며 공터에서 몇일동안 짤짤이를 했다. 노름을 하면서 아주 가까와진 것이다. 이 아이들은 축구선수였다. 그래서 학년을 적게는 1년부터 많게는 3년까지 꿇린 것이었다. 그러니 중학생들도 그 아이들에게 형 대접을 했고, 같은 6학년인 자기들끼리도 형, 동생이 있었다. 시내에서온 곱상한 아이가 그 아이들과 다짜고짜 맞먹으려 지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겠지만, 그 동네를 떠난 중학교 1학년 때에 그 동네에 고등학교 1학년 까지는 다 반말을 하며, 아주 편안하게 지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그 동네에서 겨울성경학교 때,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6년간 교회 생활 만큼은 정말 뜨겁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래서 오직 교회에서만은 1년만 선배여도 정말 깍듯하게 대하며 지냈다. 그 교회 선배들 중에서는 한두명 기억이 나고, 중학교 1학년 때, 천호동으로 이사오면서, 내가 다닌 교회에는 정말 많은 형과, 누나들이 생겼다. 이후에도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남자 선배 몇명에게 형이라고 했을까? 어떤 사람에게도 형이나 누나라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이러던 나에게 재수의 상황은 견디기 어려웠고, 학번 관계가 절대적이기로 유명한 고대였기에 더 고민스러웠다. 그래도 내 마음대로 기준을 정했다. 나는 내가 당연히 80학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80학번에게는 당연히 말을 튼다. 81학번 중에서 재수한 아이들과는 말을 트되, 곧바로 들어온 81학번 아이들이 내게 반말을 하는 것은 용납치 않는다. 79학번에게는 인간성 좋아보이는 사람에게는 선배 대접을 하고, 인간성이 꽝같아 보이면 맞먹는다. 그 위는 선배대접을 한다. 학번이 깡패라고 하는 고대를 대학교, 대학원 7년간 다니면서 이 원칙을 끝까지 지켰고,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원칙을 받아들여 주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시행했다. 어느날 교정안에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며 지나는 것을 보았다. 같이 농구를 하고 있던 후배 한명에게 그 고삐리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했더니 사대부고를 다닌다고 했다. 고대 주변에 용문고등학교와 사대부고가 있었는데, 가까이 있다보니 고대로 진학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사대부고를 졸업한, 고등학교 때부터 힘좀 쓰던 후배 한명을 불러서 현재 사대부고의 ‘짱’ 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용문고등학교 출신 후배 한명도 불러서 용문고등학교 ‘짱’ 도 데려오라고 하였다. 두 ‘짱’에게 엄포했다. 앞으로 고대 안에서 담배를 피는 것은 괜찮지만, 담배를 피다가 대학생이나, 어른이 지나는데, 담배를 숨기지 않고, 버젓이 피는 놈이 있으면 너희 두 ‘짱’ 이 내게 죽을줄 알라고. 아마도 내가 신경을 쓰던 1~2년 간은 이 엄포가 효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교내에서 고등학생들이 담배를 피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고, 한두번 쯤, 황급히 담배를 숨기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고대 앞에서 술취한 대학생이 불량스런 고등학생들에게 얻어 맞고, 돈을 뺏기고 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었는데, 내가 가끔 고등학생 아이들을 간섭한 것이, 그 사고의 빈도를 줄이는 데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번은 고대 뒷산에서 은밀한 시간을 즐기던 고대생 커플이 인근 양아치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때도 ‘나서야겠다!’ 싶어서 체육교육과 후배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 10명 정도를 체육교육과 트레이닝복으로 입고 오게한 후에 후레쉬와 몽둥이 하나씩 들게 하고, 2인 1조로 학교 뒷산을 일주일에 한, 두번씩 수차례에 걸쳐 순찰한 적이 있었다. 굳이 체육교육과 트레이닝복을 입게한 것은 왠만해선 대부분의 고대생들이 체교과 아이들에겐 시비를 붙지 않기 때문이었다. 참 우리에겐 명분도 있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당하는 아이들에게는 더러운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붙어 앉아 있거나, 후다닥 일어나 옷을 추스리는 커플에게 학번을 대라고 하고, 학번을 제대로 대면 그냥 지나가고, 학번을 대지 못하면, 일으켜 세워서, 몇마디 말을 걸다가 나름대로 조금 불량끼가 있어 보이면 다짜고짜 몇대 뚜드려 패고 내쫒았다. 고대생이 아니어도 선량해 보이면, 다음부터 여기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지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얼굴을 아는 고대생 커플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황망해했고, 우리는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바로 지나지 않고, 몇마디 말을 걸고, 쑥쓰러워하는 것을 즐겼다.

이태원에 수없이 놀러가고, 놀러갈 때마다 수없이 싸움에 휘말려도, 한번도, 누구에게도 밀린 적이 없었고, 힘을 써볼 필요도, 기회도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마음 놓고 놀며 지냈다. 물리적인 것에 관한한 거의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었다.

아무리 말해도 가까운 아이들조차 믿지 않을 일도 있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무슨 일이 있어서 정장을 하고 갈 수 밖에 없었다. 화곡동의 육군통합병원 후문이 모이는 장소였는데, 부슬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재수를 한데다가, 군대를 연기한 상태에서 대학교 4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신검을 받는 아이들 보다는 서너 살이 많았고, 신체검사에 동원되는 대부분의 현역병 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현역병들은 식품점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고, 신검 대상자들은 후문 앞에 줄맞추어 쭈그리고 앉아 있게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었는데, 처음부터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서있었다. 신검 대상자들을 비맞추는 것을 보고 있기 뭐해서, 현역병 중에 고참인 듯 보이는 친구에게 “비 맞추지 말고 들여보내지!”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게를 주며 말을 건넸다. 내 말을 들은 그 친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럴까요?” 하더니 신검 대상자들을 일어서게 하고 후문을 열고 들여보냈다. 나는 신검대상자들과 함께 걷지 않고, 천천히 현역병들 쪽에서 뒤따라 걸어갔다. 현역병들이 “저 사람 누구야?” 하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실내로 들어가서 ‘장정’ 들은 팬티만 입고 줄을 맞춰서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제서야 나도 옷을 벗고 무리에 합류했다.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 새끼도 신검받는 놈이었네! 웃기는 놈이네!” 하는 현혁병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그 모습에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체 숫자를 확인한 후에, 강압적인 톤으로 한명 한명 호명하기 시작했다. 대답하기가 싫어졌다. “김성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성윤, 누구야!”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적막이 흘렀을 때, 천천히 얘기했다. “지금 내가 당신들 쫄다구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말끝이 짧은거야! 앞으로 말깍듯이 하지 않으면 협조 안할테니까 맘대로해!” 당시 그 자리에는 한 10명 이상의 현역병이 있었고, 신검대상자는 200명 정도 있었는데, 현역병 중에서 고참 서너명이 모여서 상의를 하더니, “좋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장병이 아니니, 앞으로 여러분에게 존칭을 하겠습니다! 김성윤씨!” 하였다. 나는 “네!” 대답을 했고, 그날 신체검사장에서는 이쪽으로 오세요! 앞으로 나오세요! 하는 공손한 말들로 진행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학교 같은 학년인 축구부의 쌍둥이가 나와 함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그들은 증명을 해주겠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내게 일어났던 물리적인 일들이 나의 일면일 수 있다. 이외에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를 착각하게 만들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36살까지 나의 이런 ‘운’은 계속되었으니까. 그래서 깨달았다. 우리가 흔히 ‘운’ 이라고 하는 것은 패망의 전주곡임을. ‘운’ 이란 것은 결국 돌아서 큰 피해와 시련을 주는 것임을.

어린 시절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때, 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관하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네가 어떻게 하나 보자!’ 하시며 계속 상황을 설정해 주시며 나를 지켜보셨고, 나는 계속 ‘自高’ 해졌고, 당연히 그 테스트에 실패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설정하시면 과연 누가 통과할 수 있을까? 99%가 그 관문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다가, 어느 정도까지 떨어질까? 떨어진 후에도 기회가 주어질까? 조금 올라간 사람은 떨어질 것이 별로 없다. 많이 올라간 사람은 많이 떨어진다. 얼마 만큼 올라갔다가 얼마 만큼 떨어져야 다시 기회를 잡고 성공적인 결말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는 아주 높이 올라갔다가, 아주 깊은 데로, 가장 깊은 데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곳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단지, 그때 자신이 왜 올라갔는지? 를 깨달은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자신이 뛰어났기 때문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올리시는 데에야,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떨어지라고, 올리시는 것 아닌가? “맞다!” 하나님은 분명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며, 올리실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1% 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100% 가 다 떨어진다면, 하나님은 올리지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1% 는 떨어지지 않는다.

평범한 99% 와 비범한 1%

우리의 인생은 바로 이 ‘과제’ 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 1% 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이미 주셨고, 예비해 놓으셨다. 99% 의 삶에 대해서 계속 경고하신다. 이 1% 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질지? 정말 비범하지 못하면, 우리는 인생의 질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면 1%로 살면 인생의 질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을 만들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아가니 어려운 것이 없고, 걱정할 것이 없고, 항상 감사하며, 기쁨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1% 의 삶을 사는 것인지도 안다. 이전과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인지? 를 구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이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 을 걷는 삶을 사시기로 작정하신다면, 순간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마시라. 내게 물어 오면 바로 바로 답을 드릴테니까! “옛따 모르겠다!” 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몇번 실천하다보면, 여러분은 비범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얼마전부터 내가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면, 결국은 우리 집사람이 읽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쩍 쓰기가 부담스러워졌다. 목사들이 부인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것이 힘든 것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결론 내렸다. 욕을 먹더라도 쓰자! 지금 쓰려는 부분은 분명히 크게 욕을 먹을 부분이지만, 비범과 평범 사이에서 헤매는 내 삶의 한부분을 언급해 보려고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에 많은 고생을 하길 원한다. 특히 물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고, 그것을 극복하는 연습을 하길 바란다. 돈을 벌어서 극복하라는 것이 아니고, 돈에 대해 당당해지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완벽한 조건은 아니더라도, 엇비슷한 상황에 처해서, 물질적으로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지내고 있다. 자기들의 학비를 위해서 부모가 노심초사하고, 애를 쓰는 것을 본다. 나는 지금의 상황보다 조금 더 어려워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 내가 아이들의 학비를 위해서, 집안의 생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내가 정말 비범하다면, 한달에 10만불을 벌더라도, 생활비 6천불만 쓰면서 살고, 아이들 학비 때문에 고생하게 만들수 있을 것이다. 뜻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면서 와이프와 아이들과 싸우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1% 인 것이다. 내가 이런 면에서 1%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게 최선을 것을 주시고 계신다. 우리 집사람이 늘 말하듯, 내가 조금만 더 책임감있게, 조금만 더 벌어와 주면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도 없다.

여러 면에서 1% 의 삶이 있지만, 너무 길어진 관계로 후속글에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되실 분께, 내 개인적인 어릴적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여질지 부담스럽지만, 한번은 써보고 싶었다. 한번 써놓고 나면 다시는 갈등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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