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사랑은 원칙을 넘어

‘동성애’ 에 대해 나는 지금도 습관적으로 반대한다. 아무 생각 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냥 절대 반대다.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이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흥분한다. 미국이 망할 때가 되었다고 까지 말하곤 한다.
나에게는 두가지 경험이 있다. 대학원을 다닐 때니까, 아마도 85년 아니면, 86년 여름인 것 같다. 우리 농구 써클이 아주 잘 놀때여서 남이섬으로 MT를 갔는데, 아마도 25명 이상은 간 것 같다. 덩치로나, 성깔로나 한가닥씩 하는 놈들이 이정도 몰려다니니, 어디에 가도, 아무 꺼리낌 없이 설쳐대며 놀곤 했다. 남이섬에 하나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정신 없이 놀고 있는데, 한무리의 가죽 자켓을 입은 바이크 족들이 들어왔다. 한 열댓명쯤 될까?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놀고있는데, 이 친구들의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대부분이 크고, 남성미가 넘치는 우리 후배들에게 슬슬 접근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혹시 ‘호머’ 아닐까? 1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분이 아주 얹잖아졌다. 후배들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춤추면서 일부러 신체접촉을 하고, 바로 시비를 붙어서, 아주 박살을 내버리라고. 재미있는 것은 이 친구들의 감각이었다. 내가 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닌데, 후배들이 스테이지에서 그 친구들 쪽으로 접근하면 바로 피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가까이 와서 알짱거리더니, 후배들이 작전명령을 수행하려하자, 듣기라도 한듯이, 몇번을 피하더니, 바로 나이트클럽을 떠나버렸다.
이때 내 마음 속에서 이상한 어떤 느낌이 생겼다. 갑자기 그들이 불쌍하게 보였다. 뭔가 심하게 꼬인 것 같은 머리 속을 정리하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게이’ 는 뭐고, ‘호머’는 뭘까? 그 당시만 해도 그다지 오픈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념의 정의 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게이’란 외형으로는 남자지만, 홀몬이나, 정서 등이 여자인 그런 존재가 아닐까? 그들이 선택했다기 보다는 타고났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일종의 신체적, 정신적 불구자가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어떤 아이가 남성과 여성의 중간 쯤으로 태어난다면, 부모나 주위 사람들은 그 아이를 남자라고 하기 원할 것이고, 그렇게 키워갈 것이다. 대부분은 내적으로는 한없이 스트러글 하겠지만, 제도나 관습, 부모님에 대한 순종 등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내색하지 않고 살다 갈 것이다.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동성애’ 에 대한 막연한 증오를 ‘호머’로 돌렸다. 모두들 잘마시고 잘 놀고 들어 온 동기들과 후배들을 억지로 모아 놓고, 내 생각을 말했다. 그래서 ‘게이’는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 주어야 할 존재로, ‘호머’ 는 완전히 남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즐기는 아주 ‘죽일 놈’ 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내일 아침부터는 그 가죽 옷들에게 적대감 없이, 잘 대해주자고 했다.
아침을 먹고, 가죽 옷들 중에서 고참으로 보이는 두 친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어제는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괜찮다고 하며 나를 반갑게 맞았고, 파라솔 테이블에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랬다. 대부분이 잘사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고 매 주말마다 함께 지낸단다. 소수가 다니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여서, 가능하면 여럿이 몰려다니고, 복장들도 타프하게 보이게 하고 다닌단다. 써클과 마찬가지여서 가능하면 자기들끼리 쎅스를 하지는 않는단다. 자기들끼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해 반대되는 표현으로 ‘이반’ 이라고 부른단다. 불행하게도 ‘게이’와 ‘호머’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고, 섞여 있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기들은 여자였으면 좋겠단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지만, 머리 한구석, 마음 한구석에서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복잡했다.
점심 후에 수영장에서 모두가 함께 놀았는데, 아주 못볼 장면들이 연출됐다. 이 친구들 대부분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지들끼리 낄낄, 호호, 거리다가, 급기야 비키니 윗도리 벗기기를 하며 까불어 댔다. 시간이 좀 지나자 거의 다, 윗도리를 벗게 되었는데, 그 중에 몇몇은 중학교 1학년 쯤 되는 봉긋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윗도리가 벗겨질 때, 처음에는 “어마!” 하고 가슴을 가리기도 하더니, 조금 지나자, 거침 없이 같이 뛰어 놀았다. 가슴을 나오게 하기 위해, 홀몬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저녁 때 쯤, 그 친구들이 먼저 떠났는데, 악수를 나누며, 꽤나 아쉬워 하면서 길게 헤어졌다.
또 한가지의 스토리는 후배 중에서 나를 정말 따르고, 큰형 같이 나를 의지하던, 나도 막내 동생처럼 아끼던 후배가 남자를 좋아하는 ‘이반’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는 안하고, 학교 후문 앞에서 카페를 운영했는데, 그 후배를 그 까페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거의 나와 같이 먹고, 자고 했다. 같이 일년을 넘게 지냈는 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끔 없어지면 그 다음 날 저녁 쯤이나 되야 나타나서, 죄송하다고 하고 어디 갔다 왔냐고 하면,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왠만하면, 얼르고 괴롭혀서 알아내려 했겠지만, 왠지 힘들어하는 모습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후배가 없어졌는데, 다른 후배 하나가, 후배의 일기장을 들고 내게 왔다. 그 일기장은 눈물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동성애를 참을 수 없는지!!!’ 정말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더 같이 있으면서, 조금 더 뺑뺑이 돌리고, 피곤하게 만들어서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살게 하면 될까? 혼내는 것이 좋을까? 모르는 척 할까? 그 후배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 후배가 둘 쯤을 되는데, 그 아이들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결국은 후배를 불렀다. 조용히 둘이 앉아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힘드니?” 내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하는데, 한시간은 쉬지 않고 울었다. 보통 없어지면, 종로 3가나, 서울역 앞으로 간단다. 낮부터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종로에서 즐기고, 자기는 주로 심야에 참다, 참다 안되서 서울역 앞, 싸우나로 간단다. 이반 으로 가득 차있는 심야 싸우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함께 눕는단다. 얼마 후에 한번 그 후배를 찾으러 간적이 있어서, 내 머릿 속에 남아 있는 그 싸우나의 장면. 그 후배는 끝까지 이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미지의 홍콩으로 유학을 갔다. 그 후 다시 한국으로 와서, 직장 생활을 하는 그 후배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표정은 어떤 방식으로던 방황과 갈등을 극복하고 있었기에 다시 묻지는 않았다.
나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정말 반대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동성애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하는 두가지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반대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친구들에게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고, 연민을 느꼈고, 어쩌면 좋은 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다.그리고 내 후배를 아주 사랑한다.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동성애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아니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까? 그들도 사랑해야 한다면, 과연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동성애는 정죄하되, 그들은 사랑하자(?) 우리의 마음 속에 두가지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님은 동성애를 증오하신다!” “그들도 이웃이다. 이웃을 정죄하는 일은 네 몫이 아니다. 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해라!”
혹 이글을 읽는 당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 원칙을 중시하고, 원칙을 지키라고 외치는 나는, 마음을 슬며시 돌려 본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은 원칙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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