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4일 금요일

고난 자체가 감사다.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시련과 고난, 보통 자신이 여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려고 메달리며 기도하고, 여러가지 면에서 발버둥치게 되는데, 대부분이 실패하고 만다. 쉽지 않다. 정말 힘든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기에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일게다.
“내게 왜 고난이 오는가? “ 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잘 생각해 보자! 왜? 란 의미가 ‘어떤 경로, 원인을 통해서’ 라는 의미와 ‘무엇을위해서’ 고난이 오는가? 의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어떤 원인, 어떤 결과로 고난이 오는가? 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내가 잘못해서, 둘째는 내 주변 사람이 잘못해서, 셋째는 욥과 같이 내가 너무 잘 살아서…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보통은 나로 인하여 내 가족, 주변까지 고난을 겪에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어떻게 할까? 두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나보다 더 잘못한 놈들도 잘 사는데, 왜 나만 얼마나 잘못했다고, 이런 큰 고난을 겪게 한단 말이냐? 라고 하면서, 불만과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혹 가족이 뭐라고 하면, 처음 한, 두마디는 듣다가, 한 세마디 쯤 되면, 불만이 터지며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뛰쳐 나가거나, 때려 부수거나… 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아는 크리스챤이라면, 잘못을 저지르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배를 불리운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너무도 뻔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정도도 모른다면, 당신은 이미 크리스챤이 아니다. 그냥 원망하고 화를 내다가, 내다가… 또 다른 어떤 운명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라! 다른 한가지 반응은,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하나님이 가만히 지켜보시고, 멸망의 길을 걷는데, 나는 큰 잘못을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형벌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다시금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충분히 연단되어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이 기간 동안 주님과 더욱 가까와지도록, 내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과 내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기쁨과 감사로 시간을 보내며, 시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강도가 깊어질수록 더욱 연단하여 정금과 같이 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혹 자신이 잘못해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주변 가족까지 고난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변 사람에게 원망하지만 않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이런 정도의 사람이 그렇게 하겠는가? 아마도 남을 원망하며, 평생을 헤어나지 못하고 살 것이다.
둘째로 내 주변 사람이 잘못해서 함께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더 화를 내야할까? 아니면 감사해야 할까? 언뜻 보기에 이런 사람이 살면서 그다지 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자기 할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더 좋은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흔히 자기의 의가 자기를 주장하여, 내가 지금 받는 고난이 내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첫번째 사람보다 더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할 확률이 크다.
정확하게 본인이 잘못하지 않고 주변 사람이 잘못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그 고난을 자신에게 주신 기회이고, 선물이라고 감사히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겠는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주변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여! 이 기회를 잡으십시요! 아마도 살아가면서 다시는 어떤 시련이나 고난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실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이나,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 앞에 설때, 정말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디. 오히려 자신에게 시련을 가져오게 한 그 주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껏 이러한 기회를 잡고도, 고난의 원인이 된 사람을 원망하며, 불평불만으로 그 시기를 지난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입니까? 사람도 잃고, 하나님의 축복도 잃는 것이지요.
셋째로 너무 잘살아서 시련을 당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별로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탄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탄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탄이 가진 무기는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요. 아니 욥과 같은 비범한 인간도 이기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사탄이 가진 무기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사탄의 실체를 찾아내고, 이기는 방법을 배우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모르면 거의 지게 마련이지만, 물론 알아도 이기기 쉽지 않지만, 알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너무 잘 살아서 시련을 당하는 경우,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는 큰 시련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지요. 물론 여러가지 선택의 순간에 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더 사랑하신다면, 시련을 주실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켰다고 주님께 자신있게 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고민과 시련을 주십니다. 왜 그랬냐구요? 그 청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지요. 부모가 물려 준 많은 재산으로 허랑방탕하며 향락적인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 청년은 그러지 않고 율법을 묵상하며 지키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고도 더 깊은 것을 추구했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쫒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후로 그 청년은 고민하며, 깊은 시름에 잠겼을 것입니다. 잘 살았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이 과연 잘못된 것이었을까? 예수님이 말씀이 맞는 말씀인 것 같은데, 나는 버릴 수 없으니 나는 한심한, 잘못된 사람인가? …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준 시련은 그에게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선물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형벌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시련을 남발하지 않는다.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사랑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시련을 준비하시지 않는다. 비교적 잘 살아온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혹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별다른 시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잘 돌아봐야 할 것이다. 혹시 내가 하나님이 포기한 사람이지는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기도하고, 힘들게 봉사하고, 가진 것을 다 남을 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련을 겪는 사람들은 이미 선택된 사람들이다. 감사하며, 시련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나아갈까? 더 큰 시련이 와도 더 감사할 준비를 하면 된다.
다음으로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 의 두번째 의미인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 즉 “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일까? “ 여기서 잘 짚어보아야 하는 것이, 내가 겪는 고난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잘 생각해 보면, 고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행동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스트레스의 의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선택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고난 중에 우리가 선택할 것이 없을까? 정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은 형벌일 것이다. 잠깐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해보자! 보통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아주 나쁜 처벌을 받는 사람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아니 잘못 살아가고도 그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시련과 고난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비록 내가 많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생각하고, 돌이킬 수 있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인 것이다. 시련을 주시지 않음이 형벌이지, 시련을 주심은 형벌이 아니다.
다시 이전 질문으로 돌아와서 답을 해보면, “아니다. 우리는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 고난 중에 대개는 세상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몰라준다고 한탄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비하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가족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감사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이다. 작년 이맘 때, 잉글우드라는 타운에 스파를 오픈하려고 15만불 정도를 쏟아붓고, Loan이 나오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완성이 되지 않은데다가, 불경기이고,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인수할 사람이 없었다. 랜드로드에게 포기를 알리고, 코트에 나가지도 않았고, 1년이 다 된 지금까지 For Rent 상태로 있다. 말하자면 랜드로드가 내게 렌트를 물릴 수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매달 6,000불의 빚이 싸이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그 로케이션이 내가 매일 출, 퇴근 시에 지나는 길에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기분 좋게 나오다가, 그곳을 지나면 우울해 지고, 머리가 복잡해 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몇번은 그곳을 지나는 것이 괴로와서 먼길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음이 왔다. 그곳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을 랜드로드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일이었다. 그곳에 새로이 들어올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도 있고, 그곳에 새로 들어올 사람의 비지니스를 축복하셔서, 랜드로드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며 기도할 수 있었다. 그후로 그곳을 지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고, 그곳을 지나면서 자주 주님을 만난다.
우리에게 주신 시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시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는 것이다. 정말일까? 시련과 고난이 정말 하나님의 선물일까? 나는 시련과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한다. 이 기간이 기회이기 때문이다. 내게 고난이 올 때,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이 이정도 였구나. 라고 깨달을 수도 있고, 내 가치가 이정도 였구나. 느낄 수도 있게 되고, 나와 비슷한 고난에 빠져 있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주님과 바짝 가까와진다.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았나? 아닌가? 의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에 살았나? 하는 것이다. 아골 골짝에서도 주님이 나를 업고 계시고, 소돔 거리에서도 주님이 나를 안고 계시면 무엇이 두려울까? 주님이 만져지고, 주님이 보이고,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운전을 하던, 누가 나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보던, 혹 깜깜한 밤에, 정말 공포스러운 곳에 혼자 있더라도, 무서울까? 정말 놀고 싶을 때에는, 하나님 하라고 하시는 것 열심히 했으니, 조금만 아주 즐겁게 놀게 해주세요! 하고 요청하면 왜 안들어 주실까? 대부분의 하는 일이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고 있으니, 결과가 걱정일까? 과정에 무슨 일이 있을까? 가 걱정일까? 일해도 즐겁고, 놀아도 즐겁고, 잠을 잘 때도 편안하고, 일어나도 기대가 넘치고. 가끔 가다가, 게으름 피려고 하면, 재촉하시겠지만, 재촉하시면 “에이 하고 말지!” 하고 하는 척 해도 좋을 것이고. 말 잘못하면 바로 옆에서 야단치실 것이고, 이상한 생각해도 바로 한대 때리실 것이고, 야단 맞아도 좋고, 한대 맞아도 크게 나쁠 것 없고.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어도 그냥 좋고, 아이들이 말을 안들어도, 하나님께 내려 놓은, 이삭처럼 제단에 바친 자식이니 뭐가 걱정이겠는가?
그러기에 고난과 시련이란 나에게는 정말 큰 기회이다. 시련 없음이 두려움이지, 고난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고난이 극복되어져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 자체가 감사이다. 남들이 보기엔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만약 그 상황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면… 바로 시련을 당하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그렇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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